'샹파뉴, Sante'…순백의 거품에 취하는 프랑스의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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샴페인의 발상지, 샹파뉴 와이너리를 가다
샴페인의 발상지, 샹파뉴 와이너리를 가다
“내 삶의 유일한 후회는 샹파뉴를 더 마시지 못했다는 것이다.”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살아생전 입버릇처럼 했던 말이다. 맞다. 원활한 경제 성장을 위해 적극적인 정부의 개입이 필요하다는 것을 주장하고 입증한 거시 경제학의 창시자 케인스다. 위대한 경제학자는 무슨 이유로 이 가늘고 섬세한 기포를 내뿜는 ‘거품 술’ 샹파뉴에 열광했을까.
위스키와 백주는 물론 유명하다는 와인 산지까지 두루 다녀봤지만, 미지의 장소로 남아 있던 곳이 프랑스 샹파뉴다. 세상의 모든 발포성 포도주를 대표하는 이름, 오매불망 샹파뉴 여행을 꿈꾸다 드디어 올여름 로드 트립을 떠났다. 네 곳의 샹파뉴 메종(집이라는 뜻의 프랑스어)을 방문하고 생산 공정을 지켜볼 수 있었다. 감동적인 시음의 순간과 함께.
이상기후로 때아닌 소나기가 자주 내리던 초여름의 샹파뉴엔 포도알들이 부지런히 몸집을 키워가고 있었다. 샹파뉴에 사용되는 포도는 크게 세 가지 종류로 백포도주의 대표 품종 샤르도네와 고급 포도주의 동의어처럼 쓰이는 적포도 피노누아, 그리고 또 다른 적포도 피노뫼니에가 있다. 요즘은 다른 품종을 혼합하는 곳도 더러 있지만, 여전히 샹파뉴 지역의 포도 삼대장은 이 세 가지다.
샹파뉴는 대부분 생산 연도를 밝히지 않는데, 세 개 품종으로 만든 포도주를 생산자의 취향에 따라 뒤섞고 숙성시킨 뒤 전통적인 제조법에 따라 거품이 피어나는 포도주로 빚어낸다. 다른 나라, 그리고 샹파뉴 외 프랑스의 다른 지역에서 생산된 거품 포도주 이를테면 스페인의 카바, 이탈리아의 스푸만테나 프레세코, 독일의 젝트, 샹파뉴 지역이 아닌 곳에서 생산된 발포성 포도주를 이르는 크레망을 구별할 줄 모르는 이들이 모두 샹파뉴라고 에둘러 부르는 경향이 있으나 그것은 옳지 않다. 샹파뉴 생산자들에겐 모욕적인 일이기도 하다. 지역 명칭이 술을 지칭할 땐 주로 그 지역 토질과 환경이 영향을 줬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오직 샹파뉴 지역에서 자란 포도로, 전통 양조법에 따라 생산한 거품 포도주만이 샹파뉴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 있다.
웨이브 독자라면 이제 샴페인이라는 영어식 표현 대신 “샹파뉴”라고 고집스럽게 불러보면 어떨까. 축제와 파티의 명품 조연, 축하와 기쁨을 상징하는 술의 대명사, 샹파뉴로 함께 떠나보자.400년 된 지하 셀러에서 천천히 숙성
빌카르 살몽
빛과 바람 차단된 서늘한 저장고
저온에서 오랜시간 공들여 발효
부드러운 질감…마실수록 반전
샹파뉴 여행에서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빌카르 살몽’이다.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샹파뉴 메종이다. 니콜라 프랑수아 빌카르와 엘리자베스 살몽 부부에 의해 1818년 설립돼 200년 넘게 7대에 걸쳐 가족 경영을 해오고 있다. 샹파뉴에는 2000여 개가 넘는 생산지가 있는데, 빌카르 살몽은 재배부터 생산과 마케팅까지 모두 직접 한다. 이들은 저온 안정화 양조기법을 처음 개발한 메종으로 잘 알려져 있다. 온도를 높이면 발효가 빠르게 진행돼 시간은 단축되지만 낮은 온도에서 아주 천천히 포도주를 발효하면 마치 얇은 레이어를 켜켜이 쌓은 듯한 섬세한 균형감과 우아함을 느낄 수 있다고.
