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준의 시선] 거대한 착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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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 개막식 등장 앙투아네트
'가짜 뉴스'의 질긴 생명력 증명
혼돈과 광기의 '혁명 진면모'에
눈감은 '진보', 허상에 집착
'미망'서 벗어나는 현실 자각이
공동체의 미래를 결정하는 초석
이응준 시인·소설가
'가짜 뉴스'의 질긴 생명력 증명
혼돈과 광기의 '혁명 진면모'에
눈감은 '진보', 허상에 집착
'미망'서 벗어나는 현실 자각이
공동체의 미래를 결정하는 초석
이응준 시인·소설가
제33회 파리 올림픽 개막식에서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는 자신의 잘린 목을 든 채 창가에 서 있었다. 센 강변 콩시에르주리에서 연출된 이 가관은 프랑스 대혁명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인식 수준을 드러낸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가짜뉴스의 희생자라는 사실은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하지만 ‘악마화’에 팩트는 소용이 없다. 한 번 저렇게 역사적 관용어로 굳어지면 하나님이라고 한들 꼼짝없이 지옥에 갇히게 돼 있다. 물론 정반대도 가능하다. 악마를 영웅이나 천사로 만들 수도 있다. 정치가 가짜뉴스를 포기 못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프랑스 대혁명 자체가 가짜뉴스라면? 프랑스 대혁명에 대한 부정적 비평은 혁명 그 당시부터 ‘최근까지’ 있어 왔다. 에드먼드 버크의 <프랑스 혁명에 관한 성찰>이 그러하고 알렉시스 드 토크빌의 <미국의 민주주의> 역시 비슷한 기조다. 가장 중요한 연구로는 프랑스인 의사이자 사회심리학자 귀스타브 르 봉의 <프랑스 혁명과 혁명의 심리학>(1912)을 꼽을 수 있다. 그는 프랑스 대혁명의 실상과 본질이 ‘자유·평등·박애’라는 가면을 쓴 대학살과 대혼돈, 이성적 근대의 입구는커녕 종교적 광기와 야만임을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통찰한다. 이런 아수라에 휘말려 100년 남짓 반동과 퇴보를 거듭하는 동안 프랑스는 유럽의 낙후국(落後國)이 돼버렸다고 진단한다. 정작 자유공화민주주의를 성취하고 발전시킨 것은 ‘혁명이라는 거짓’이 아니라 ‘개혁이라는 진실’을 택한 영국과 미국이었고 독일의 경제성장은 이 두 나라 못지않았다. 르 봉은 프랑스 대혁명이 사회주의, 공산주의와 동일한 유전자를 지녔음을 간파했고 향후 사회주의의 대실패를 ‘인간과 세상의 이치’를 동원해 차분히 설명한다.
르 봉의 ‘사회심리학적 진실’은 미제스와 하이에크의 ‘경제학적 진리’와 합치된다. 러시아 볼셰비키혁명 5년 전에 출간된 <프랑스 혁명과 혁명의 심리학>은 소련의 멸망을 대략 80년 전에 예언한 셈이다. 1931년에 생을 마감한 르 봉은 유럽은 물론 전 세계, 특히 프랑스의 지식인들이 소련을 사상의 조국으로 동경하는 꼴을 목격했다. 그러나 그가 정말로 우려한 것은 그런 눈에 보이는 소련이 아니라 ‘인간존재 내부에 원래 있는 소련’과 그 개개인들이 ‘좀비군중’이 되어 언제든 재개할 수 있는 ‘프랑스 대혁명적 지옥도(地獄圖)’였다. 이후 20세기 역사는 그 우려를 실현했고 21세기에는 더 다양한 방식으로 증명 중이다. 스탈린과 마오쩌둥과 폴 포트와 PC처럼. 프랑스 대혁명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자뻑’과 변태적 페티시즘은 중화전체주의가 염색체에 각인된 중국의 상하관계 설정강박과 유치찬란 일대일로(一帶一路) 폭력성에 비견된다.
어쨌거나 프랑스인들의 저런 고질병이 자기들끼리의 병으로만 그치면 다행이련만, 프랑스인도 아닌 주제에 미망에 빠진 자들은 소련이었다가 쿠바였다가 베네수엘라였다가 병든 스웨덴이었다가 심지어는 북한이었다가 하는 것 ‘등등’으로 신줏단지를 전전하는데 이런 ‘꺾이지 않는 마음 같은 어리석음’의 디폴트값이 바로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거대한 착각’인 것이다. 특히 한국인들에게는 이 악영향이 샤머니즘적 성향과 시너지를 내며 지독하다. 우리는 언제든 정의를 내세워 단두대를 광장에 설치하려는 세력에게 선동당할 준비와 각오가 잘 갖추어진 ‘깨어 있는 민주시민들’이다.
