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아는 맛'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에서 접한 '새로운 맛'
사골 요리에는 누구든 ‘아는 맛’을 예상하는 법이다. 하지만 이전에 전혀 경험하지 못한 완전히 ‘새로운 맛’이 느껴지는 흔치 않은 순간도 있다. 그 순간 엄습하는 당황스러움은 실로 신선하고 또 짜릿하다. 지난 10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무대에 선 첼리스트 피터 비스펠베이는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전곡’이라는 사골 레퍼토리를 가지고 바로 이런 신선한 경험을 제공했다.

비스펠베이의 바흐 모음곡은 그 자체로는 새롭지 않다. 1990년 바로 이 레퍼토리를 가지고 데뷔 음반을 발표한 이래 1998년과 2012년 같은 곡을 세 번이나 녹음했다. 전 세계적으로 바흐 무반주 전곡 연주회를 족히 200회는 넘게 치렀으며, 한국에서도 2000년과 2012년 두 차례 그 무대를 가진 바 있다. 바흐 악보라는 동일한 지도를 가지고 떠나는 여행이었지만 그는 매번 걸어보지 않은 길을 선택하며 수월함과 익숙함에 기대기를 거부했다.

일단 이번 연주회가 이전 내한 공연과 다른 점은 악기였다. 바로크 첼로와 활을 사용한 과거 두 차례의 연주회와 달리, 이번에는 스틸 현과 엔드 핀을 당당하게 장착한 1760년산 조반니 바티스타 과다니니와 모던 활을 들고 등장했다.

고음악 거장 안너 빌스마의 제자인 그는 – 적어도 바흐에 한해서는 - 우리에게 시대 악기를 다루는 역사주의 전문 연주자로 인식이 높았다. 의외의 사실은 그는 빌스마에게 정작 바흐를 배운 적이 한 번도 없고, 바로크 첼로 연주도 독학으로 배웠다는 점이다. 바로크 스타일이란 정도(正度)가 따로 없으며, 어떤 악기를 사용하든 자신만의 언어를 사용해 감각을 개발하며 터득해야 한다는 것이 비스펠베이의 지론이었다.
'다 아는 맛'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에서 접한 '새로운 맛'
현대 악기를 쥔 비스펠베이는 역사주의 악기를 연주한 과거 내한 공연이나 음반에서보다 훨씬 자유로웠다. 그리고 파격적이었다. 템포 루바토의 사용도 늘어났고, 다이내믹의 스펙트럼도 극단적으로 확장되었다. 유려한 선율이나 춤곡의 우아한 아름다움을 부각시키는 선배들의 연주와 달리 비스펠베이의 바흐는 예의 투박하고 입체적으로 다가왔는데, 이는 악보 곳곳에 연주자가 임의로 배치한 악센트 및 프레이즈가 가져온 결과였다.

굳이 따지자면, 비스펠베이의 바흐는 회화보다는 서사, 즉 여섯 편의 ‘이야기’였다. 소리의 색채나 레이어, 질감, 균형미보다는 소리의 자연스런 흐름과 전개를 중시하며 각 춤곡의 리듬에 실린 인간의 희로애락을 각양각색의 수사를 동원해 흥미진진하게 풀어나갔다. 모든 모음곡의 프렐류드는 이야기의 시작을, 역동적인 발걸음으로 마무리되는 지그는 장엄한 결말을 상징했다.

음표라는 비언어적인 암호로 기록된 이 이야기 속에서 연주자는 상황이라든가, 분위기, 제스처, 표정에 이르기까지 끝없이 새로운 디테일을 상상했다. 현란한 활놀림으로 빚어낸 쿠랑트와 부레에서는 다혈질의 급한 성격이, 장난스럽고 경쾌한 가보트에서는 주인공이 느끼는 명랑한 기쁨이 꽃피었다.

두 번의 인터미션 후 3부에 따로 연주된 모음곡 6번은 그 높은 음역 때문인지 여성의 서사처럼 다가왔다. 본래 피콜로 첼로를 위해 작곡된 이 모음곡에서 비스펠베이는 비브라토를 훨씬 많이 사용하고 시시각각 바뀌는 호흡을 능수능란하게 화려한 기교로 처리했다.

모든 모음곡의 백미는 가장 음표가 적은 사라방드들이 장식했다. 희미하게 포진한 음표들 사이의 여백를 통해 그는 침묵이 소리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

노승림 음악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