메종 주변을 돌아다니면 포도밭마다 심심찮게 빌카르-살몽의 로고가 큼지막하게 박힌 지표석을 만날 수 있다. 그중에서도 단연 자랑스러운 최고의 포도밭은 본사 바로 뒤에 있는 피노누아 단일품종을 생산하는 약 1㏊의 밭. 여기서 생산되는 포도는 작황이 좋은 해에만 최상급 제품인 ‘빌카르-살몽 르 클로 생틸레르(Billecart-Salmon Le Clos Saint-Hilaire)’로 만들어진다. 빌카르-살몽이라는 브랜드 이름 뒤에 이어지는 ‘르 클로 생틸레르(Le Clos Saint-Hilaire)’는 생틸레르라는 포도밭 이름을 딴 특별한 샹파뉴다. 생틸레르는 이 밭이 자리한 마을의 수호성인의 이름, 클로(Clos)는 토지에 담장을 둘러쳐 특별하게 관리하는 최고의 포도밭을 말한다. 1964년 집 뒷마당 버려진 땅에 시험 삼아 재배한 피노누아 몇 그루가 확장돼 1995년 최고 품질의 포도를 생산하고 양조하게 된 르 클로 생틸레르는 그 자체로 이 메종의 명성에 가치를 더한다. 대부분 양조장의 핵심은 늘 지하에 있다. 숙성 저장고 얘기다. 17세기부터 그 자리를 지켜온 어두컴컴하고 지상과는 확연히 온도가 다른 곳, 빛과 바람이 차단돼 길을 잃으면 헤어나오기 힘들 것 같은 미지의 세계가 거기에 있다. 짧게는 수년, 길게는 100년 가까이 숨죽이며 진행되는 미세한 화학 반응은 세계 경제를 움직이는 거시 경제학자 케인스도 들었다 놨던 바로 그 맛과 향을 잉태한다. 거품의 신비는 발효를 마친 포도주에 밑술을 더한 2차 발효를 통해 이뤄진다.
누구나 한두 번 들어봤을 전설적인 샹퍄뉴의 이름들, 이를 테면 수도사 페리뇽과 과부 클리코 여사도 저장과 숙성 과정에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더해 명성을 얻은 이들이다. 엄격한 생산 공정의 역사가 지하 터널과 같은 저장고에 숨어 있고, 균일한 2차 발효를 위해 모든 병은 매일 4분의 1바퀴씩 손으로 돌려준다. 살롱
최고급 샤르도네 단일 품종
장기간 숙성 극소량만 생산
우아한 기포·콤콤한 향 일품
‘빌카르-살몽’에 이은 다음 샹파뉴 메종은 ‘살롱’. 애니메이션 캐릭터 슈렉을 연상시키는 꼬불거리는 커다란 S로고로 유명한 살롱은 많은 와인 애호가들의 버킷리스트에 올라 있는 곳이다. 이곳을 찾은 건 단지 명성 때문이 아니다. 샹파뉴 안에서도 획기적인 발상의 전환을 이룬 곳이어서다. 애초에 샹파뉴는 프랑스의 다른 포도주 산지에 비해 열악한 환경을 갖고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서로 다른 등급의 포도주와 여러 품종을 섞어 안정적인 맛과 향을 부여한 것. 그러니까 이곳은 혁신과 도전의 와인 산지이기도 한 셈이다.
지금은 최고급 샹파뉴에 많이 쓰이는 방식-단일 품종, 단일 등급, 2차 발효 후 술을 첨가하는 ‘제로 도사주’ 등-을 메종 살롱은 이미 1905년 시도했다. 오로지 작황이 좋은 해에 메종 인근에서 생산된 최고급 샤르도네가 단일 품종으로 최초의 ‘블랑 드 블랑 샹파뉴’를 만들어낸 것. 적은 양만 생산되는 데다 숙성 기간도 길어 최고급 이미지를 100년 넘게 이어오고 있다. 방문객을 잘 받아주지 않는 살롱이어서 어렵게 승낙을 받아 파리에서 차로 가던 중 가벼운 사고도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한국 손님을 향해) 르 미넬-쉬르 오제(Le Mesnil-sur-Oger) 마을에 도착하자 살롱의 건물 한가운데 태극기가 펄럭이는 환대를 받을 수 있었다.
