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수 거지 속출"…혈세 2억 들인 '냉장고'에 시민들 분노 [혈세 누수 탐지기⑥]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폭염에 '생수 냉장고' 열 올리는 지자체들
지자체별 年2억 투입…"2개월 단기 계약"
지자체별 年2억 투입…"2개월 단기 계약"
"아까 드렸잖아요. 어르신 자주 오시잖아요. 알면서 도대체 왜 그러시는 거예요?"
13일 오전 10시 40분 서울 성동구 마장동 자전거체험학습장 인근 '샘물창고'.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얼굴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는 뙤약볕에 자원봉사자 60대 김모씨와 나모씨가 냉장고 앞문을 사수하며 시민들과 실랑이를 벌였습니다. 원칙은 '1인 1병'인데, 더 가져가려는 시민들 때문입니다. 생수 보충시간인 오전 10시 40분에 정확히 맞춰 채워진 200개의 500ml 생수병은 15분 만에 동나버렸습니다.
김씨는 "처음에는 줄 서서 받고 조금 이따가 돌아와선 다른 시민을 위해 물병을 꺼내는 동안 옆에서 기습으로 손을 쭉 뻗어 가져가는 시민분들이 있다. 그래서 2명이 필요하다"며 하소연했습니다.
이를 접한 다른 맘카페 회원들은 "그냥 전부 없애야 한다", "취지만 좋지, 전시행정이다", "안 했으면 좋겠다. 생수 거지를 양산하고 있다", "몇백원이라도 받아야 한다" 등 비판이 쏟아졌습니다.
최근 폭염에 대비해 '생수 냉장고'를 운영하는 지자체가 속속 등장하고 있지만 시큰둥한 반응이 나오고 있습니다. 여름 두 달 정도 운영되는 이 냉장고에는 지자체별로 약 2억원의 혈세가 투입됩니다. 통상 외부 업체와 용역 계약을 맺고, 대여 기간이 끝나면 업체가 냉장고를 수거해 가는 방식입니다. 이름도 지자체마다 다릅니다. 성동구는 '샘물창고', 중구에선 '오!빙고', 중랑구는 '옹달샘'이라고 부릅니다. 이 밖에도 부산 남구, 정읍, 합천군, 신안군, 진안군, 여수시 등등 셀 수 없이 많은 지자체에서 무료 생수 냉장고를 지정 장소 몇 곳에 설치하고, 정한 시간대별로 몇백개의 생수를 채웁니다.
하지만 모든 지자체에서 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령 영등포구나 강동구, 강북구 등은 노인센터와 경로당 등에 무더위쉼터만 운영하고, 강남구 등 일부 지자체에서는 이동노동자를 대상으로만 무료 생수를 나눠주고 있습니다.
온열질환자가 속출하는 탓에 취지는 참 좋다는 생각도 들지만, 운영 실태를 보면 곳곳에서 한숨 소리가 나옵니다. 자원봉사자 나씨는 "매일 냉장고 앞을 지키다 보면 시민분들 얼굴이 낯이 익다. 오전에 용답역 앞에서 물을 드린 것 같은데 오후에 마장동에서 또 물을 챙겨 가는 이가 있다"며 "매일 받던 사람만 계속 물을 수령하면 정작 물이 정말 급한 시민들은 마시지 못하게 되는 셈이다. 봉사하면서도 '물이 다 떨어져 미안합니다'라고 말할 때 마음이 안 좋다"고 전했습니다.
생수를 여러 병씩 가져가려는 이들의 사유는 참 다양했습니다. "저 앞에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다. 내가 대표로 온 것", "너무 더워 500mL로는 부족하다", "저번에는 2병씩 줬다던데 왜 오늘은 한 병씩만 주냐", "그냥 한 병 더 달라. 왜 이리 깐깐하게 구냐"며 막무가내로 언성을 높이는 시민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중복 수령자가 많아서일까요. 이날 기자가 성동구와 중구의 생수 냉장고를 돌아본 결과 생수보충시간을 기준으로 대부분 30분, 길어야 1시간 이내에 물이 동났습니다. 인근 지역을 오가며 너무 더울 때 물을 마시란 본 취지는 퇴색되고, '오픈런'을 하지 않으면 물을 마실 수 없는 셈입니다.
