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영웅' 아니었어?…'매국노 사기꾼' 반전 실체에 '화들짝'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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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메르를 베낀 남자
한 판 메이헤런(1889~1947)
나치 속이고 부자 골탕먹인
'국민 영웅' 대접 받았지만
사실은 그냥 사기꾼이었다
한 판 메이헤런(1889~1947)
나치 속이고 부자 골탕먹인
'국민 영웅' 대접 받았지만
사실은 그냥 사기꾼이었다
“제가 잘못한 건 인정합니다. 하지만 미술을 안다고 까부는 평론가들, 돈만 아는 부자들, 그리고 더러운 나치 놈들의 콧대를 눌러 주고 싶었어요.”
1947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지방법원 재판정에 선 남자가 말하자 방청석에서는 웃음이 터졌습니다. 그 남자의 죄목은 위작(僞作) 제조. 요하네스 페르메이르(베르메르), 프란츠 할스 등 미술 역사에 남은 네덜란드 출신 거장들의 작품을 위조해낸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그는 평론가들과 감정가들을 속였고, 부자나 권력자들에게 작품을 비싼 값에 팔아넘겼습니다.
그렇게 속은 이들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이 바로 헤르만 괴링. 인류 역사상 최악의 학살자 중 한 명인 히틀러, 그의 오른팔 역할을 한 남자였습니다. 소문에 따르면 당시 감옥에 갇혀 있던 괴링은 자신이 구입했던 베르메르의 그림이 가짜라는 사실을 알고 분노로 울부짖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남자에게 환호했습니다. 괴링은 네덜란드를 침략한 독일군의 최고 사령관이자, 학살 등 수많은 전쟁 범죄에 연루된 끔찍한 범죄자. 그런 사람을 감쪽같이 속여넘겼다니 속이 다 시원했습니다. 다른 피해자들도 있었지만 그건 대부분의 사람에게 중요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위작의 피해자라고 해봐야 평소에 거들먹거리던 부자들과 미술계 사람들입니다. 그런 유식하고 고상한 척하던 사람들이 가짜를 알아보지도 못하고 덥석 사버렸다니, 내심 고소한 기분이 들었지요. 남자는 1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일반적인 위작 범죄보다 훨씬 낮은 형량으로, 남자의 높은 인기가 반영된 결과였습니다. 그 해 네덜란드 신문의 ‘가장 좋아하는 인물’ 설문조사에서 남자가 당시 지도자(수상)를 이은 2위를 기록했거든요. 그야말로 그는 네덜란드의 ‘국민 영웅’이었습니다. 영국·미국 등 해외의 여러 신문도 남자의 극적인 이야기를 보도했습니다. ‘나치를 속인 천재 예술가’, ‘가장 위대한 사기꾼’…. 세상은 그에게 박수를 보냈습니다. 이후 수십 년 동안 그의 전설적인 이야기는 책과 영화 등 여러 매체로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 남자, 정말 ‘착한 사기꾼’이었을까요? 오늘은 네덜란드의 사기꾼이자 화가인 한 판 메이헤런(1889~1947)에 대해 우리가 잘 몰랐던 이야기들을 풀어봅니다.
통쾌한 천재 사기꾼?