살롱 샹파뉴는 패션 칼럼니스트인 필자에게 더욱 특별한 애정을 유발하는 곳이다. 창립자 외젠 에메 살롱은 원래 모피 사업을 하던 의류업자다. 파리에서 성공한 이후 고향인 샹파뉴로 눈을 돌려 또 다른 창작을 해냈고, 그의 샹파뉴는 당대 최고의 레스토랑 막심의 고정 메뉴가 되면서 더 유명해졌다. 살롱이 타계한 뒤 소유권은 몇 차례 바뀌었지만, 전통적인 방식은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고, 거대한 샹파뉴 메종 중 하나인 로랑 페리에에 소속돼 있다.
살롱의 전설적인 첫 샤르도네 포도밭을 살펴본 뒤 지하 저장고로 향했다. 원료는 모회사인 로랑 페리에에서 만들어진 뒤 이곳에서 숙성과 저장을 하게 되는데 전기를 처음 사용한 후 도입된 오래된 방식의 조명 아래로 빈티지별 살롱 샹파뉴들이 눈에 들어왔다. 침전된 2차 발효의 효모 찌꺼기도, 이곳 토양을 느낄 수 있는 분필 같은 백악질층이 드러난 공간도 만날 수 있다. 단 두 병만 남은 1928년 빈티지 살롱은 가장 안쪽 성스럽게 모셔져 있었다.
역사와 함께 고이 잠들어 있는 살롱 샹파뉴를 뒤로하고 시음실로 돌아와 2013년 빈티지를 열었다. 우아한 기포와 콤콤한 향기, 존재감 있는 캐릭터를 여유 있게 전하는 카리스마가 단연 돋보였다. 인생을 살며 열심히 일하고, 부지런히 샹파뉴에 다시 돌아와야 할 이유와 에너지가 바로 여기 있었다.낡은 오크통과 천년의 포도밭이 빚어낸 절정
알로
1000년의 역사를 지닌 포도밭에서
15대째 가업 이어져 온 샴페인 명가
전염병도 비켜간 '황금 빈티지' 보유
샹파뉴 일정의 마침표는 알로(Arlaux)에서 찍었다. 소규모 메종이지만 국내 시장에서도 알음알음 사랑받고 있는 곳. 1000년이 넘는 기록을 가진 역사적인 포도밭에서 15대를 이어왔고, 필록세라 전염병이 창궐했을 때 이에 감염되지 않은 특별한 포도나무를 보유한 것만으로도 이미 인상적인 곳이다.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포도주 수입국이 된 우리에겐 이제 누구나 다 아는 굵직한 이름보다 숨겨진 작은 메종을 찾는 즐거움이 더 클 수 있겠다.
이번 기회에 샹파뉴의 매력에 젖어든 독자들에게 전하는 샹파뉴 상식! 샹파뉴 병에는 종종 블랑 드 블랑(Blanc de Blanc), 블랑 드 누아(Blanc de Noir)라는 표기가 있다. 주로 고급 샹파뉴에 들어가는데 의미를 알아두면 샹파뉴를 고를 때도, 얻어 마실 때도 좀 더 기분 좋게 마실 수 있다. 블랑은 프랑스어로 흰색을, 누아는 검은색을 뜻한다. 블랑 드 블랑은 청포도로 빚은 백포도주를, 블랑 드 누아는 적포도로 담근 백포도주를 의미한다. 샹파뉴는 포도주 범주상 백포도주에 속하니 블랑 드 누아의 경우 적포도를 착즙할 때 검붉은 껍질의 착색을 방지하기 위해 과육을 살살 짜는 방식을 사용한다. 동일한 양의 과즙을 얻기 위해 청포도보다 상대적으로 더 많은 포도를 쓴다는 점을 이해한다면 블랑 드 누아라는 딱지가 붙은 샹파뉴의 가치를 가늠해 볼 수 있겠다. 물론 최근 샹파뉴 생산의 트렌드인 ‘단일 포도밭의 단일 품종’으로 같은 연도에 만든 제품에 특별한 가치를 부여하는 방식을 고려하면 블랑 드 블랑 역시 주로 고품질 샤르도네 품종만 사용해 생산된다. 아무튼 샹파뉴 병에 이런 표기들이 보인다면 일단 고급품으로 생각해도 좋다.