생수 받으러 왔다가 허탕 친 시민들은 분노했습니다. 냉장고 문을 열어보곤 물이 없자 버럭 화를 내던 한 시민은 "이럴 거면 차라리 구민만 받을 수 있게 주민등록증 검사를 해라"라며 인상을 찌푸렸습니다.
지자체는 어쩔 수 없다는 입장입니다. 한 구청 관계자는 "옥외 공간에 정수기를 설치하게 되면 출수구 오염 등 위생 문제가 우려돼 병 형태로 배부하고 있다"며 "다만 냉장고 바로 옆에 별도의 분리수거함을 설치해 페트병을 수거하고 있다"고 해명했습니다.
그러나 다수의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생수 냉장고 인근에서 버려진 페트병을 발견했다면서 '환경 오염'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발상 자체는 참신하다고 생각한다"면서도 "애당초 주민 센터와 같은 기존 시설을 활용해도 충분한 복지 서비스"라고 평가했습니다. 그러면서 "기본적으로 세금 낭비 성향이 강하다. 만약 꼭 해야겠으면 선별적인 지원이 필요하다. 진짜 이 서비스가 앞으로도 필요한지 전면적인 검토가 필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김영리/신현보 한경닷컴 기자
13일 오전 10시 40분 서울 성동구 마장동 자전거체험학습장 인근 '샘물창고'.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얼굴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는 뙤약볕에 자원봉사자 60대 김모씨와 나모씨가 냉장고 앞문을 사수하며 시민들과 실랑이를 벌였습니다. 원칙은 '1인 1병'인데, 더 가져가려는 시민들 때문입니다. 생수 보충시간인 오전 10시 40분에 정확히 맞춰 채워진 200개의 500ml 생수병은 15분 만에 동나버렸습니다.
김씨는 "처음에는 줄 서서 받고 조금 이따가 돌아와선 다른 시민을 위해 물병을 꺼내는 동안 옆에서 기습으로 손을 쭉 뻗어 가져가는 시민분들이 있다. 그래서 2명이 필요하다"며 하소연했습니다.
혈투장 된 시민들의 '오아시스'
한경 혈세 누수 탐지기(혈누탐) 팀이 생수 냉장고를 접한 것은 성동구 한 맘카페에 올라온 글이었습니다. 최근 한 회원은 생수 냉장고를 거론하며 "언제부턴가 물이 하나도 없어서 더워져서 그랬나 싶었는데, 어떤 할머니 한 분이 몇십병씩 나르는 걸 봤다. 그러지 말라고 말씀드리니 욕하고 가시더라"고 황당해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막내가 '저 할머니는 도둑인가 봐'라고 하더라"며 "모두를 위한 서비스인데 씁쓸했다"고 회상했습니다.이를 접한 다른 맘카페 회원들은 "그냥 전부 없애야 한다", "취지만 좋지, 전시행정이다", "안 했으면 좋겠다. 생수 거지를 양산하고 있다", "몇백원이라도 받아야 한다" 등 비판이 쏟아졌습니다.
최근 폭염에 대비해 '생수 냉장고'를 운영하는 지자체가 속속 등장하고 있지만 시큰둥한 반응이 나오고 있습니다. 여름 두 달 정도 운영되는 이 냉장고에는 지자체별로 약 2억원의 혈세가 투입됩니다. 통상 외부 업체와 용역 계약을 맺고, 대여 기간이 끝나면 업체가 냉장고를 수거해 가는 방식입니다. 이름도 지자체마다 다릅니다. 성동구는 '샘물창고', 중구에선 '오!빙고', 중랑구는 '옹달샘'이라고 부릅니다. 이 밖에도 부산 남구, 정읍, 합천군, 신안군, 진안군, 여수시 등등 셀 수 없이 많은 지자체에서 무료 생수 냉장고를 지정 장소 몇 곳에 설치하고, 정한 시간대별로 몇백개의 생수를 채웁니다.
