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형 앞에 있는 서도호 작가. /아트선재센터
모형 앞에 있는 서도호 작가. /아트선재센터
지금 세계 미술계에서 가장 이름 높은 한국 작가는 설치미술 작가 서도호(62)다. 리움미술관이 10여 년 전 서도호의 대규모 전시를 열며 소개했던 말도 “백남준과 이우환을 잇는 한국 대표 작가”였다. 경력이 증명한다.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전시(2001)로 국제무대에 이름을 알린 그는 영국 테이트모던과 미국 뉴욕 휘트니미술관 등 최고의 미술관에서 밥 먹듯이 전시를 열며 미술계에서 최고 작가 대접을 받고 있다. 대중의 사랑도 뜨겁다. 그가 2018년 미국 스미스소니언박물관에서 연 개인전은 112만 명 넘는 관람객을 끌어모으며 그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이 본 전시’로 기록됐다.

하지만 지난 10여 년간 이런 소식은 먼 나라 얘기일 뿐이었다. 설치 작품은 직접 봐야 그 진가를 알 수 있는데, 서도호의 대규모 국내 전시가 없었기 때문이다. 1997년 신인 작가이던 서도호를 발굴한 아트선재센터가 서도호의 개인전을 연다고 발표했을 때 미술계 안팎이 기대로 술렁였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집의 작가, 서도호

지난 17일 서울 소격동 아트선재센터에서 개막한 ‘서도호: 스페큘레이션스(speculations)’는 오랜만에 국내에서 열린 서도호의 본격적인 전시다. 그의 작품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집’. 자신이 살던 한옥 모양의 구조물을 영국 리버풀의 빌딩 사이에 구겨넣듯 설치하거나(다리를 놓는 집), 미국 캘리포니아대 샌디에이고의 건물 옥상 끝에 위태롭게 올려놓은 게(별똥별)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서도호 작가의 '다리를 놓는 집' 실제 설치 사진. ⓒJulian Stallabrass
서도호 작가의 '다리를 놓는 집' 실제 설치 사진. ⓒJulian Stallabrass
그는 한국화 대가인 산정 서세옥(1929~2020)의 아들로 태어나 서울대 동양화과에서 공부한 ‘서울 토박이’다. 그런 그가 미국 유학을 떠나 ‘이방인’으로 살며 가장 선명하게 떠올리고 그리워했던 건 자신이 자라난 성북동 전통 한옥의 공간이었다. 그에게 집은 거주하는 사람들의 기억과 취향, 사회와 시대가 그대로 녹아 있는 공간이었고, 인간의 삶과 이동을 그리는 초상화였다.

전시 2층 공간에서는 작가의 이런 생각을 고스란히 접할 수 있다. 거대한 설치작품을 그대로 들여올 수 없어 대신 모형들이 나왔다. ‘다리를 놓는 집’과 ‘별똥별’ 등 실제 설치한 대표작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신작 모형인 ‘나의 집/들’ 연작은 자신이 살았던 모든 집과 스튜디오를 축소해 하나로 뭉쳐 놓은 구조물이다. ‘향수병’은 움직이는 모형으로, 작품 속 쓰레기 섞인 파도가 치는 해변에는 망가진 집이 마치 난파선의 잔해처럼 널브러져 있다. 이민과 망명 등 낯선 곳으로 주거를 옮기는 고통, 환경 파괴의 현실 등을 표현했다.
향수병. /아트선재센터
향수병. /아트선재센터
'나의 집/들'.  /아트선재센터
'나의 집/들'. /아트선재센터
3층 공간에서는 철거를 앞둔 영국 런던의 주거 단지 ‘로빈 후드 가든’과 대구의 ‘동인시영아파트’ 공간을 마치 박제하듯 꼼꼼히 영상으로 기록한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그 어떤 설명도 없지만 관객은 거주민의 흔적을 보며 세월의 무상함과 과거에 대한 향수 등을 느낀다. 서도호는 “한옥을 태어나서 처음 보는 영국인 관객들이 한옥 모티브의 작품 앞에서 우는 걸 봤다”며 “집이란 건 누구에게나 본질적이고 원초적인 기억을 소환하는 공간이기에, 내 작품이 인간의 기본적인 정서를 건드렸던 것 같다”고 했다.

서도호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국내 미술 애호가들이 서도호의 대표작으로 생각하는 건 2012년 리움미술관 전시에서 보여준 ‘천으로 만든 집’이다. 당시 리움미술관 역사상 최다 관람객(10만 명)을 기록할 만큼 평가가 좋았고 파장도 컸다. 하지만 서도호는 “그건 내 아이디어의 극히 일부일 뿐”이라고 했다.

그 말을 증명하듯 전시장에서는 다양한 아이디어에서 나온 작품을 만날 수 있다. ‘공인들’은 지난 5월 미국 워싱턴DC 국립아시아미술관 앞에 전시돼 화제를 모은 조각상의 축소 버전이다. 일반적인 동상과 달리 작은 인간 수백 명이 빈 좌대를 떠받치는 모양을 통해 평범한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췄다. 이번 전시작이 특별한 건 움직인다는 것. 작가는 “처음 작품을 구상한 1990년대부터 작품을 떠받치는 사람들을 움직이게 만들고 싶었다”며 “당시에는 기술적 한계 때문에 불가능했지만, 이번 전시에서 움직이는 버전을 선보일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공인들'.  /아트선재센터
'공인들'. /아트선재센터
이번 전시에 나온 작품 ‘공인들’. 사진은 ‘공인들’의 아랫부분을 확대한 모습으로 수백명의 사람들이 좌대를 떠받치는 모양이다.  아트선재센터 제공
이번 전시에 나온 작품 ‘공인들’. 사진은 ‘공인들’의 아랫부분을 확대한 모습으로 수백명의 사람들이 좌대를 떠받치는 모양이다. 아트선재센터 제공
1층에는 그가 요즘 집중하는 ‘다리 프로젝트’와 관련된 스케치와 애니메이션 등이 전시돼 있다. 서도호가 ‘집’이라고 느끼는 세 도시는 서울, 뉴욕, 런던. 이 세 도시를 등거리로 잇는 북극해 위에 자신만의 ‘완벽한 집’을 만든다는 게 그의 목표다. 서도호는 진지하다. 그는 “세계적인 생물학자, 물리학자, 건축가 등과 협업하며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고 했다. 코오롱스포츠와 협업해 만든 구명복 시제품도 전시장에 나와 있다. 1주일간 북극해의 극한 상황 속에서 생존할 수 있는 ‘대피소 같은 구명복’이 콘셉트다.

전시를 둘러보고 나면 비로소 사변, 추론, 사색을 뜻하는 전시 제목 ‘스페큘레이션스’가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있다. 전시회에서는 서도호를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 영상 세 편도 만날 수 있다. 상영 일정은 미술관 홈페이지에서 확인하면 된다. 전시는 11월 3일까지. 입장료는 1만원.
서도호의 '다리 프로젝트'와 관련된 드로잉들. /아트선재센터
서도호의 '다리 프로젝트'와 관련된 드로잉들. /아트선재센터
성수영/김보라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