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픽 아나돌, '인공 현실: 산호' ©레픽 아나돌 스튜디오 /푸투라 서울 제공
레픽 아나돌, '인공 현실: 산호' ©레픽 아나돌 스튜디오 /푸투라 서울 제공
"언제적 삼청동입니까."

최근 만난 한 갤러리스트가 건넨 말이다. 한국국제아트페어(KIAF)-프리즈 서울이 2022년 삼성동 코엑스에 자리 잡은 게 시작이었을까. 지난 3년 사이 세계적인 화랑들이 물밀듯이 압구정·신사·청담 등 강남권에 한국 지점을 열기 시작했고, 둥지를 옮기는 국내 갤러리도 부쩍 늘었다.

그래도 한국 미술의 1번지는 여전히 삼청동이다. 아트선재센터 등 국내 최정상급 미술관과 갤러리현대, 국제갤러리 등 터줏대감 화랑들의 영향력은 건재하다. 국내외 거장들과 오랜 시간 구축한 네트워크, 신진 작가들을 발굴하는 안목도 무시할 수 없다. 이번 KIAF-프리즈 기간에 마련된 부스 외에도, 이들의 '본진'을 찾아야 할 이유다.

강철의 존 배 vs 섬유의 함경아

올해 한국 미술계가 프리즈 서울을 상대로 꺼내든 카드는 '거장의 재발견'이다. 미국을 대표하는 현대조각가 존 배의 개인전을 준비한 갤러리현대가 그 중심에 있다. 갤러리 신관에서 열리는 이번 전시는 2013년 갤러리현대 전시 이후 11년 만에 열리는 배 작가의 국내 개인전이다. 1960대 초기 강철 조각부터 작가를 상징하는 철사 조각까지 30여점을 선별해 보인다.
존 배, Involution, 1974, 철, 1016(h) x 1016(w) x 1016(d) cm /갤러리현대 제공
존 배, Involution, 1974, 철, 1016(h) x 1016(w) x 1016(d) cm /갤러리현대 제공
1949년 부모와 함께 미국으로 이민 간 배 작가는 지난 70년간 해외에서 한국 예술을 알리는 첨병 역할을 해왔다. 올해 초 맨해튼 중심부로 보금자리를 옮긴 뉴욕한국문화원의 개관전 작가로도 선정된 이유다. 철사를 주로 활용하는 배 작가는 미리 완성된 모습을 정해두고 작업에 임하지 않는다. 공간을 가로지르는 점과 선 사이 운명적인 조우 자체에 의미를 두기 때문이다.
Detail from Kyungah Ham's embroidery project, Courtesy of the artist and Kukje Gallery, 사진: 전병철. / 국제갤러리 제공
Detail from Kyungah Ham's embroidery project, Courtesy of the artist and Kukje Gallery, 사진: 전병철. / 국제갤러리 제공
국제갤러리는 함경아 작가의 부드러운 자수 작품으로 여기 맞선다. 마찬가지로 2015년 국제갤러리 전시 이후 9년 만에 한국에서 열린 함 작가의 개인전이다. 이번 전시에서 공개될 'embroidery' 신작은 이른바 함경아 실험미술의 결정체다. 그는 북한에 도안을 보내고, 북한 노동자들이 자수를 그대로 만들어오는 작업을 10여년째 해오고 있다.
서도호, 'Sectet Garden', 2012. Mixed media, single-channel digital animation, and display case with LED lighting, 78.35 x 70.87 x 32.28 inches (with display case). © Do Ho Suh. Courtesy of the artist, Lehmann Maupin New York, London and Seoul and Victoria Miro London & Venice. Photography by Jeon Taeg Su. /아트선재센터 제공
서도호, 'Sectet Garden', 2012. Mixed media, single-channel digital animation, and display case with LED lighting, 78.35 x 70.87 x 32.28 inches (with display case). © Do Ho Suh. Courtesy of the artist, Lehmann Maupin New York, London and Seoul and Victoria Miro London & Venice. Photography by Jeon Taeg Su. /아트선재센터 제공
아트선재센터에선 '움직이는 집'으로 세계적 작가 반열에 오른 서도호 작가를 만나볼 수 있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작품들은 건물과 건물 사이에 새로운 집을 만들거나, 세계 각지에 흩어진 작가의 '고향'들을 연결하면서 공간과 공동체의 의미를 조명한다. 2003년 아트선재센터에서 국내 첫 개인전을 가진 서 작가는 이로써 20여년 만에 아트선재센터와 재회하게 됐다.
유영국 'work', 1982. /PKM갤러리 제공
유영국 'work', 1982. /PKM갤러리 제공
1900년대 후반 국내 미술사에 족적을 남긴 추상화가들도 눈여겨볼 포인트다.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 유영국 화백(1916~2002)을 다룬 PKM갤러리도 그중 하나다. 작가 사후 최초로 공개되는 미공개 소품들을 비롯해 1950~1980년대 유화 작품 40여점을 소개한다.

리안갤러리 서울은 9월 4일부터 10월 19일까지 김택상 작가의 개인전을 연다. 파스텔톤 물감으로 캔버스를 물들인 신작 'Flow' 작업군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2019년, 2021년에 이어 작가가 리안갤러리에서 여는 세 번째 개인전이다.