나폴레옹은 일찍이 ‘승자에겐 너무나 마땅하며, 패자에겐 꼭 필요한 것’으로 샹파뉴가 인류의 필수품임을 강조했다. 한편 여성에게 해방을 선물한 사람이자 동시에 세기의 여성 난봉꾼으로 기억될지 모르는 코코 샤넬도 샹파뉴를 두고 잊지 못할 한마디를 남겼다. 앞서 소개한 경제학자 케인스와 수많은 전설적인 인물들이 이렇게 샹파뉴를 논했다면 우리가 샹파뉴와 사랑에 빠지지 않을 이유가 무엇일까. 샤넬의 말을 기억하며 샹파뉴를 피해야 할 이유를 찾아보기 바란다. 정말 그럴 수 있다면 말이다. “나는 두 경우에만 샹파뉴를 마신다. 사랑하고 있을 때와 아닐 때.” 앙리 지로
200년된 참나무 오크통
거대한 점토 항아리서 발효
일등석만 제공 '엔트리급'
앙리 지로(Henri Giraud)는 대한민국 국적기의 일등석 샹파뉴로 선정돼 더 유명해졌다. 앙리 지로를 향한 애정은 이들이 생산하는 엔트리급 샹파뉴의 매력 때문이다. 와인 애호가의 취향이란 제각각이어서 아무리 고가여도 ‘좋고 싫음’이 분명하게 나뉘기 마련. 그럼에도 와인을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긍정적인 반응을 넘어 한결같이 박수받는 것이 앙리 지로의 엔트리 샹파뉴 에스프리 나튀르(Esprit Nature)다.
에스프리 나튀르는 엉성한 나무 그림과 신비감을 불러일으키는 두 개의 점이 찍힌 ‘G 로고’가 우선 신선하다. 젊고 신비롭고 이국적인 앙리 지로의 이미지는 그 역사를 알면 한 번 더 놀란다. 1625년부터 샹파뉴를 업으로 삼아 12대째 가족 경영을 하는 유서 깊은 메종이어서다. 오랜 세월을 거치며 여러 위기를 극복해온 비결엔 실험 정신이 숨어 있다. 메종 한편엔 이런 말이 쓰여 있다.
‘무엇도 금하지 않고,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으며, 자연스럽게 좋은 와인을 만든다.’
실험적 시도가 좋은 평판으로 이어지기란 쉽지 않다. 이들의 실험이 궁금했다. 첫 번째, 앙리 지로의 오크통이다. 와인 메이커들이 포도를 가꾸는 토양의 품질에 깊은 관심을 쏟고 포도밭 관리에 매진하는 것은 기본. 앙리 지로는 포도주가 발효하고 숙성하는 오크통에 남다른 정성을 기울인다. 와인 숙성의 핵심이라고 할 만한 프랑스산 참나무 중에서도 ‘아르곤’이라는 이름을 지닌 특별한 숲의 참나무 목재를 사용한 오크통을 고집한다.
2016년을 기점으로 모든 라인업에 스테인리스 발효 및 숙성을 벗어나 오직 오크통을 쓰고 있다. 아르곤 숲의 토질은 다른 숲에 비해 좋지 않아 나무 생장 시간이 두 배 이상 걸린다. 200년 안팎 수령의 참나무로 통을 제작하는데, 성장 속도가 느린 만큼 곳곳에 쌓인 섬세한 향이 탁월한 매력을 발산한다. 제작 방식도 다르다. 아르곤 숲을 토질에 따라 여러 구역으로 나누고, 그 구역에서 만든 오크통에 숙성된 각각의 와인을 구분해 생산하는 것.
두 번째 실험적 시도는 스테인리스 사용을 포기하면서 ‘암포라(amphora)’로 불리는 계란형 항아리를 특별 제작해 사용한다는 점이다.
모래와 점토로 빚은 이 발효 탱크는 고대 테라코타 암포라보다 투과율이 훨씬 낮아 발효 효율이 높고 앙리 지로가 원하는 발효에 더욱 최적화된 용기라고 한다. 기존 포도주업계에서 사용해온 스테인리스 스틸, 그리고 적극적으로 활용 중인 오크통 발효 숙성과는 또 다른 맛과 향을 내는 데 기여하는 이런 시도를 통해 그 어떤 메종에도 없던 독특한 실험을 이어가며 새로운 맛으로 샹파뉴의 미래를 열고 있었다.
