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00개의 LED 램프로 투박하게 꾸며낸 '미시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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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희 개인전 '사과와 달'
갤러리바톤서 9월 14일까지
저해상도 영상기기 활용한 신작 선보여
갤러리바톤서 9월 14일까지
저해상도 영상기기 활용한 신작 선보여
'현실보다 진짜 같은 전시'.
지난 몇 년 사이 유행처럼 자리 잡은 '몰입형 전시'가 추구하는 방향성이다. 희귀한 컬렉션을 영상으로 재현하거나 미지의 세계를 간접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을 조성하는 식이다. 초고화질 영상을 송출하는 발광다이오드(LED) 스크린, 또는 최신형 가상현실(VR) 기기를 동원했다는 전시 홍보 문구를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만나볼 수 있는 이유다. 이러한 트렌드에 역행하는 작가가 있다. 서울 한남동 갤러리바톤에서 개인전을 열고 있는 김덕희 작가는 저해상도 영상기기를 고집한다. 꼬마전구처럼 큼지막한 RGB 픽셀 칩을 사방에 흩뿌리는가 하면, 남들이 애써 감추는 케이블도 전시장 바닥에 그대로 노출한다. 흐릿하게 흘러나오는 영상이 오히려 호기심을 자아낸다. 몰입감이 여느 몰입형 전시 못지않다.
비(非)미술적인 소재를 통해 세계의 작동 원리를 탐구해온 그다. 코로나가 창궐하던 시기 제작한 '하얀 그림자' 연작이 대표적이다. 작가 자신과 지인들의 손을 본떠 만든 모형 내부에 발열 장치를 삽입하면서 비대면 시대에 사라져가는 체온을 형상화했다. 2021년 시작한 '밤' 시리즈에선 녹아내린 파라핀을 통해 무질서한 혼돈의 세계를 시각화했다. LED 디스플레이를 활용한 이번 신작들은 '시간'의 본질에 대해 질문한다. "인간은 현실을 살아가지만, 원자 단위의 세계에선 시간이란 개념 자체가 없죠. 우리가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영상들, 과거에서 미래로 이어지는 시간의 흐름도 전부 인식의 결과에 불과하다는 생각에서 출발했습니다."
이런 생각의 계기는 작가가 일본에서 유학하던 2000년대 무렵 퇴근길에 마주친 네온사인이었다. 처음에는 간판의 불빛이 회전하는 것처럼 보였다. 램프 하나하나를 톺아보니 그저 깜빡임을 반복할 뿐이었다.
세상사도 마찬가지였다. 숨가쁘게 돌아가는 현실에선 희로애락에 시달리지만, 인간도 결국 세포의 집합체에 불과하다. 양자역학의 세계에선 시간성이 와해되는 등 직관적으론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이 발생한다. 전시 제목은 '사과와 달'. 거대한 천체나 주먹만 한 과일이나 똑같은 물리 법칙이 작용한다는 사실을 떠올린 뉴턴의 일화에서 따왔다. 이번 전시의 설치작품 '움브라'(2024)의 RGB 램프들이 큼지막한 것도 픽셀의 기본 단위를 잘 보여주기 위해서다. 높이 2m짜리 네 개의 디스플레이가 각각 동서남북을 바라보는 것처럼 우뚝 선 작품이다. 작가는 디스플레이를 구성하는 6000여개의 픽셀을 하나하나 분해해서 납땜했다.
지난해 한국국제아트페어(KIAF)-프리즈 서울 기간 갤러리바톤 부스에 소개된 전작 'Blue Hour'(2023)에 비해 한층 더 조각조각 분해된 모습이다.
'움브라'는 작가가 직접 촬영하거나 인터넷에서 수집한 영상을 상영한다. 그런데 관객이 실제로 마주하는 건 불규칙한 패턴으로 반짝이는 빛의 일렁임뿐이다. 이미지를 이루지 못하고 그저 빛의 깜빡임으로 분해된 각각의 픽셀은 물질의 기본 단위인 원자와도 닮았다. 폭죽의 폭발음과 총성, 갓난아이의 울음소리 등이 영상의 내용을 어렴풋이 짐작하도록 돕는다. 전시장 벽에 걸린 25점의 '부분일식'(2024)은 픽셀이 맨눈으로 구분되는 저해상도 영상기기를 활용했다. 미시세계와 거시세계의 경계를 무너뜨리기 위해서다. 작품에선 일상의 풍경과 우주의 이미지가 드러났다가 사라지길 반복한다. 영상이 진행할수록 행성처럼 보이는 이미지가 사실 사과의 껍질이고, 초신성인 줄 알았던 불꽃이 실은 작은 모닥불이란 사실이 드러난다.