피비갤러리는 분할된 평면 회화로 잘 알려진 이교준 작가의 기하학적 추상화를 선보인다. 전시는 9월 28일까지. 북촌에 소재한 한옥 호호재에서도 이교준 특별전이 열린다. 9월 2일부터 일주일 동안 고즈넉한 전통 가옥을 배경으로 이 작가의 단색화를 음미할 수 있다.

수십억 원 대 해외 대작들 '주목'

대작들을 직접 소장하는 데 관심이 있다면 송원아트센터에서 9월 8일까지 열리는 필립스옥션 특별전 '푸른 세계로의 여정'을 주목할 만하다. 니콜라스 파티, 우고 론디노네, 조지 콘도, 이우환 등 국내외 경매에서 낙찰가 최상위권을 달리는 작가들의 작품이 한자리에 모인다.
피에르 술라주, 'Peinture 202 x 143 cm, 25 septembre 1967', 1967, oil on canvas, 202 x 143cm. 추정가: US $1,790,000~3,080,000(약 24~41억 원) /필립스옥션 제공
피에르 술라주, 'Peinture 202 x 143 cm, 25 septembre 1967', 1967, oil on canvas, 202 x 143cm. 추정가: US $1,790,000~3,080,000(약 24~41억 원) /필립스옥션 제공
특히 이번 전시는 오는 11월 25~26일 이틀간 필립스 홍콩 근현대 미술 메인 경매에 출품될 작품들을 미리 실견해 볼 기회다. 프랑스의 추상 거장 피에르 술라주의 'Peinture 202x143㎝, 25 septenbre 1967', 중국 예술가 리우 예의 'Mondrian, Hello' 등 이번에 처음 경매에 출품되는 작품들도 포함됐다. 술라주 작품의 경우 추정가는 약 24억~41억원 선이다.
레픽 아나돌의 '기계 환각—LNM: 풍경'(왼쪽)와 AI 자연모델 이미지(오른쪽). ©레픽 아나돌 스튜디오 /푸투라 서울 제공
레픽 아나돌의 '기계 환각—LNM: 풍경'(왼쪽)와 AI 자연모델 이미지(오른쪽). ©레픽 아나돌 스튜디오 /푸투라 서울 제공
최근 북촌 가회동에 문을 연 푸투라 서울은 개관전으로 레픽 아나돌의 아시아 첫 개인전을 꺼내 들었다. 아나돌은 튀르키예 출신의 세계적인 미디어 아티스트로, 인공지능(AI)과 알고리즘을 결합한 작품들을 선보이고 있다. 지난해 63빌딩에서 한국인의 기억과 감정을 담아낸 작품을 선보이며 국내에도 알려졌다.

전시에선 생성형 AI 모델인 '대규모 자연 모델(LNM)'의 개발 과정을 공개한다. LNM은 작가의 팀이 사막과 열대우림 등을 취재하며 수집한 수억개의 이미지에 기반한 프로그램이다. 자연을 다룬 이번 신작들의 원천으로, 작가의 '비법 노트'나 마찬가지다. 아나돌은 '인공 현실: 산호', '기계 환각-LNM: 식물' 등 실험적인 작품들로 생태계 위기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울 예정이다.

'공동체·소수자' 외치는 신진 작가들

차세대 미술시장을 움직일 작가들을 발굴하려는 움직임도 분주하다. 엄정순, 딩이, 시오타 치하루 3인전이 열리는 학고재가 가장 눈에 띈다. 세 작가는 1990년대부터 현재까지 다양한 매체를 통해 예술의 공동체 정신과 사회적 함의를 탐구하는 작품을 선보여왔다. 세 명의 작가가 각각 한국·중국·일본을 대표해 선발된 만큼, 각자의 개인적인 경험이 어떻게 작품에 반영됐는지 비교하며 감상할 수 있다.
레베카 애크로이드 'The day to day', 2024. /페레스프로젝트 제공
레베카 애크로이드 'The day to day', 2024. /페레스프로젝트 제공
페레스프로젝트는 1987년생 영국 작가 레베카 애크로이드와 1997년생 덴마크 작가 안톤 무나르의 개인전을 각각 개최한다. 애크로이드는 여성의 신체를 연상하게 하는 부드러운 곡선의 이미지로 불안정하면서도 포근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잡초'를 전시명으로 선택한 무나르는 세상을 살아가는 불완전한 존재들을 조명하면서 이들을 대하는 편향된 인식을 되돌아보게 한다. 두 전시 모두 11월 17일까지다.
안톤 무나르 'tbt', 2023. /페레스프로젝트 제공
안톤 무나르 'tbt', 2023. /페레스프로젝트 제공
초이앤초이는 9월 4일부터 소수자에 초점을 맞춘 국내 작가 9인전을 진행한다. 1965년생 오인환부터 1999년생 성재윤까지 세대를 걸친 작가들을 아우르는 건 혐오의 대상으로 낙인찍힌 소수자 정체성이다. 1980~1990년대 포르노그래피를 차용한 이미지, 트랜스젠더 남성성을 다룬 사진 작품 등이 KIAF-프리즈 서울 기간 중 '나는 여기 있다'면서 존재감을 과시한다. 전시는 10월 19일까지.

안시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