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이제 극장에 가지 않는다. 아니 이건 너무 극단적인 표현이다. 사람들은 이제 열광적으로 극장에 몰리지 않는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사람들은 이제 한 두 가지의 영화만 잔뜩 틀어 대는 멀티플렉스 극장에 질려 한다’가 되겠다. 그렇다고 예전의 종로코아아트홀(1989~2004)이나 시네코아(1997~2006) 시대처럼 덩그러니 단관 스크린만 있는 예술영화전용관을 좋아라 하지도 않는다. 뭔가 특색있고, 멋을 부렸으며, 이것저것을 같이 할 수 있으며, 심지어 뭔가를 먹거나 마실 수가 있는 데다가 기다리는 동안 조용히 책을 읽을 수 있는 ‘나만의 작은 공간’같은 곳을 원한다. 세련되고 약간은 잘난 척 하는 것 같은 극장, 마동석 같은, 멀티플렉스의 무지막지한 상업영화 공세를 완전히 피해 가는 곳, 그런 극장의 전성시대가 다시 찾아 오고 있다.

영화에 등장하는 소설을 출판사와 협업해 전시한다거나(씨네큐브), 한 감독이나 배우의 필모그래피를 마치 전시회처럼 일정 기간 파보는 기획이나(한국영상자료원 디깅 프로젝트), 반려동물과 함께 입장해 영화를 본다거나(영화공장) 하는 일은 기존 멀티플렉스 극장이 감히 시도하지 못한 일이다. 이런 극장에서는 팝콘을 먹어대는 빌런을 만날 확률이 없다. 대신 옆 좌석에 나와 취향이 비슷한 사람들이 앉아 온전히 몰입할 수 있다는 안도감이 든다.

시간과 공간은 횡보하며 만나고 서로를 교차시킨다. 예술영화의 시대가 다시 한번 도래할지도 모른다. 예술영화의 공간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다가서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 작은 극장, 개성있는 극장, 예쁘고 귀여운 극장, 사람들에게 자신 1인에게만 서비스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극장이 새로운 시대를 주도할 것이다. 작은 극장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작은 영화관의 시대…파주에서 인천·고창까지 시네필들의 천국여행
경기 북부, 파주 헤이리 마을에 있는 헤이리 시네마 건물은 늘 북적이는 곳이다. 어떤 주말 같은 경우는 아예 발 디딜 틈이 없는데 그건 안타깝게도 헤이리 시네마 극장 때문은 아니다. 1층에 있는 커피공장103 카페와 빵집, 브런치와 디저트의공간 때문이다. 커피가 맛있다. 헤이리 예술마을에 사는 영화감독 박찬욱과 영화음악가 조영욱이 단골로 찾는 곳이다. 유명세 탓에 그들은 앉아서 커피를 마시고 가기 보다는 원두를 사가는 편이다. 이 카페는 3층까지 연결돼 있다. 3층에서는 통유리로 보이는 헤이리 마을의 전경을 감상할 수 있다. 그 구석에 바로 극장 헤이리 시네마가 있다.
헤이리 시네마 / 사진. ©헤이리 시네마
헤이리 시네마 / 사진. ©헤이리 시네마
헤이리 시네마는 딱 30석이다. 요즘 말로 ‘찐’영화 애호가들이 오는 곳이다. 사실 마니아 말고는 이 구석진 소형 극장을 잘 알지 못한다. 30석이기 때문에 꽤나 아늑하다. 어떤 영화의 경우, 아주 가끔 이긴 해도, 나 홀로 관객일 경우도 있다. 그럴 때는 완전한 프라이빗 공간이 된다. 그래서 1층의 커피와 베이커리를 가지고 들어 올 수가 있다. 좌석 또한 간단한 식사가 가능하게 작은 테이블이 비치돼 있다.
