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의 피아노소나타 30번, 31번과 골드베르크 변주곡

2011년 2월23일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인 안드라스 쉬프는 베토벤 피아노소나타 마지막 3곡인 30, 31, 32번으로 콘서트홀을 찾아 피아노 리사이틀을 열었다.

쉬프는 영국의 유명한 가디언지의 인터넷 페이지를 통해 32개의 베토벤 피아노소나타 전곡에 관한 해설 역시 진행했는데, 30번 3악장에 관한 이야기를 진행하는 도중 ‘다양한 변주’ 형태에 관해 언급한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작품 <골드베르크 변주곡>의 존재를 분명히 알고 있었을 베토벤은 이 악장에서 그 방식을 빌려오고 있고, 하나의 주제를 사라방드 형식의 아리아로 던져놓고, 그것을 오페라 아리아처럼, 그림을 그리는 방식의 하나인 점묘주의처럼, 자신의 또 다른 작품인 <장엄미사>에 사용한 Credo의 선율로, 마지막 여섯 번째 변주에서는 20여 마디에 걸쳐 트릴을 보여주는 구성까지 표현하고 있음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총 6개의 변주를 연주한 후 다시 사라방드의 선율로 돌아와 악장을 맺는 형태. 피아니스트 안드라스 쉬프는 정확한 문서나 근거는 없지만, 베토벤은 이 형식을 분명히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에서 가져왔을 것이라고 확신에 찬 듯 얘기를 이어간다.
안드라스 쉬프 / 사진. ⓒNadia F Romanini
안드라스 쉬프 / 사진. ⓒNadia F Romanini
음악 저널리스트인 마르틴 마이어와 나눈 대화들과 에세이를 함께 묶어놓은 도서 <음악은 고요로부터>에는 피아니스트 안드라스 쉬프가 '골드베르크 변주곡' 전곡에 대해 언급한 부분들이 비교적 자세하고 긴 내용으로 실려있다. 그 언급의 시작 부분을 잠시 인용해 본다.

"뭐든 좋은 건 삼세번. 따라서 30개의 변주곡은 각각 세 곡씩 열 묶음으로 나뉘어 있다. 각 묶음은 찬란한 솜씨의 토카타 풍 곡 하나, 부드럽고 우아한 곡 하나, 엄격히 다성부적인 카논 하나를 포함한다. 카논들은 점차로 음정을 높여가며 제시된다. 유니즌 카논으로 시작해 9도 카논에 이르기까지. 10도 카논 대신 쿼들리벳(‘좋을 대로’)이 나와서 민요 두 곡의 일부를 바소 오스티나토와 결합한다. 조성은 거의 G장조이지만 3개의 변주곡에서는 g단조 조성으로 음영이 드리워진다." (15, 21, 25번 변주곡)

아리아 사이에 쏙 들어가 있는 30개의 변주곡을 세 곡 단위 이야기 열 개로 생각해 보는 일도 흥미로운 선택일 거란 생각이 든다. 하나의 멜로디를 한 성부가 시작하고 다른 성부가 곧 1도, 2도, 3도…. 9도의 간격을 두고 똑같은 멜로디를 되풀이하는 구조의 곡이 세 곡에 한 번씩.

피아니스트 안드라스 쉬프는 베토벤이 피아노소나타 31번 2악장에 고양이에 관한 저잣거리의 노래를 사용하고 있다는 언급도 했는데, 10도 카논을 대신하는 <골드베르크 변주곡>의 마지막 변주에도 민요 두 곡이 사용되고 있음을 짚어준다. 네 곡의 제목이 재밌어서 소개해 본다.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 마지막 변주

① 네 곁을 떠난 지 정말 오래되었네.
② 양배추와 비트가 나를 쫓아버렸네.

베토벤 피아노소나타 31번 2악장

① 우리 반려묘는 새끼 고양이가 있다네.
② 나도 쑥스럽고, 너 역시 쑥스럽고.

