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고재갤러리에서 출품하는 강요배의 '구름 속에'(2021).
학고재갤러리에서 출품하는 강요배의 '구름 속에'(2021).
닫혀 있던 문호를 활짝 열어젖힌 나라의 운명은 둘로 나뉜다. 밀려오는 선진 문물에 잠식당해 식민지로 전락하거나, 쇄신의 기회를 맞아 크게 성장하거나. 2022년 프리즈 서울(프리즈)이 열린 후 한국 미술시장의 운명은 둘 중 어느쪽일까. 후자에 가깝다는 게 국내외 미술계의 평가다. 해마다 눈에 띄게 성장하는 한국국제아트페어(KIAF)의 수준이 그 증거다.
KIAF와 프리즈의 공동 개최가 시작된 2022년만 해도 KIAF는 “프리즈보다 수준이 확연히 낮다”는 혹평을 받았다. 프리즈를 통해 한국 시장에 처음 진출한 해외 갤러리들이 누구나 알 법한 거장의 고가 작품을 들여온 반면, KIAF는 여러 유력 갤러리들이 프리즈로 옮겨가 전시를 한 탓에 오히려 평소보다 전력이 약화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해 평가는 달랐다. “눈여겨볼 만한 수준 부스가 많았다”, “특색 있는 작품이 많아서 신선했다”는 등의 호평이 잇따랐다. 갤러리현대가 선보인 라이언 갠더의 솔로 부스가 대표적인 예다. 갠더가 직접 칠한 하늘색 포르쉐가 등장한 이 화려한 부스는 “프리즈의 그 어떤 전시보다 더 멋지다”는 찬사를 받았다.

프리즈 못지 않다, KIAF의 ‘간판’들
이승택 '매어진 돌'.
이승택 '매어진 돌'.
올해 행사에서도 프리즈 못지 않은 화려한 라인업과 개성 있는 전시를 선보이는 유력 갤러리들이 눈에 띈다. 작년의 갤러리현대처럼 올해 간판 역할을 하는 대표적인 곳이 여성 조각가 김윤신의 솔로 부스를 준비한 국제갤러리다. 김윤신은 올해 베네치아비엔날레 본전시에 참여하며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명으로 자리매김했다. 갤러리현대는 올해 이강소, 이건용, 정상화, 김창열, 이우환 등 오랫동안 함께 일해온 거장들의 작품을 들고 나왔다. 가나아트 역시 박석원, 심문섭 등 ‘간판 스타’들의 부스를 준비했다.

KIAF에 참여하는 주요 갤러리 부스의 공통점은 이처럼 ‘갤러리와 함께 오랫동안 일해온 소속 작가’에 집중했다는 점이다. 이건용·남춘모·이강소 작품을 들고 나온 리안갤러리, 권오상·노상호·이정배 작품을 선보인 아라리오갤러리가 그랬다. 학고재갤러리도 지난해 광주비엔날레에서 박서보미술상을 수상한 엄정순을 비롯해 박광수, 김길후, 강요배 등 다양한 연령대 작가들을 선보인다. 우찬규 학고재 회장은 “상업성보다는 소속 작가를 알리고 키우는 데 집중하려 했다”고 설명했다.
막스 에른스트의 La forêt.
막스 에른스트의 La forêt.
서구권에서 참여하는 갤러리 중에서는 유명 서구 작가들의 작품을 들고 온 곳들이 많다. 전시 작가들의 이름값만 따지면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온 디에 갤러리가 최고로 꼽힌다. 지난해 마르크 샤갈 등 거장들의 그림으로 관심을 모은 이곳은 올해도 파블로 피카소와 막스 에른스트, 안젤름 키퍼 등 서구 거장들의 작품으로 시선을 잡아끈다. 미국 휴스턴에서 온 아트 오브 더 월드 갤러리도 여기에 뒤지지 않는다. 지난해 세상을 떠난 콜롬비아 출신의 화가 페르난도 보테로, 샤갈, 로버트 인디애나, 알렉산더 칼더 등이 전시 작가 리스트에 올랐다. 스페인의 알바란 부르다 갤러리는 클라우디아 콤테, 수퍼플렉스 등의 작품을 선보였다.