전시를 몰입해서 봤다면 오는 9월 KIAF-프리즈 서울 행사장을 함께 둘러볼 만하다. 갤러리바톤 부스에서 작년에 이어 올해도 김 작가의 작품을 소개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유령 같은 인체의 형상을 혜성의 꼬리에 비유한 '코마' 등을 출품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전시는 9월 14일까지다. 안시욱 기자
지난 몇 년 사이 유행처럼 자리 잡은 '몰입형 전시'가 추구하는 방향성이다. 희귀한 컬렉션을 영상으로 재현하거나 미지의 세계를 간접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을 조성하는 식이다. 초고화질 영상을 송출하는 발광다이오드(LED) 스크린, 또는 최신형 가상현실(VR) 기기를 동원했다는 전시 홍보 문구를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만나볼 수 있는 이유다. 이러한 트렌드에 역행하는 작가가 있다. 서울 한남동 갤러리바톤에서 개인전을 열고 있는 김덕희 작가는 저해상도 영상기기를 고집한다. 꼬마전구처럼 큼지막한 RGB 픽셀 칩을 사방에 흩뿌리는가 하면, 남들이 애써 감추는 케이블도 전시장 바닥에 그대로 노출한다. 흐릿하게 흘러나오는 영상이 오히려 호기심을 자아낸다. 몰입감이 여느 몰입형 전시 못지않다.
비(非)미술적인 소재를 통해 세계의 작동 원리를 탐구해온 그다. 코로나가 창궐하던 시기 제작한 '하얀 그림자' 연작이 대표적이다. 작가 자신과 지인들의 손을 본떠 만든 모형 내부에 발열 장치를 삽입하면서 비대면 시대에 사라져가는 체온을 형상화했다. 2021년 시작한 '밤' 시리즈에선 녹아내린 파라핀을 통해 무질서한 혼돈의 세계를 시각화했다. LED 디스플레이를 활용한 이번 신작들은 '시간'의 본질에 대해 질문한다. "인간은 현실을 살아가지만, 원자 단위의 세계에선 시간이란 개념 자체가 없죠. 우리가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영상들, 과거에서 미래로 이어지는 시간의 흐름도 전부 인식의 결과에 불과하다는 생각에서 출발했습니다."
이런 생각의 계기는 작가가 일본에서 유학하던 2000년대 무렵 퇴근길에 마주친 네온사인이었다. 처음에는 간판의 불빛이 회전하는 것처럼 보였다. 램프 하나하나를 톺아보니 그저 깜빡임을 반복할 뿐이었다.
세상사도 마찬가지였다. 숨가쁘게 돌아가는 현실에선 희로애락에 시달리지만, 인간도 결국 세포의 집합체에 불과하다. 양자역학의 세계에선 시간성이 와해되는 등 직관적으론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이 발생한다. 전시 제목은 '사과와 달'. 거대한 천체나 주먹만 한 과일이나 똑같은 물리 법칙이 작용한다는 사실을 떠올린 뉴턴의 일화에서 따왔다. 이번 전시의 설치작품 '움브라'(2024)의 RGB 램프들이 큼지막한 것도 픽셀의 기본 단위를 잘 보여주기 위해서다. 높이 2m짜리 네 개의 디스플레이가 각각 동서남북을 바라보는 것처럼 우뚝 선 작품이다. 작가는 디스플레이를 구성하는 6000여개의 픽셀을 하나하나 분해해서 납땜했다.
지난해 한국국제아트페어(KIAF)-프리즈 서울 기간 갤러리바톤 부스에 소개된 전작 'Blue Hour'(2023)에 비해 한층 더 조각조각 분해된 모습이다.
'움브라'는 작가가 직접 촬영하거나 인터넷에서 수집한 영상을 상영한다. 그런데 관객이 실제로 마주하는 건 불규칙한 패턴으로 반짝이는 빛의 일렁임뿐이다. 이미지를 이루지 못하고 그저 빛의 깜빡임으로 분해된 각각의 픽셀은 물질의 기본 단위인 원자와도 닮았다. 폭죽의 폭발음과 총성, 갓난아이의 울음소리 등이 영상의 내용을 어렴풋이 짐작하도록 돕는다. 전시장 벽에 걸린 25점의 '부분일식'(2024)은 픽셀이 맨눈으로 구분되는 저해상도 영상기기를 활용했다. 미시세계와 거시세계의 경계를 무너뜨리기 위해서다. 작품에선 일상의 풍경과 우주의 이미지가 드러났다가 사라지길 반복한다. 영상이 진행할수록 행성처럼 보이는 이미지가 사실 사과의 껍질이고, 초신성인 줄 알았던 불꽃이 실은 작은 모닥불이란 사실이 드러난다.
전시를 몰입해서 봤다면 오는 9월 KIAF-프리즈 서울 행사장을 함께 둘러볼 만하다. 갤러리바톤 부스에서 작년에 이어 올해도 김 작가의 작품을 소개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유령 같은 인체의 형상을 혜성의 꼬리에 비유한 '코마' 등을 출품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전시는 9월 14일까지다. 안시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