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목재다. 목공예가들은 어디서 소재를 구할까? 제재소에서 신재(新材)를 사는 경우도 있지만, 근방에 쓰러져 있는 나무가 있으면 가져오기도 한다. 그러나 사유지도 아닌 남의 산에서 나무를 무단 벌채하는 것도, 사유지라 하더라도 관청으로부터 허가를 받지 않고 나무를 벌목하는 것도 산지관리법 위반이다.

조경업자나 목재소에서 나무를 받기도 한다. 이 경우, 다양한 산지, 수종의 나무를 구경할 수 있다. 나무는 태어난 지역에 따라 형태, 색, 무늬, 강도가 다르다. 성질에 따라 무엇이 될 수 있는 한계와 가능성이 명확히 있다. 목수가 멋진 가공 기술을 가지고 있는 것이 수작(秀作)의 필요충분조건이지만, 목수가 어떤 나무를 만나는 지가 목작업에서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래서 목수들은 평생 필연을 기다리듯, 필재를 만나길 기대한다.
김용회, 먹감나무 찻상, 2011 / 사진. ©김용회
김용회, 먹감나무 찻상, 2011 / 사진. ©김용회
목공예가들은 목재소에 좋은 소재가 나왔다는 소식을 들으면 직접 가서 나무의 결과 옹이 상태를 확인한다. 목재소에 가도 살 수 있는 나무는 극히 적다. 무늬가 좋으면 색이 아쉽다. 조건이 만족스러우면 가격이 높다. 망설이다 집에 들어와도 아쉬움이 떠나지 않고 아른거린다. 결국 구매하려고 다시 가면 다른 이가 가져가 소득 없이 돌아오는 때도 있다. 불가에서 ‘모든 인연에는 오고 가는 시기가 있다’는 ‘인연’의 뜻이 실감 나는 순간이다.

목공예가들의 소재 욕심은 공예가들 중에서도 남다르다. 나무는 유일무이하고 대체 불가하다. 재료의 희소성이 목공예의 매력이고 작업의 근간이다. 이 때문에 목수들은 늘 소재를 고르고 작업할 때 신중하다. 판단을 잘못하거나 실수하면 소재를 다시 구하기도 시도도 할 수 없다. 나의 부족함으로 다시 없을 소재(天才)의 가능성과 영속성을 단절시켜 결국 쓸모없게 만든다는 것이 얼마나 아쉽고 미안한 일인가!
목수는 목재가 가지고 있는 본연의 개성과 시간을 그대로 미감으로 살린다 / 사진. ©김용회
목수는 목재가 가지고 있는 본연의 개성과 시간을 그대로 미감으로 살린다 / 사진. ©김용회
요즘에는 오랜 폐교나 한옥에서 나온 고재를 사용해 작업하는 경우도 많다. 경상남도 지리산 악양에서 목수 청오 김용회는 지리산 근처 오래된 한옥이나 폐교, 제주도 전통가옥을 해체하며 나온 고재를 사용한다. 그것으로 다탁, 목다구(木茶具), 그릇 등을 만든다.

일반 목재 함수율이 12% 내외인 것에 반해 고재의 함수율은 7~8% 내외다. 고재는 오랜 시간 바람과 시간의 풍파를 견디며 잘 말랐으니, 별도 건조의 과정이 필요 없다. 손으로는 흉내도 못 낼 빛깔과 질감이 아름답다. 그만큼 희소가치가 높고 개성이 뚜렷하다. 고재에는 철물을 사용하고 빼낸 구멍, 결부공법으로 다양한 세월감, 구멍, 자국 등이 있다. 그것 또한 개성이요 가능성이다.
고재 안에는 선산한 바람도 불고, 바다를 채우는 일렁이는 물결도 있다 / 사진. ©김용회
고재 안에는 선산한 바람도 불고, 바다를 채우는 일렁이는 물결도 있다 / 사진. ©김용회
그는 나무의 잘린 단면과 상태를 보고 고재가 무엇이 될 수 있을 것인지 가능성과 한계를 판단한다. 어느 부분을 가장 잘 보이게 할 것인지 생각하고, 썩은 것, 갈라진 것, 옹이, 구멍 등을 살리거나 피해 무엇을 만들 것인지 상상력을 발휘한다.

지리산 작업실에 소재를 가져와 오래 곁에 두고 건조하는 동안, 오고 가며 스치는 시간은 영감을 발휘하는 시간이고 이해와 도전의 시간이다.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내려놨다 하길 거듭하여 나무가 갖출 쓰임, 솜씨로 만들 아름다움을 위해 재주와 감각을 부린다. 그의 목다구는 고재의 개성과 더불어 목공예가 이전에 화가였던 그의 미적 감각, 눈썰미, 취향 등이 어울려 완성된다.
김용회, 소나무 찻상, 2011 / 사진. ©김용회
김용회, 소나무 찻상, 2011 / 사진. ©김용회
늙고 속이 텅 빈 나무, 벌레가 먹은 나무 안에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가득 차 있다. 처음에는 숲 혹은 마을 어귀에 누군가 심어 높은 느티나무, 은행나무 묘목은 귀목(櫷木)나무였을 거다. 묘목에서 나무로 자라며 굳건히 풍상을 견디고 서서 무엇을 지켜보고 귀담아들었을까? 여름엔 사람들의 피서처가 되었다가,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었다가, 간절한 소망을 비는 이들에게는 신(神)도 되었을 것이다.

사목(死木)이 되면 목수의 선택으로 누구 집의 기둥, 툇마루, 대문, 가구가 된다. 나무는 죽은 것이 아니라 목수의 솜씨로 제2의 인생을 산다. 자신과 자연의 역사와 더불어 사람, 장소, 공동체의 역사를 덧입는다. 그것이 고재의 색, 질감, 형태다.
[위] 김용회, 상처를 간직한 살구나무 찻상, 2011 [아래] 김용회, 금강송 앉은뱅이찻상, 2011 / 사진. ©김용회
[위] 김용회, 상처를 간직한 살구나무 찻상, 2011 [아래] 김용회, 금강송 앉은뱅이찻상, 2011 / 사진. ©김용회
그렇다면, 고재로 만든 목다구를 사용해 차(茶)를 마시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고재 안에는 일차적으로는 묘목에서 귀목이 되기까지의 시간, 귀목에서 목재가 되기까지의 시간, 그리고 목재가 사람들과 함께 살아온 시간이 담겨있다.

불교의 눈으로 보면, 인간의 삶은 유한하다. 하지만 인간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 후일 업에 따라 다른 형태, 다른 방식으로 영속한다. 나무에서 목재로 다시 고재로, 고재에서 목다구로 변한 사물을 쓰다듬고 바라본다. 여러 번 찻잎을 덖어 만든 차(茶)를 우린다. 차는 정신을 맑게 한다. 부산한 마음을 가라앉히기에도 제격이다. 그러나 찻자리는 단순히 목을 축이는 시간이 아니라 새로운 삶, 영속의 증표를 확인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오랜 고재로 만든 다탁, 차도구를 손으로 쓸고 개성을 느끼면서, 동시에 눈과 입으로 차의 색, 향미를 음미하다 찬찬히 보면 조금씩 나 그리고 세상에 대한 이해와 조화의 심미안이 열리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김용회, 박달나무 다듬이목 찻상, 2021 / 사진. ©김용회
김용회, 박달나무 다듬이목 찻상, 2021 / 사진. ©김용회
홍지수 공예평론가•미술학박사·CraftMIX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