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차량 화재가 '전기차 포비아'까지 이르게 한 정부
“전기차 구매를 상담하던 고객들의 연락이 끊겼습니다.” 9일 만난 서울의 한 수입차 매장 영업사원의 얼굴엔 수심이 가득했다. 중국산 배터리 여부를 공개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뭇매를 맞고 있는 탓인지 영업사원은 말을 아꼈다. 그러면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정부에서 별다른 요청을 받은 게 없었어요. 우린 한국 제도에 따랐을 뿐입니다.”

아파트 지하주차장에 있던 메르세데스벤츠의 중국산 배터리에서 발생한 화재가 다른 자동차까지 집어삼키는 영상이 퍼지면서 ‘전기차 포비아’가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일부 회사는 사옥에 전기차 출입을 금지했다. 서울시는 배터리 충전량이 90% 이상인 전기차를 자기 집(아파트)에 출입 금지하는 권고안을 9일 대책으로 내놨다.

포비아 뒤엔 불공정한 정보 공개가 있다. 차값의 40%인 배터리를 누가 만드는지를 일부 수입차회사는 밝히지 않는다. 그러니 한 민간업체가 전기차의 배터리 제조사 등을 담은 정보를 3000만원의 연회비를 낸 회원에게 파는 사업도 생겼다. 정보 불균형은 국민의 안전을 위협할 뿐 아니라 전기차 및 배터리산업 생태계의 최대 위기도 조성했다.

전기차 활성화는 탈탄소 시대로 가기 위한 핵심이다. 전 세계가 배터리를 장착한 모빌리티로의 전환을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한국은 이 같은 흐름의 최대 수혜주로 꼽힌다. 한국은 양극재(LG화학·포스코퓨처엠·엘앤에프)-동박(SK넥실리스·롯데에너지머티리얼)-배터리셀(LG에너지솔루션·SK온·삼성SDI)-전기차(완성차)로 이어지는 산업 구조를 완성했다.

하지만 전기차의 본격적인 대중화가 늦어지면서 K전기차·배터리산업은 최대 위기에 직면했다. 올 상반기 국내 전기차 판매량만 해도 1년 전보다 16.5% 급감했다. 현대자동차는 이런 우려로 지난 8일 전기차를 사면 미국 하와이 호텔 3박 숙박권을 주는 이벤트까지 들고 나왔다.

사정이 이런데도 정부는 뒷북 정책을 내놓는 데 급급하다. 한 자동차 영업사원은 “전기차 보조금을 주는 정부가 배터리 제조사 정보를 공개하라고 하는 건 사실 손바닥 뒤집기보다 쉬운 일이었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한 완성차 업체 관계자는 “환경부, 국토교통부, 산업통상자원부, 기획재정부, 소방청 등 부처별로 전기차와 관련해 다루는 영역이 제각각이라는 점도 문제”라고 했다.

정부는 이달 12일 회의를 열고 전기차 지하주차장 화재 발생 방지책을 논의해 다음달에 내놓을 예정이다. 지하주차장 화재에만 초점을 맞추지 말고 배터리 이력관리 시스템을 비롯해 소비자들의 전기차 공포를 잠재우고 한국의 미래 산업 입장도 담는 대책을 마련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