하지만 모든 지자체에서 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령 영등포구나 강동구, 강북구 등은 노인센터와 경로당 등에 무더위쉼터만 운영하고, 강남구 등 일부 지자체에서는 이동노동자를 대상으로만 무료 생수를 나눠주고 있습니다.
온열질환자가 속출하는 탓에 취지는 참 좋다는 생각도 들지만, 운영 실태를 보면 곳곳에서 한숨 소리가 나옵니다. 자원봉사자 나씨는 "매일 냉장고 앞을 지키다 보면 시민분들 얼굴이 낯이 익다. 오전에 용답역 앞에서 물을 드린 것 같은데 오후에 마장동에서 또 물을 챙겨 가는 이가 있다"며 "매일 받던 사람만 계속 물을 수령하면 정작 물이 정말 급한 시민들은 마시지 못하게 되는 셈이다. 봉사하면서도 '물이 다 떨어져 미안합니다'라고 말할 때 마음이 안 좋다"고 전했습니다.
생수를 여러 병씩 가져가려는 이들의 사유는 참 다양했습니다. "저 앞에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다. 내가 대표로 온 것", "너무 더워 500mL로는 부족하다", "저번에는 2병씩 줬다던데 왜 오늘은 한 병씩만 주냐", "그냥 한 병 더 달라. 왜 이리 깐깐하게 구냐"며 막무가내로 언성을 높이는 시민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중복 수령자가 많아서일까요. 이날 기자가 성동구와 중구의 생수 냉장고를 돌아본 결과 생수보충시간을 기준으로 대부분 30분, 길어야 1시간 이내에 물이 동났습니다. 인근 지역을 오가며 너무 더울 때 물을 마시란 본 취지는 퇴색되고, '오픈런'을 하지 않으면 물을 마실 수 없는 셈입니다.
생수 받으러 왔다가 허탕 친 시민들은 분노했습니다. 냉장고 문을 열어보곤 물이 없자 버럭 화를 내던 한 시민은 "이럴 거면 차라리 구민만 받을 수 있게 주민등록증 검사를 해라"라며 인상을 찌푸렸습니다.
플라스틱 쓰레기 줄이자더니
환경 문제 지적도 나옵니다. 분리수거가 간편한 무라벨이라고 해도 여름 내내 지자체별로 수만개의 페트병이 버려지는 꼴이기 때문입니다. 기업과 소비자한테는 플라스틱 소비, 일회용 컵 줄이자고 하고 환경개선부담금 등을 받아 예산을 만드는 지자체가 플라스틱 쓰레기를 만드는 방식으로 예산을 집행한다니 '모순'이 아닐 수 없습니다.지자체는 어쩔 수 없다는 입장입니다. 한 구청 관계자는 "옥외 공간에 정수기를 설치하게 되면 출수구 오염 등 위생 문제가 우려돼 병 형태로 배부하고 있다"며 "다만 냉장고 바로 옆에 별도의 분리수거함을 설치해 페트병을 수거하고 있다"고 해명했습니다.
그러나 다수의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생수 냉장고 인근에서 버려진 페트병을 발견했다면서 '환경 오염'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꼭 이렇게 운영해야 할까
전문가들도 의아함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굳이 생수 냉장고를 야외에다 설치해 억대의 혈세를 들일 필요가 있겠냐는 지적입니다. 지금처럼 공터나 공원 등에 설치하지 않고 주민센터에 정수기를 활용하고, 그마저도 부족한 것 같으면 제빙기만 설치해 몇백만원이면 될 일 아니냐는 평가가 나옵니다. 이미 대부분 지자체에 노인 센터, 경로당 등을 활용해 무더위쉼터를 운영하는 정도가 적절한 것 아니냐는 조언도 나왔습니다.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발상 자체는 참신하다고 생각한다"면서도 "애당초 주민 센터와 같은 기존 시설을 활용해도 충분한 복지 서비스"라고 평가했습니다. 그러면서 "기본적으로 세금 낭비 성향이 강하다. 만약 꼭 해야겠으면 선별적인 지원이 필요하다. 진짜 이 서비스가 앞으로도 필요한지 전면적인 검토가 필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김영리/신현보 한경닷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