샹파뉴=이헌 칼럼니스트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살아생전 입버릇처럼 했던 말이다. 맞다. 원활한 경제 성장을 위해 적극적인 정부의 개입이 필요하다는 것을 주장하고 입증한 거시 경제학의 창시자 케인스다. 위대한 경제학자는 무슨 이유로 이 가늘고 섬세한 기포를 내뿜는 ‘거품 술’ 샹파뉴에 열광했을까.
위스키와 백주는 물론 유명하다는 와인 산지까지 두루 다녀봤지만, 미지의 장소로 남아 있던 곳이 프랑스 샹파뉴다. 세상의 모든 발포성 포도주를 대표하는 이름, 오매불망 샹파뉴 여행을 꿈꾸다 드디어 올여름 로드 트립을 떠났다. 네 곳의 샹파뉴 메종(집이라는 뜻의 프랑스어)을 방문하고 생산 공정을 지켜볼 수 있었다. 감동적인 시음의 순간과 함께.
이상기후로 때아닌 소나기가 자주 내리던 초여름의 샹파뉴엔 포도알들이 부지런히 몸집을 키워가고 있었다. 샹파뉴에 사용되는 포도는 크게 세 가지 종류로 백포도주의 대표 품종 샤르도네와 고급 포도주의 동의어처럼 쓰이는 적포도 피노누아, 그리고 또 다른 적포도 피노뫼니에가 있다. 요즘은 다른 품종을 혼합하는 곳도 더러 있지만, 여전히 샹파뉴 지역의 포도 삼대장은 이 세 가지다.
샹파뉴는 대부분 생산 연도를 밝히지 않는데, 세 개 품종으로 만든 포도주를 생산자의 취향에 따라 뒤섞고 숙성시킨 뒤 전통적인 제조법에 따라 거품이 피어나는 포도주로 빚어낸다. 다른 나라, 그리고 샹파뉴 외 프랑스의 다른 지역에서 생산된 거품 포도주 이를테면 스페인의 카바, 이탈리아의 스푸만테나 프레세코, 독일의 젝트, 샹파뉴 지역이 아닌 곳에서 생산된 발포성 포도주를 이르는 크레망을 구별할 줄 모르는 이들이 모두 샹파뉴라고 에둘러 부르는 경향이 있으나 그것은 옳지 않다. 샹파뉴 생산자들에겐 모욕적인 일이기도 하다. 지역 명칭이 술을 지칭할 땐 주로 그 지역 토질과 환경이 영향을 줬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오직 샹파뉴 지역에서 자란 포도로, 전통 양조법에 따라 생산한 거품 포도주만이 샹파뉴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 있다.
웨이브 독자라면 이제 샴페인이라는 영어식 표현 대신 “샹파뉴”라고 고집스럽게 불러보면 어떨까. 축제와 파티의 명품 조연, 축하와 기쁨을 상징하는 술의 대명사, 샹파뉴로 함께 떠나보자.
400년 된 지하 셀러에서 천천히 숙성
별을 삼킨 듯 차갑고 황홀
빌카르 살몽빛과 바람 차단된 서늘한 저장고
저온에서 오랜시간 공들여 발효
부드러운 질감…마실수록 반전
샹파뉴 여행에서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빌카르 살몽’이다.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샹파뉴 메종이다. 니콜라 프랑수아 빌카르와 엘리자베스 살몽 부부에 의해 1818년 설립돼 200년 넘게 7대에 걸쳐 가족 경영을 해오고 있다. 샹파뉴에는 2000여 개가 넘는 생산지가 있는데, 빌카르 살몽은 재배부터 생산과 마케팅까지 모두 직접 한다. 이들은 저온 안정화 양조기법을 처음 개발한 메종으로 잘 알려져 있다. 온도를 높이면 발효가 빠르게 진행돼 시간은 단축되지만 낮은 온도에서 아주 천천히 포도주를 발효하면 마치 얇은 레이어를 켜켜이 쌓은 듯한 섬세한 균형감과 우아함을 느낄 수 있다고.