피아니스트 안드라스 쉬프의 추측처럼 베토벤은 정말 <골드베르크 변주곡>에 관한 깊은 탐구에 더해 그 형식의 일부를 자신의 작품에 반영했을 수도.


2023년 12월 15일 2개의 아리아 사이에 껴있는 완벽한 30개의 행성

[손열음 피아니스트가 한음 한음을 공연장 하늘의 별로 올린 것 같았던 반 클라이번 콩쿠르 모습]


바흐의 작품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지(G)조성이니 색깔로 표현하면 빨간색이나 오렌지색이라고 느껴진다는 피아니스트 비킹쿠르 올라프손. 소리를 색깔로 감각할 수 있다는 이 피아니스트가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을 찾아 연주회를 열었다.

클래식 음악을 사랑하며 라때에 이른 이들에게 소위 ‘노란 딱지’라고 불리며 음반으로 접하는 클래식 음악의 가이드 역할을 해주었던 고마운 레이블인 ‘도이치 그라모폰’. 이날의 공연은 그들이 지닌 영상 플랫폼인 Stage+를 통해 한국을 제외한 전 세계에 생중계되었고, 예술의전당 자체 영상 플랫폼인 Digital Stage를 통해서는 이틀 후 송출되었다.

공연 당일 비킹구르 올라프손의 드레스 리허설을 충분히 활용하고, 2023년 일 년간 제작되었던 클래식 영상 콘텐츠 촬영물들을 참고하여 영상미를 극대화했던 카메라 위치를 다시 구현하여 독창적이며 아름다운 영상미를 확보하고자 한 이 공연의 영상은, 클래식 공연을 영상화시키는 작업이 나아가야 할 길을 가장 먼저 뚜렷이 보여주었던 결과물이 아닐까 싶다.

훤칠한 키와 아름다운 손 그리고 잘 차려입은 의상이 영상을 빛내주고 있는 것 같았고, 합창석에서 객석을 향해 앵글을 잡은 카메라에 담긴 화면은 흡사 저녁 하늘에 아름다운 음악을 배경으로 반짝이는 별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제공하기도 한 것 같다. 공연의 영상화 작업을 진행했던 박지연 PD는 이 공연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 중 하나로 피아니스트가 직접 설명해 준 ‘앙코르 불가’ 이유를 꼽았다. 영문을 고스란히 옮겨 담아 보내준 그 내용을 한글로 소개해 본다.
비킹구르 올라프손 / 사진출처. 올라프손 홈페이지
비킹구르 올라프손 / 사진출처. 올라프손 홈페이지
"감사합니다. 이곳 한국의 이 놀라운 이 홀의 청중들 그리고 도이치 그라모폰 125주년을 기념해 전 세계에서 실시간으로 이 영상을 보고 있는 관객들을 위해 연주를 하는 이 작업은 역시 놀라운 일입니다.

이 공연은 전 세계에 실시간으로 스트리밍되고 있습니다. 여기 한국에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지난 방문 이후 5년 만에 마침내 이루어진 일입니다.

저는 이 밤을 기대해 왔습니다. 골드베르크 변주곡에 대해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이 작품에는 단 하나의 문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문제는 골드베르크 변주곡 연주에 붙여 앙코르를 연주하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육체적인 문제가 아니고 음악적인 측면에서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바흐는 아리아와 30개의 행성으로 하나의 태양계를 창조해 냈기 때문이고 제 생각으로는 역사적으로 가장 위대한 건반 음악 작품입니다. 제가 거기에 31번째 행성을 붙일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하지만 감사드립니다. 참으로 큰 기쁨입니다."
베토벤 피아노소나타 30번 3악장 두 번째 변주의 시작 부분
베토벤 피아노소나타 30번 3악장 두 번째 변주의 시작 부분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피아노 작품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혹시 무한에 가까운 점을 새겨 하나의 작품을 탄생시키는 점묘주의를 닮은 것은 아닐까? 피아니스트 안드라스 쉬프가 언급했던 베토벤 피아노소나타 30번 3악장 두 번째 변주의 특징은, 3/4 박자의 한 박을 16분음표 4개로 구성하고 첫 음과 마지막 음은 주로 저음부에서 연주토록 하고 중간 두 음은 고음부에서 연주하도록 하는 것이다.