헤이리 시네마 / 사진. ©헤이리 시네마
헤이리 시네마 / 사진. ©헤이리 시네마
헤이리 시네마의 강한 특성은 스피커, 오디오 시스템이다. 30석 공간이지만 멀티플렉스에 버금가는 사운드 장비를 갖추고 있어(프로세서 dolby cp 950, 파워앰프 QSC DCA 1824, 스피커 QSC SC-412C 등) 영화를 즐기기에 최적의 상태로 돼있다. 헤이리 시네마에 한번 가면 자꾸 가게 된다. 방해 받고 싶어 하지 않는 개별주의, 의도된 고립감, 나의 영화 보기는 당신들과 다르다는 나만의 우월감 등등을 느끼고 싶다면 헤이리 시네마 만한 공간이 없다.
헤이리 시네마 / 사진. ©헤이리 시네마
헤이리 시네마 / 사진. ©헤이리 시네마
지난 7월 한달엔 예술영화의 삼위일체라 불리며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고 있는 ‘퍼펙트 데이즈’ ‘존 오브 인터레스트’ ‘프렌치 수프’가 당연히 롱 런 상영됐다. 세 작품 상영은 8월까지도 이어 간다. ‘우리와 상관없이’ ‘더 납작 엎드릴께요’ ‘피렌체와 우피치 미술관’ ‘생츄어리’ ‘땅에 쓰는 시’같은 영화는 평소 거의 들어 본 적이 없는 작품들일 것이다. 헤이리가 좋은 것은 이처럼 늘 생소하고 낯선 영화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건 웬지 차별성이 있어 보이게 하고 그래서 나 스스로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나는 나대로 혼자 가고 있음을 느끼게 해준다. 단, 차가 없으면 접근성이 떨어진다는 점이 약점이다.

서울 동작구 사당동 남태령 고개길로 넘어가기 직전에 있는 아트 영화관 ‘아트 나인’은 세가지 트리올로지 구성으로 돼있는 극장이다. 영화를 보는 극장인 ▲아트(art) 나인과 여기에 걸 영화를 수급하는 ▲엣(at) 나인, 그리고 극장 내에서 운영되는 이탈리안 레스토랑 ▲잇(eat) 나인 등 세 가지이다.
아트나인 0관 / 사진출처. ©예술영화관 아트나인 엑스(구. 트위터)
아트나인 0관 / 사진출처. ©예술영화관 아트나인 엑스(구. 트위터)
잇(eat)나인 테라스 / 사진출처. 잇나인 인스타그램
잇(eat)나인 테라스 / 사진출처. 잇나인 인스타그램
아트 나인 극장주는 영화를 중심으로 보고 마시고 먹고를 동시에 구현하겠다는 취지로 공간을 짰다. 아트 나인의 상영관은 모두 2개관으로 각가 92석과 58석짜리이다. 작다. 그러나 아트 나인의 최대 강점이자 특징은 12층에 위치한 극장의 테라스를 통유리 전경으로 확 트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400인치 짜리 4K LED를 걸었는데 이 테라스 극장이야 말로 아트 나인을 찾는 관객들의 별미 중 별미로 꼽힌다. 의자를 배치하고 ‘극장식 테라스’로 만들 경우 입석까지 포함해 최대 100명이 수용된다. 영화 외 행사나 파티가 종종 열리는 공간이기도 한데 이럴 경우 200명까지로 제한인원 수가 올라간다. 테라스 극장은 모든 극장주들의 야심이랄 수 있는 야외 상영의 욕망을 기술적으로 구현해 낸 것이다. 수도권 남부권의 전경을 함께 즐기는 영화 보기는 그 자체가 스펙터클이다.