메종 주변을 돌아다니면 포도밭마다 심심찮게 빌카르-살몽의 로고가 큼지막하게 박힌 지표석을 만날 수 있다. 그중에서도 단연 자랑스러운 최고의 포도밭은 본사 바로 뒤에 있는 피노누아 단일품종을 생산하는 약 1㏊의 밭. 여기서 생산되는 포도는 작황이 좋은 해에만 최상급 제품인 ‘빌카르-살몽 르 클로 생틸레르(Billecart-Salmon Le Clos Saint-Hilaire)’로 만들어진다. 빌카르-살몽이라는 브랜드 이름 뒤에 이어지는 ‘르 클로 생틸레르(Le Clos Saint-Hilaire)’는 생틸레르라는 포도밭 이름을 딴 특별한 샹파뉴다. 생틸레르는 이 밭이 자리한 마을의 수호성인의 이름, 클로(Clos)는 토지에 담장을 둘러쳐 특별하게 관리하는 최고의 포도밭을 말한다. 1964년 집 뒷마당 버려진 땅에 시험 삼아 재배한 피노누아 몇 그루가 확장돼 1995년 최고 품질의 포도를 생산하고 양조하게 된 르 클로 생틸레르는 그 자체로 이 메종의 명성에 가치를 더한다. 대부분 양조장의 핵심은 늘 지하에 있다. 숙성 저장고 얘기다. 17세기부터 그 자리를 지켜온 어두컴컴하고 지상과는 확연히 온도가 다른 곳, 빛과 바람이 차단돼 길을 잃으면 헤어나오기 힘들 것 같은 미지의 세계가 거기에 있다. 짧게는 수년, 길게는 100년 가까이 숨죽이며 진행되는 미세한 화학 반응은 세계 경제를 움직이는 거시 경제학자 케인스도 들었다 놨던 바로 그 맛과 향을 잉태한다. 거품의 신비는 발효를 마친 포도주에 밑술을 더한 2차 발효를 통해 이뤄진다.
누구나 한두 번 들어봤을 전설적인 샹퍄뉴의 이름들, 이를 테면 수도사 페리뇽과 과부 클리코 여사도 저장과 숙성 과정에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더해 명성을 얻은 이들이다. 엄격한 생산 공정의 역사가 지하 터널과 같은 저장고에 숨어 있고, 균일한 2차 발효를 위해 모든 병은 매일 4분의 1바퀴씩 손으로 돌려준다. 살롱
최고급 샤르도네 단일 품종
장기간 숙성 극소량만 생산
우아한 기포·콤콤한 향 일품
‘빌카르-살몽’에 이은 다음 샹파뉴 메종은 ‘살롱’. 애니메이션 캐릭터 슈렉을 연상시키는 꼬불거리는 커다란 S로고로 유명한 살롱은 많은 와인 애호가들의 버킷리스트에 올라 있는 곳이다. 이곳을 찾은 건 단지 명성 때문이 아니다. 샹파뉴 안에서도 획기적인 발상의 전환을 이룬 곳이어서다. 애초에 샹파뉴는 프랑스의 다른 포도주 산지에 비해 열악한 환경을 갖고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서로 다른 등급의 포도주와 여러 품종을 섞어 안정적인 맛과 향을 부여한 것. 그러니까 이곳은 혁신과 도전의 와인 산지이기도 한 셈이다.
지금은 최고급 샹파뉴에 많이 쓰이는 방식-단일 품종, 단일 등급, 2차 발효 후 술을 첨가하는 ‘제로 도사주’ 등-을 메종 살롱은 이미 1905년 시도했다. 오로지 작황이 좋은 해에 메종 인근에서 생산된 최고급 샤르도네가 단일 품종으로 최초의 ‘블랑 드 블랑 샹파뉴’를 만들어낸 것. 적은 양만 생산되는 데다 숙성 기간도 길어 최고급 이미지를 100년 넘게 이어오고 있다. 방문객을 잘 받아주지 않는 살롱이어서 어렵게 승낙을 받아 파리에서 차로 가던 중 가벼운 사고도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한국 손님을 향해) 르 미넬-쉬르 오제(Le Mesnil-sur-Oger) 마을에 도착하자 살롱의 건물 한가운데 태극기가 펄럭이는 환대를 받을 수 있었다.