위아래 겹치지 않은 채로 한음 한음 분절되어 걸어가는 이 모습에서 혹시 각각의 계이름들이 고유한 색깔로 표현될 수 있다면 그건 악보라는 캔버스에 색이 다른 음들을 촘촘히 새기는 일이며, 결과적으로 청자의 머리와 마음속에 어떤 총체적인 하나의 형상을 떠올리게 하는 일에 음악이 성공한다면, 그건 미술사에 터 잡은 점묘주의의 정의를 고스란히 옮겨온 것이 아닐까?

예술의전당에서 진행되고 있는 <크루즈 디에즈 – RGB, 세기의 컬러들> 전시의 장윤진 큐레이터는 점묘주의의 핵심은 물감을 섞어 새로운 색을 만들어내는 색의 혼합이 없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며, 만약 오렌지색 하늘을 표현하고 싶다면 원하는 오렌지색을 얻을 때까지 빨강의 점과 노랑의 점을 화가 자신이 원하는 비율로 근접하게 붙이는 것이라고 친절히 설명해 준다.

끝으로는 두 개의 작품 역시 소개해 주었는데, 폴 시냐크의 작품 <초록색 돛>과 조르주 쇠라의 유명한 작품인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였다. 차분히 설명해 주는 큐레이터의 이야기를 들으며 속으로는 깜짝 놀랐다.

점이라는 이름의 음표를 소재 삼아 박자와 리듬을 무한에 가까운 조합으로 실어 청자에게 음악 작품에 대한 하나의 이미지를, 생각을, 주제를 전달해 주는 것이라 상상해 보는 일. 비킹구르 올라프손에게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우선은 빨강과 노랑의 색들이 점들을 찍어 오렌지색의 색채를 띠는 것이며, 나아가서는 그 무수한 점들의 조합이 만들어내는 그 무엇은 그의 머리와 마음속에 2개의 아리아와 30개의 행성을 지닌 태양계를 떠오르게 해주었던 것이 아닐까 조심스레 생각해 보았다.
조르주 쇠라의 작품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
조르주 쇠라의 작품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
30개의 행성을 둘러싼 두 기운 Air 같은 말로는 Aria

악보 위에 기보한 음표만을 바라보던 서양의 누군가는, 그 모든 음표 사이사이에 물리적인 공간이 존재하므로 음악은 당연히 끊임없이 자잘한 단절이 이루어지는 시간예술일 거라는 궁금증을 가졌다고 한다. 악기를 통해 혹은 사람의 목소리를 통해 오선지를 떠난 그 음표들을 청중들이 단절 없이 연속적으로 들을 수 있도록 매개해 주는 것이 ‘공기’가 지닌 역할의 하나이며, 아마도 그 지점이 수많은 단어의 의미 중 하나를 음악에 가깝도록 파생시키는 출발점일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바흐의 건반 작품인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30개의 변주 앞뒤로 영어와 이탈리아어 모두 ‘공기’의 의미 또한 지닌 그 단어로 시작하고 마치고 있다. 악보에 누워 있는 음표를 깨워 생명력을 불어넣는 그 역할처럼, 작품의 연주가 시작되자마자 마치 우주의 항해를 시작하는 느낌처럼 다가오는 그 ‘공기’는, 행성과 반짝이는 별들 사이를 촘촘히 채워 그들이 돋보일 수 있도록 돕는 아리아이며, 격정적인 서른 개의 변주가 지난 뒤 다시 찾아온 그 ‘공기’는 완벽한 항해를 마쳐 ‘앙코르’란 단어는 저 멀리 우주 너머에 두고 온 것을 조용히 전해주는 마침이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