이 지긋지긋한 현실을 깨닫고 거듭나 새 시대를 세팅하는 일이 우리 공동체의 미래를 결정한다. 그나마 기회가 남아 있다면 다행인 것은, 사회와 국가는 민족처럼 하늘에서 뚝 떨어진 환상이 아니라 사람들이 필요에 의해 애써서 만든 인공물이기에 훼손과 오염이 일정 시대를 초과해 지속되면 화석보다 더 돌이킬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지금의 프랑스는 그 지경으로 보인다. 자기들만 그 사실을 모른 채 춤추고 노래하고 발광할 뿐이다. 그러나 93년 전 생을 마감한 한 프랑스인의 충고를 가슴 깊이 새겨 들어야 할 사람들은 프랑스인들이 아니다. 중국이 중국인들의 길을 가듯 프랑스는 프랑스인들의 길을 가면 그뿐이다. 다만, “너희가 홀린 이 거대한 착각이 너희를 나처럼 만들 거야.” 파리 올림픽 개막식에서 영원히 부관참시 당하고 있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목 잘린 얼굴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그런데 만약, 프랑스 대혁명 자체가 가짜뉴스라면? 프랑스 대혁명에 대한 부정적 비평은 혁명 그 당시부터 ‘최근까지’ 있어 왔다. 에드먼드 버크의 <프랑스 혁명에 관한 성찰>이 그러하고 알렉시스 드 토크빌의 <미국의 민주주의> 역시 비슷한 기조다. 가장 중요한 연구로는 프랑스인 의사이자 사회심리학자 귀스타브 르 봉의 <프랑스 혁명과 혁명의 심리학>(1912)을 꼽을 수 있다. 그는 프랑스 대혁명의 실상과 본질이 ‘자유·평등·박애’라는 가면을 쓴 대학살과 대혼돈, 이성적 근대의 입구는커녕 종교적 광기와 야만임을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통찰한다. 이런 아수라에 휘말려 100년 남짓 반동과 퇴보를 거듭하는 동안 프랑스는 유럽의 낙후국(落後國)이 돼버렸다고 진단한다. 정작 자유공화민주주의를 성취하고 발전시킨 것은 ‘혁명이라는 거짓’이 아니라 ‘개혁이라는 진실’을 택한 영국과 미국이었고 독일의 경제성장은 이 두 나라 못지않았다. 르 봉은 프랑스 대혁명이 사회주의, 공산주의와 동일한 유전자를 지녔음을 간파했고 향후 사회주의의 대실패를 ‘인간과 세상의 이치’를 동원해 차분히 설명한다.
르 봉의 ‘사회심리학적 진실’은 미제스와 하이에크의 ‘경제학적 진리’와 합치된다. 러시아 볼셰비키혁명 5년 전에 출간된 <프랑스 혁명과 혁명의 심리학>은 소련의 멸망을 대략 80년 전에 예언한 셈이다. 1931년에 생을 마감한 르 봉은 유럽은 물론 전 세계, 특히 프랑스의 지식인들이 소련을 사상의 조국으로 동경하는 꼴을 목격했다. 그러나 그가 정말로 우려한 것은 그런 눈에 보이는 소련이 아니라 ‘인간존재 내부에 원래 있는 소련’과 그 개개인들이 ‘좀비군중’이 되어 언제든 재개할 수 있는 ‘프랑스 대혁명적 지옥도(地獄圖)’였다. 이후 20세기 역사는 그 우려를 실현했고 21세기에는 더 다양한 방식으로 증명 중이다. 스탈린과 마오쩌둥과 폴 포트와 PC처럼. 프랑스 대혁명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자뻑’과 변태적 페티시즘은 중화전체주의가 염색체에 각인된 중국의 상하관계 설정강박과 유치찬란 일대일로(一帶一路) 폭력성에 비견된다.
어쨌거나 프랑스인들의 저런 고질병이 자기들끼리의 병으로만 그치면 다행이련만, 프랑스인도 아닌 주제에 미망에 빠진 자들은 소련이었다가 쿠바였다가 베네수엘라였다가 병든 스웨덴이었다가 심지어는 북한이었다가 하는 것 ‘등등’으로 신줏단지를 전전하는데 이런 ‘꺾이지 않는 마음 같은 어리석음’의 디폴트값이 바로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거대한 착각’인 것이다. 특히 한국인들에게는 이 악영향이 샤머니즘적 성향과 시너지를 내며 지독하다. 우리는 언제든 정의를 내세워 단두대를 광장에 설치하려는 세력에게 선동당할 준비와 각오가 잘 갖추어진 ‘깨어 있는 민주시민들’이다.
이 지긋지긋한 현실을 깨닫고 거듭나 새 시대를 세팅하는 일이 우리 공동체의 미래를 결정한다. 그나마 기회가 남아 있다면 다행인 것은, 사회와 국가는 민족처럼 하늘에서 뚝 떨어진 환상이 아니라 사람들이 필요에 의해 애써서 만든 인공물이기에 훼손과 오염이 일정 시대를 초과해 지속되면 화석보다 더 돌이킬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지금의 프랑스는 그 지경으로 보인다. 자기들만 그 사실을 모른 채 춤추고 노래하고 발광할 뿐이다. 그러나 93년 전 생을 마감한 한 프랑스인의 충고를 가슴 깊이 새겨 들어야 할 사람들은 프랑스인들이 아니다. 중국이 중국인들의 길을 가듯 프랑스는 프랑스인들의 길을 가면 그뿐이다. 다만, “너희가 홀린 이 거대한 착각이 너희를 나처럼 만들 거야.” 파리 올림픽 개막식에서 영원히 부관참시 당하고 있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목 잘린 얼굴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