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美 픽업트럭
“열여섯 살이 되자마자 모아둔 250달러로 픽업트럭을 샀다네.”

미국 최고 권위의 음악상 그래미 어워드 대상(1998년)을 받은 인기 컨트리 가수 조 디피의 히트곡 ‘픽업 맨’ 가사다. 픽업트럭 덕에 학교에서 가장 예쁜 여학생과 놀러 다녔다는 내용이 흥겨운 기타 반주에 이어진다. 미국 자동차보험사가 성인 20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에서는 여성 응답자의 32%가 검은색 픽업트럭을 운전하는 남성에게 가장 끌린다고 답했다. 픽업트럭이 주는 자유로우면서도 거친 야생의 ‘상남자’ 느낌이 매력적이라는 설명이다.

헨리 포드가 1925년 최초의 픽업트럭 ‘모델T 픽업 보디’를 선보인 이후 픽업트럭은 미국을 상징하는 차로 자리 잡았다. 서부 개척 시대 마차 짐칸에 텐트와 가재도구를 싣고 캘리포니아의 금광으로, 텍사스의 유정으로 향하던 프런티어 정신이 그대로 녹아 있다. 미국경제분석국은 픽업트럭 판매량으로 호·불황을 판단한다.

광활한 땅에 끝없이 뻗은 도로망. 1000㎞ 넘게 달려도 휴게소 하나 찾기 힘든 경우가 종종 있는 미국에서 픽업트럭을 전기차로 만들어 파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도전이다. 충전 인프라를 촘촘하게 까는 것도 힘들뿐더러, 주행거리를 늘리기 위해 배터리를 키우면 차체가 무거워지는 문제가 있다.

지난 6일 현대자동차 남양연구소에서 양희원 연구개발(R&D)본부장(사장) 주재로 열린 회의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현대차·기아가 2028년 출시를 목표로 개발 중인 픽업트럭(코드명 TE·TV)에 주행거리 연장형 전기차(EREV) 기술을 적용하는 방안이 논의됐다. EREV는 엔진으로 발전기를 돌려 배터리를 충전하는 전기차다. 연료만 넉넉히 싣고 다니면 인적 드문 오지로 떠나는 것도 가능하다.

현대차는 1986년 소형 세단 엑셀로 미국 땅을 밟았다.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으로 전선을 넓힌 현대차·기아는 투싼, 싼타페, 텔루라이드를 잇달아 성공시키며 미국 시장에 안착했다. 마지막 퍼즐 조각은 픽업트럭이다. 현대차·기아가 EREV 픽업트럭으로 텍사스주 카우보이의 마음을 사로잡을지 지켜볼 일이다.

김진원 산업부 기자 jin1@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