아트나인 0관, 상영 전 블라인드 개방 모습 / 사진출처. 아트나인 페이스북
아트나인 0관, 상영 전 블라인드 개방 모습 / 사진출처. 아트나인 페이스북
아트나인 시네마 테라스 / 사진출처. ©예술영화관 아트나인 엑스(구. 트위터)
아트나인 시네마 테라스 / 사진출처. ©예술영화관 아트나인 엑스(구. 트위터)
아트나인 시네마 테라스 2024 썸머시즌 / 사진출처. 아트나인 페이스북
아트나인 시네마 테라스 2024 썸머시즌 / 사진출처. 아트나인 페이스북
아트나인은 ‘최신 고전’의 작품들을 재상영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우울 3부작’인 ‘님포매니악’ ‘멜랑꼴리아’ ‘안티 크라이스트’ 등은 아트 나인 같은 데서 보는 것이 제격이다. 일본의 ‘품격있는’ 로망 포르노를 거는 것은 여기 프로그래머 격인 주희 이사가 일본 클래식 영화 통이기 때문이다. 조슈아 오펜하이머가 만든 ‘액트 오브 킬링’처럼 정치역사적으로 도발성이 강한 작품도 아트 나인 몫이다. 다큐멘터리 ‘판문점’은 아예 전국 배급까지 직접 나선 작품이다. 아트 나인을 가서 영화 시간이 좀 남아 뭐라도 하나 먹을까 생각한다면 바질 새우 파스가 괜찮다. 16,900원이다.
잇나인 '바질 새우 파스타' / 사진출처. 예술영화관 아트나인 엑스(구. 트위터)
잇나인 '바질 새우 파스타' / 사진출처. 예술영화관 아트나인 엑스(구. 트위터)
부산의 모퉁이 극장은 언제부턴가 명소가 됐다. 일단 외관이 아주 그럴 듯 하다. 부산은행 문화재단 BNK가 3년 전인 2021년 8월에 투자를 해 지금의 모습으로 꾸몄다. 원래의 부산은행 1호 점 건물을 개조한 것이다. 1층이 은행, 2층이 갤러리, 3층이 극장이다. 모퉁이 극장은 원래 시민중심의 씨네클럽과 커뮤니티 시네마 그룹의 영화 운동 단체로 이 극장을 부산영화제의 추천으로 위탁 운영하게 됐다. 궁극적으로 ‘BNK 모퉁이 극장’은 부산은행 소유다. 72석의 단관 극장이다. 긋즈샵 ‘금지옥엽’이 있고 라운지 휴게소로 ‘청년작당소’가 있다. 작은 극장이지만 예술영화에 대해 목말라 하는 부산 시민들에게는 귀중한 시설이다. 모퉁이 극장이 위치하는 광복동과 남포동은 전통의 극장 거리였다. 부산극장과 대영극장은 한때 서울 종로3가의 주요 극장들이었던 단성사와 서울시네마 극장과 같은 레벨의 시설이었다. 이제는 모두 폐관됐다.
BNK부산은행아트시네마 / 사진출처. ©Busan Beat
BNK부산은행아트시네마 / 사진출처. ©Busan Beat
BNK부산은행아트시네마 Film Memorial Street / 사진출처. ©Busan Beat
BNK부산은행아트시네마 Film Memorial Street / 사진출처. ©Busan Beat
남포동의 BIFF거리, 곧 영화의 거리도 그 상징성이 퇴락하는 시기이다. 모퉁이 극장은 부산 영화가(街)로서의 맥과 정통성을 이어 가고 있다. 광복동 같은 올드 타운에는 대형 멀티플렉스보다 아트영화 전용관이 더 어울린다는 것을 보여주는 산 증인 같은 공간이 됐다. 7월 한달과 8월은 ‘퍼펙트 데이’ 등이 운영에 큰 활력을 불어 넣고 있다. 바야흐로 부산에서도 예술영화의 시대가 열리고 있음을 보여 준다.