‘맨날 보던 그 이름들’ 대신 각양각색 개성

일부 대형 갤러리를 제외하면, KIAF에 참가하는 국내 갤러리들은 대체로 프리즈에 나온 해외 유수의 갤러리들과 그림 값으로 승부가 되지 않는다. KIAF-프리즈 공동 개최 첫 해 KIAF가 혹평을 받았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미술계 관계자는 “당시 KIAF 참여 갤러리 대부분이 이때까지 하던 대로 이우환·박서보·김창열 등 국내 대가들의 리세일 작품을 들고 나왔는데, 프리즈로 눈이 높아진 컬렉터들의 외면을 받았다”며 “이후 갤러리들 사이에서 ‘우리들만 보여줄 수 있는 국내 작가들을 보여주자’는 분위기가 생겨났다”고 말했다.

그래서 올해 KIAF 참여 갤러리들의 전시 작가 리스트에는 이우환, 박서보, 김창열 등 이때까지 한국 미술의 ‘간판 스타’로 이름이 높았던 작가들의 작품이 확 줄었다. 대신 그 자리를 채성필(갤러리 그림손), 김은진(금산갤러리), 이세준(스페이스 윌링앤딜링), 최지원(디스위켄드룸), 한진(갤러리에스피), 김시안(아트사이드갤러리) 같은 각양각색 매력의 국내 신진·중견 작가가 채웠다.
Edmund de Waal의 'Sunday Morning'.
Edmund de Waal의 'Sunday Morning'.
유망한 해외 작가들의 작품도 주목할만 하다. 갤러리밈은 일본 작가 카이토 이츠키의 작품을, 호주의 잔 머피 갤러리는 원주민 작가 베티 머플러의 작품을 선보였다. 영국의 갤러리 워터하우스&도드는 북마케도니아 출신으로 영국 런던에서 활동하는 엘리차 리스토바의 작품으로 솔로 부스를 꾸몄다.

아트페어의 꽃 특별전, 올해는 더 특별하게

각 갤러리들의 전시 수준이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빽빽하게 늘어선 부스만 있다면 그건 그야말로 ‘미술 장터’에 불과하다. 아트바젤 바젤을 비롯한 세계 유수의 아트페어들이 심혈을 기울여 특별전을 준비하는 이유다.
이강소의 'The Wind Blows-231008'.
이강소의 'The Wind Blows-231008'.
그래서 KIAF는 올해 특별전인 KIAF 온사이트를 파격적인 방식으로 구상했다. 인공지능(AI) 등 첨단 기술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태도와 나아갈 길 등을 탐구한 작품들을 별도 공간이 아닌 아트페어 행사장에서 선보인다. 특별전 기획을 맡은 이승아 큐레이터는 A홀에 양민하의 미디어아트 작품, A와 B 홀의 경계선에서 소개하는 진앤박과 캇 오스틴의 퍼포먼스, 최원정의 조각설치, 2층의 VR 전시까지 특별전의 동선을 따라가면서 키아프 총 200여개의 갤러리들의 작품을 함께 감상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 아트페어를 보기만 해도 작가가 직접 행사장을 돌아다니며 펼치는 행위예술 등 다양한 장르의 참신한 현대미술을 만날 수 있는 기회다.

수많은 갤러리들 속에서 길을 잃었다면 부스를 돌아다니며 ‘KIAF 하이라이트’ 표시를 찾아보는 것도 좋다. KIAF가 행사장 전체를 통틀어 작품성, 동시대성, 독창성, 확고한 정체성을 기준으로 가려 뽑은 10명의 작가들을 만날 수 있다.

성수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