살롱 샹파뉴는 패션 칼럼니스트인 필자에게 더욱 특별한 애정을 유발하는 곳이다. 창립자 외젠 에메 살롱은 원래 모피 사업을 하던 의류업자다. 파리에서 성공한 이후 고향인 샹파뉴로 눈을 돌려 또 다른 창작을 해냈고, 그의 샹파뉴는 당대 최고의 레스토랑 막심의 고정 메뉴가 되면서 더 유명해졌다. 살롱이 타계한 뒤 소유권은 몇 차례 바뀌었지만, 전통적인 방식은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고, 거대한 샹파뉴 메종 중 하나인 로랑 페리에에 소속돼 있다.
살롱의 전설적인 첫 샤르도네 포도밭을 살펴본 뒤 지하 저장고로 향했다. 원료는 모회사인 로랑 페리에에서 만들어진 뒤 이곳에서 숙성과 저장을 하게 되는데 전기를 처음 사용한 후 도입된 오래된 방식의 조명 아래로 빈티지별 살롱 샹파뉴들이 눈에 들어왔다. 침전된 2차 발효의 효모 찌꺼기도, 이곳 토양을 느낄 수 있는 분필 같은 백악질층이 드러난 공간도 만날 수 있다. 단 두 병만 남은 1928년 빈티지 살롱은 가장 안쪽 성스럽게 모셔져 있었다.
역사와 함께 고이 잠들어 있는 살롱 샹파뉴를 뒤로하고 시음실로 돌아와 2013년 빈티지를 열었다. 우아한 기포와 콤콤한 향기, 존재감 있는 캐릭터를 여유 있게 전하는 카리스마가 단연 돋보였다. 인생을 살며 열심히 일하고, 부지런히 샹파뉴에 다시 돌아와야 할 이유와 에너지가 바로 여기 있었다.
낡은 오크통과 천년의 포도밭이 빚어낸 절정
샴페인의 시간은 늙지 않는다
알로1000년의 역사를 지닌 포도밭에서
15대째 가업 이어져 온 샴페인 명가
전염병도 비켜간 '황금 빈티지' 보유
샹파뉴 일정의 마침표는 알로(Arlaux)에서 찍었다. 소규모 메종이지만 국내 시장에서도 알음알음 사랑받고 있는 곳. 1000년이 넘는 기록을 가진 역사적인 포도밭에서 15대를 이어왔고, 필록세라 전염병이 창궐했을 때 이에 감염되지 않은 특별한 포도나무를 보유한 것만으로도 이미 인상적인 곳이다.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포도주 수입국이 된 우리에겐 이제 누구나 다 아는 굵직한 이름보다 숨겨진 작은 메종을 찾는 즐거움이 더 클 수 있겠다.
이번 기회에 샹파뉴의 매력에 젖어든 독자들에게 전하는 샹파뉴 상식! 샹파뉴 병에는 종종 블랑 드 블랑(Blanc de Blanc), 블랑 드 누아(Blanc de Noir)라는 표기가 있다. 주로 고급 샹파뉴에 들어가는데 의미를 알아두면 샹파뉴를 고를 때도, 얻어 마실 때도 좀 더 기분 좋게 마실 수 있다. 블랑은 프랑스어로 흰색을, 누아는 검은색을 뜻한다. 블랑 드 블랑은 청포도로 빚은 백포도주를, 블랑 드 누아는 적포도로 담근 백포도주를 의미한다. 샹파뉴는 포도주 범주상 백포도주에 속하니 블랑 드 누아의 경우 적포도를 착즙할 때 검붉은 껍질의 착색을 방지하기 위해 과육을 살살 짜는 방식을 사용한다. 동일한 양의 과즙을 얻기 위해 청포도보다 상대적으로 더 많은 포도를 쓴다는 점을 이해한다면 블랑 드 누아라는 딱지가 붙은 샹파뉴의 가치를 가늠해 볼 수 있겠다. 물론 최근 샹파뉴 생산의 트렌드인 ‘단일 포도밭의 단일 품종’으로 같은 연도에 만든 제품에 특별한 가치를 부여하는 방식을 고려하면 블랑 드 블랑 역시 주로 고품질 샤르도네 품종만 사용해 생산된다. 아무튼 샹파뉴 병에 이런 표기들이 보인다면 일단 고급품으로 생각해도 좋다.