부산 BIFF 거리 / 사진출처. Korea Trip Tips
부산 BIFF 거리 / 사진출처. Korea Trip Tips
인천이 부산과 함께 영화적으로 ‘개항’의 역사를 지녔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현존하는 극장 중 가장 오래된 것이 바로 인천 애관극장이다. 1895년, 인천 개항후 3년이 지나 만들어진 조선인 최초의 극장 협률사(이후 축항사로 한번 개명)가 1921년 애관극장이 됐다. 129년의 역사다. ‘애관극장을 사랑하는 시민 모임’ 등이 만들어져 폐관을 막고 재개관을 위한 노력 등이 이어지면서 현재도 최신 영화들을 상영하고 있다.
동인천에 있는 애관극장. 현존하는 극장 중 가장 오래된, 129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동인천에 있는 애관극장. 현존하는 극장 중 가장 오래된, 129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애관극장만큼은 아니지만 유수한 역사를 지닌 인천의 극장 중에는 미림극장이 있다. 1957년 천막극장으로 시작해 2004년까지 운영되다가 2013년에 재개관됐다. 고전영화와 예술영화상영 전용관으로 고집스럽고 꿋굿하게 공익형 극장사업을 이어 가고 있다.

미림극장의 특징은 2층 발코니석이 있는 오페라형 극장이라는 점이다. 일종의 팰리스 시대 복층 구조의 건축물이다. 1,2층 합쳐서 253석이다. 극장의 호화로움은 그 세월의 내면을 마음 속으로 추적해 들어 가면 눈에 보이는 법이다. 지금은 다소 낡고 투박해 보여도 모든 것이 반짝 거리던 시절엔 얼마나 세련된 공간이었는 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런 레트로 정서를 추구하거나 좋아하는 사람들은 미림극장의 소중함을 잘 알고 있다. 마치 미국 뉴욕의 링컨 플라자 내 극장을 연상케 한다. 옛것이지만 그래서 더 좋은 극장이 바로 인천의 미림극장이다. 다양한 행사들로 어떻게든 극장의 생명을 이어가려 애쓰고 있다. 매년 9월에 열리는 ‘세대공감 영화제’가 올해로 네 번째이다. 지난 6월에는 이곳에 일본의 미니시어터 관계자들이 대거 내한해, ‘한일 영화관 협력 포럼’을 열기도 했다.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는 못했지만 숨은 보석 같은 귀중한 모임이었다. 한일 양국이 예술영화관, 작은 극장으로 연대하고 협력할 수 있음을 보여 준 사례였다.
인천 미림극장 / 사진. ©KMDb
인천 미림극장 / 사진. ©KMDb
전북 고창읍은 고창군의 주요 지역이다. 고창군 인구 5만명 중 40%가 모여 사는 곳이고 고창읍성이 유명하다. 수많은 사극 드라마와 영화가 여기서 촬영됐다. 최근 작품으로는 MBC 드라마 ‘연인’이 있다. 이준익 감독은 ‘사도’ 등 자신의 많은 작품을 여기서 찍었다. 영화 촬영의 거점이라는 점을 의식하듯 고창군은 읍성 바로 앞에 작은 극장을 만들었다.

동리시네마란 이름의 2개관 93석 규모의 극장이다. 원래는 동리국악당이었으나 극장으로 개조했다. 2014년 때의 일이다. 10년이 됐다는 얘기이다. 작은 극장이지만 소니 4K 시네마 프로젝터(SRX-R515)를 설치해 관람의 만족도는 최고 수준이다. 이런 극장은 꼭 영화를 보러 오는 것이 1차 목적이 아니아도 된다. 고창읍성을 둘러 보고 약간 지친 몸을 쉬러 오는 공간으로 활용해도 좋다. 아주 추운 날, 혹은 아주 더운 날에는 피한과 피서로 제격이다. 몸 상태에 따라 영화를 보면서 좀 자도 된다. 극장이 꼭 극장이어야만 할 필요는 없다. 함께 하는 공간이면 되는 것이다.
작은 영화관의 시대…파주에서 인천·고창까지 시네필들의 천국여행
오동진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