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첼리스트 피터 비스펠베이의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전곡 연주에 다녀왔다. 서양 음악사에 남겨진 이 위대한 작품을 한자리에서 듣는 특별한 경험을 놓치고 싶지 않기도 했지만, 근래 큰 프로젝트를 치르느라 복잡했던 머리를 첼로의 단선율에 기대어 식히고 싶은 마음이 사실 더 컸다. 3시간에 달하는 긴 공연이라 집중력과 체력을 모두 손에 쥐고 무대를 장악해야 하는 연주자만큼 관객에게도 상당한 집중력이 요구됐지만, 아름다운 1번 모음곡의 프렐류드로 시작해 굽이굽이 서사를 거치고 나니 어느새 6번 모음곡의 찬란함에 도달해 있었다.

▶▶[관련 리뷰] '다 아는 맛'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에서 접한 '새로운 맛'
<2024 예술의전당 국제음악제> 피터 비스펠베이의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전곡' 공연 사진 / 사진출처. 예술의전당 페이스북
<2024 예술의전당 국제음악제> 피터 비스펠베이의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전곡' 공연 사진 / 사진출처. 예술의전당 페이스북
3시간을 올곧이 쏟아낸 연주자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내며 만약 앙코르가 있다면 1번 모음곡의 프렐류드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리고 예상한 그대로 앙코르가 이어졌다. 바로 3시간 전에 이 무대의 시작을 열었던, 같은 장소에서 같은 첼리스트가 연주하는 똑같은 음이지만, 그것은 완전히 다른 음악이었다.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의 첫 테마가 마지막 변주 이후에 똑같이 이어지지만, 그것이 같은 음일지언정 같은 음악일 수는 없는 것처럼.

앙코르를 들으며 영화 <퍼펙트 데이즈>를 떠올렸다. 도쿄 시부야의 공공 화장실 청소부인 히라야마의 일상을 그린 이 영화는 매일 창밖에서 들리는 이웃의 비질 소리에 눈을 뜨고, 자판기에서 캔 커피를 뽑아 출근하고, 화장실 청소라는 자신의 하루 임무를 성실히 완수하며, 책을 읽다 잠이 드는 하루의 과정을 반복해서 보여준다.

언뜻 단조로워 보이지만 출근길 차 안에서 카세트테이프로 듣는 1960~70년대 팝송이 날씨와 기분에 따라 달리 선곡되고, 헌책방에서 책을 고르고, 화분에 물을 주고, 공원의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빛을 필름 카메라로 촬영하는 일상은 결코 단순하지만은 않다. 오랜 시간 몸에 익은 듯 날렵하고 세심한 손길로 매만지는 반복적인 하루에 시선이 머문다.

▶▶▶[관련 리뷰] 일상 속에서 빛나는 찬미, 빔 벤더스의 '퍼펙트 데이즈'
영화 '퍼펙트 데이즈'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영화 '퍼펙트 데이즈'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영화 <패터슨>도 비슷하다. 미국 뉴저지의 소도시 ‘패터슨’에 사는 버스 기사 ‘패터슨’의 일주일을 보여주는 영화에서 주인공 패터슨은 매일 일정한 시간에 일어나 시리얼로 아침 식사를 대신하고, 일터에 나가고, 퇴근 후에는 바에 들러 맥주를 마신다. 패터슨시(市) 출신의 시인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가 쓴 시집 <패터슨>을 좋아하는 패터슨은 휴식 시간과 일과를 마친 저녁에 시 쓰기에 매진한다. 그리고 다시 다음 하루가 시작된다. 패터슨의 반복적인 일상처럼 그의 집은 반복적인 ‘패턴’으로도 가득하다. 커튼에 그려진 동그란 무늬는 아내가 입은 옷과 아내가 만든 머핀까지 점령하고, 점점 다양한 패턴이 환 공포증을 일으킬 듯 화면을 가득 채운다.
영화 '패터슨'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영화 '패터슨'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두 영화에서 그리는 주인공의 일상은 정말 ‘같은 것’의 반복이기만 할까? 나는 그 답을 <퍼펙트 데이즈>의 한 장면에서 찾은 것 같다. 공공 화장실 변기를 보이지 않는 곳까지 구석구석 닦기 위해 거울을 비춰가며 솔질하는 히라야마에게 동료가 “그렇게까지 해야 하느냐.”고 묻는 부분이다. 동요하지 않고 묵묵히 자기 일을 마무리하는 것으로 답을 대신하는 히라야마를 통해 주어진 일상을 성실히 살아내다 보면 오늘과 다른 내일이, 지난주와는 다른 또 한 주가, 그렇게 일 년이 우리에게 주어질 거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영화 '퍼펙트 데이즈'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영화 '퍼펙트 데이즈'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언젠가 연극 연출가 이병훈 선생님께서 해 주신 말씀을 덧붙인다. “여행을 가기 전의 나와 여행을 다녀온 이후의 나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어야 한다.” 처음에는 시공간을 초월하기만 하면 조금은 다른 내가 될 수 있다는 의미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아니다. ‘다른 사람이 된다’는 결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되어 있어야만 한다’는 이 말에는 여행의 순간순간에 충실해야 한다는,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자 노력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숨겨져 있었다.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그저 흘려듣고는 앙코르가 다르게 느껴질 수 없고, 골드베르크 변주곡의 구조를 모르고 들어서는 마지막 변주가 다르게 다가올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영화 속 두 주인공의 하루하루가 여행이라면 어제와 다른 오늘의, 그리고 오늘과는 다를 내일의 일상이 같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지난 7월, 줄라이 페스티벌이라는 긴 여행을 다녀온 하콘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나는 지금의 우리가 분명 이전과는 다른 하콘일 것이라 단언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와 함께한 모든 스태프와 관객 역시 7월의 여행을 마친 지금, 무언가 다른 자신을 만나고 있기를 바란다. 그것이 하콘을 하며 느끼는 가장 큰 보람일 것이기에.
2024줄라이페스티벌 마지막날(7월 31일) 공연 후 퇴장하는 연주자 박종해 / 사진제공. 강선애
2024줄라이페스티벌 마지막날(7월 31일) 공연 후 퇴장하는 연주자 박종해 / 사진제공. 강선애
강선애 더하우스콘서트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