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간의 공격성이 미덕이 된 세상

요즘 수요일 밤, 야식을 함께 먹으며 실시간으로 시청하는 프로그램이 있다. 나의 길티 플레저는 <나는 솔로>다. 싱글인 일반인들이 출연해서 짝을 찾는 이 프로그램은 단순한 연애 예능 다큐를 넘어서 밀레니얼 세대의 복잡한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심리 실험실 같다.

MZ세대라 묶어 부르지만, 20대 말에서 40대 초반의 밀레니얼 세대는 아직 학생이나 신입사원인 Z세대와 달리 경력직과 베테랑 연차로 구성된다. 대리부터 과장급이다. <나는 솔로>에서는 현대 비즈니스 처세술에서 어떻게 자신의 자아를 연출하고, 사회적 스트레스에 대처하는지 관찰할 수 있다.
출처. 셔터스톡
출처. 셔터스톡
“육각형 인간이어야 해”, 의사란 직업만으로도 안 된다
- “착하지만 기 센 사람”에 열광하는 사람들


최근 <나는 솔로>의 한 장면이 많이 회자되었다. 한 여성 출연자가 주목을 받는 상황에서 다른 여성 출연자가 혼잣말로 "신났네!"라고 내뱉었는데, 이를 들은 한 남자 출연자가 재빠르게 "누가 그렇게 시니컬하게 '신났네'라고 했어?" 하며 웃음기 있는 힐난을 했다. 이 장면을 본 시청자들은 통쾌하다며 유튜브 댓글을 달았다.

<나는 솔로>는 일상 속에서 돌발하는 작은 전투와도 같은 순간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과거에는 “수더분하다”고 칭송받던 스타일인 말수가 적고 우직한 성격보다는, 재빠르게 상대의 위선을 간파하고 일침을 가하는 사람들이 인기가 좋은 편이다. ‘외유내강’도 나쁘지 않지만, 상대의 속내를 빠르게 읽어서 강강약약의 처세를 가진 남자와 여자들이 평가가 좋다.

SNS에 일상을 올리며 자기 과시의 나르시시즘이 만연한 세상이라 그런 걸까? 그만큼 실체에 대한 검증도 일반화되었다. 점잖은 말과 도덕성을 내세우는 “연기”를 하는 사람일수록, 학창 시절의 언사나 인스타그램 게시물로 꼬투리를 잡으려는 사람들이 따라붙으므로 불리한 게임이다.

즉흥 연극의 관객이 되는 시간

<나는 솔로>의 출연자들은 연출된 무대 위에서 실시간으로 자신의 역할을 연기한다. 이 과정에서 관객은 출연자들의 말과 행동을 일종의 ‘여론 재판’ 형태로 평가한다. 이는 <자아 연출의 사회학>에서 애덤 고프먼이 말한 인생은 즉흥 연극이라는 프레임에 대입된다.

출연자들은 자신이 지닌 자아 이미지를 최대한 긍정적으로 유지하려 하지만, 때로는 상황에 따라 실수를 하거나 예상치 못한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최초의 건실한 자기소개 이미지와 달리,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누구는 학벌만 따지는 ‘학벌무새’로, 누구는 홍보를 위해 출연한 ‘팔이피플’로 찍힌다.

시청자들은 고프먼이 말하는 "전면 무대"와 "후면 무대" 사이의 균열이 드러나는 순간을 날카롭게 포착한다. 이런 여론 재판은 종종 잔인할 수 있지만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늘 해왔던 관습이다. 초기에는 직업, 학교, 재력으로 빛나던 출연자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화술이나 성격이 변변찮게 보이면 ‘고독 정식’ 행이다.

이런 반전은 시청자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 본인이 성공하지 못해도 타인의 실패를 관찰한 사람들은, 자신의 위치를 재확인하고 안정감을 얻는 경향이 있다. 우리들 대다수도 여러 스펙을 다 갖춘 ‘육각형 인간’이 아니지만, “솔로 나라”에선 현실의 위너들도 한두 가지 결핍만으로 나락행이다.
<나는 솔로(SOLO)>의 한 장면 / 출처. SBS PLUS, ENA
<나는 솔로(SOLO)>의 한 장면 / 출처. SBS PLUS, ENA
평범한 일상에서 벌어지는 지위 전쟁

1980년대 말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볼 수 있듯이, 그때는 지금보다 단순한 인간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집안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자신의 자리가 정해져 있었고, 얼추 정해진 “연기”를 하면 일생이 어지간히 굴곡이 크지 않게 흘러갔다. 초기에 어떤 직장이라는 신분을 따낸 행운아들에게 삶은 중세 시대처럼 경직된 상태였다.

그러나 지금은 특히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직업인이 된 밀레니얼의 입장에서는, 마흔에도 실업자가 될 수도 있고, 눈 떠 보니 ‘벼락 거지’가 될 수도 있으며, 후임자가 팀장으로 올 수도 있는 불행운의 세계다. 사람들은 단지 자기 위치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자신을 방어하고 생존해야 한다. 그중에 ‘과감한’ 사람들은 상대가 만만해 보이면 ‘자기 배역’을 초월해 공격에 나선다. 명분이 있으면 혁명이고 그렇지 않다면 무정부 상태다.

“혼란스러운 사건이 생기면 상호작용은 혼선을 빚고 어색한 상태로 중단된다. 개인은 자기가 예상했던 참여자들의 반응을 믿지 못하고, 참여자들도 상황 정의가 잘못된 상호작용에 끼어들었음을 깨닫는다. 참여자들 모두가 불편하고 난처하고 당황스러운 상태에 빠져, 대면 상호작용이라는 작은 사회체계가 무너질 때의 아노미를 경험하게 된다.”
- <자아 연출의 사회학> 서문 중에서

현대 사회는 더 이상 단순한 예의와 배려만으로는 살아남기 어려워 보인다. 약간의 공격성과 방어적 태도는 이제 필수적인 생존 기술로 자리 잡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솔로>는 로맨스 프로그램을 표방하지만 그런 각박한 일상의 전투를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정소연 세종서적 편집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