나폴레옹은 일찍이 ‘승자에겐 너무나 마땅하며, 패자에겐 꼭 필요한 것’으로 샹파뉴가 인류의 필수품임을 강조했다. 한편 여성에게 해방을 선물한 사람이자 동시에 세기의 여성 난봉꾼으로 기억될지 모르는 코코 샤넬도 샹파뉴를 두고 잊지 못할 한마디를 남겼다. 앞서 소개한 경제학자 케인스와 수많은 전설적인 인물들이 이렇게 샹파뉴를 논했다면 우리가 샹파뉴와 사랑에 빠지지 않을 이유가 무엇일까. 샤넬의 말을 기억하며 샹파뉴를 피해야 할 이유를 찾아보기 바란다. 정말 그럴 수 있다면 말이다. “나는 두 경우에만 샹파뉴를 마신다. 사랑하고 있을 때와 아닐 때.” 앙리 지로
200년된 참나무 오크통
거대한 점토 항아리서 발효
일등석만 제공 '엔트리급'
앙리 지로(Henri Giraud)는 대한민국 국적기의 일등석 샹파뉴로 선정돼 더 유명해졌다. 앙리 지로를 향한 애정은 이들이 생산하는 엔트리급 샹파뉴의 매력 때문이다. 와인 애호가의 취향이란 제각각이어서 아무리 고가여도 ‘좋고 싫음’이 분명하게 나뉘기 마련. 그럼에도 와인을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긍정적인 반응을 넘어 한결같이 박수받는 것이 앙리 지로의 엔트리 샹파뉴 에스프리 나튀르(Esprit Nature)다.
에스프리 나튀르는 엉성한 나무 그림과 신비감을 불러일으키는 두 개의 점이 찍힌 ‘G 로고’가 우선 신선하다. 젊고 신비롭고 이국적인 앙리 지로의 이미지는 그 역사를 알면 한 번 더 놀란다. 1625년부터 샹파뉴를 업으로 삼아 12대째 가족 경영을 하는 유서 깊은 메종이어서다. 오랜 세월을 거치며 여러 위기를 극복해온 비결엔 실험 정신이 숨어 있다. 메종 한편엔 이런 말이 쓰여 있다.
‘무엇도 금하지 않고,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으며, 자연스럽게 좋은 와인을 만든다.’
실험적 시도가 좋은 평판으로 이어지기란 쉽지 않다. 이들의 실험이 궁금했다. 첫 번째, 앙리 지로의 오크통이다. 와인 메이커들이 포도를 가꾸는 토양의 품질에 깊은 관심을 쏟고 포도밭 관리에 매진하는 것은 기본. 앙리 지로는 포도주가 발효하고 숙성하는 오크통에 남다른 정성을 기울인다. 와인 숙성의 핵심이라고 할 만한 프랑스산 참나무 중에서도 ‘아르곤’이라는 이름을 지닌 특별한 숲의 참나무 목재를 사용한 오크통을 고집한다.
2016년을 기점으로 모든 라인업에 스테인리스 발효 및 숙성을 벗어나 오직 오크통을 쓰고 있다. 아르곤 숲의 토질은 다른 숲에 비해 좋지 않아 나무 생장 시간이 두 배 이상 걸린다. 200년 안팎 수령의 참나무로 통을 제작하는데, 성장 속도가 느린 만큼 곳곳에 쌓인 섬세한 향이 탁월한 매력을 발산한다. 제작 방식도 다르다. 아르곤 숲을 토질에 따라 여러 구역으로 나누고, 그 구역에서 만든 오크통에 숙성된 각각의 와인을 구분해 생산하는 것.
두 번째 실험적 시도는 스테인리스 사용을 포기하면서 ‘암포라(amphora)’로 불리는 계란형 항아리를 특별 제작해 사용한다는 점이다.
모래와 점토로 빚은 이 발효 탱크는 고대 테라코타 암포라보다 투과율이 훨씬 낮아 발효 효율이 높고 앙리 지로가 원하는 발효에 더욱 최적화된 용기라고 한다. 기존 포도주업계에서 사용해온 스테인리스 스틸, 그리고 적극적으로 활용 중인 오크통 발효 숙성과는 또 다른 맛과 향을 내는 데 기여하는 이런 시도를 통해 그 어떤 메종에도 없던 독특한 실험을 이어가며 새로운 맛으로 샹파뉴의 미래를 열고 있었다.
샹파뉴=이헌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