잘 알려진 버전의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1889년 네덜란드에서 태어난 메이헤런은 어릴 때부터 열심히 미술을 공부했습니다. 그는 베르메르를 비롯한 고전 거장들의 작품을 사랑했습니다. ‘나도 이런 그림을 그리는 위대한 화가가 되겠다’는 꿈을 품고 열심히 노력한 덕분에, 메이헤런의 작품은 일찌감치 미술 평론가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미술계의 유행이 피카소와 마티스 같은 작가들의 ‘현대미술’로 넘어가면서 분위기가 바뀌었습니다. 고풍스럽고 전통적이라고 평가받던 메이헤런의 그림은, 점차 ‘유행에 뒤처진 낡은 그림’이라는 비판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수백 년 전 거장들의 작품은 물론 위대한 고전 명작이다. 하지만 메이헤런의 그림은 화풍만 비슷하게 따라 했을 뿐 수준은 훨씬 떨어지는, 구닥다리 졸작일 뿐이다.” 메이헤런은 분노했습니다. “그림 그릴 줄도 모르는 평론가 놈들이 입만 살았구나. 그래, 어디 한 번 네 녀석들 눈이 얼마나 정확한지 보자.” 그는 고전 거장들의 그림을 위조해 평론가들을 골탕 먹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자신이 그린 그림에 평론가들이 감쪽같이 속아 넘어간다면, 메이헤런의 실력은 그들이 칭찬하는 거장 못지않다는 얘기가 되겠지요. 평론가들에게 망신을 줄 수도 있을 거고요.
그의 생각은 적중했습니다. 평론가, 미술품을 수집하는 부자, 권력자들은 감쪽같이 속아 큰돈을 내고 메이헤런이 만든 위작을 사들였습니다. 그러는 사이 제2차 세계대전이 터졌고, 네덜란드는 나치 독일에 점령당했습니다. 뜻밖에 미술품 수집에 열을 올리던 히틀러의 오른팔 괴링도 메이헤런의 덫에 걸려들었습니다. 메이헤런은 자신이 만든 위작을 괴링에게 엄청나게 비싼 값에 팔아넘겼습니다.
몇 년 후, 전쟁이 끝나고 메이헤런은 법정에 섰습니다. ‘네덜란드의 국보인 거장 작품들을 나치에게 팔았다’는 죄로요. 중형을 받을 위기에 처한 메이헤런은 비로소 진실을 밝혔습니다. “난 조국을 배반한 게 아닙니다. 그건 전부 위작이오. 처음엔 평론가들을 골탕 먹이고 싶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나치를 속이는 건 더 즐겁더군요.” 그리고 그는 사람들이 보는 눈앞에서 멋진 위작을 그려내 이를 증명했습니다. 사람들은 나치 고위 간부를 속여넘긴 메이헤런의 이야기에 통쾌함을 느꼈습니다. 한때 나라가 나치에게 점령당했었다는 패배감, 점령기를 겪으며 쌓인 스트레스, 재판을 통해 드러나는 나치 부역자들의 끔찍한 범죄 때문에 답답했던 가슴을 뻥 뚫어주는 얘기였지요. 비록 위조범이긴 했지만 그는 애국적인 위조범, 착한 위조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위조범이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벌어졌던 일은 이것과는 상당히 달랐습니다. 진상은 2008년 미술사학자 조나단 로페즈가 오랜 조사를 거쳐 발표한 책 <The Man Who Made Vermeers>을 통해 밝혀졌습니다.
화가, 범죄자가 되다
메이헤런은 1889년 네덜란드의 한 지방 도시의 중산층 집안에서 태어나 미술을 공부했습니다. 그는 재능 있는 젊은이였습니다. 게다가 잘 생기고 재치가 넘치는 데다 옷도 잘 입는 멋쟁이였다고 합니다. 스물두 살 때 일찌감치 가정을 꾸린 그는 미술 강사로 일하면서 짬짬이 자신의 그림을 그려 판매했습니다. 수입이 꽤 짭짤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매력을 이용해 많은 친구를 사귀었고, 사교계에서 소위 말하는 ‘인싸’(인기인)가 됐습니다. 파티에 참석할 때마다 그는 돈 많고 인기 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목탄으로 스케치해 건네주곤 했습니다. 그 실력에 감탄한 상류층 사람들은 메이헤런에게 초상화를 의뢰했습니다. 금세 메이헤런은 ‘스타 초상화가’가 됐습니다.
그러던 그에게 어느 날 수상한 사람들이 접근했습니다. “위작을 그려주면 큰돈을 벌게 해주겠다”는, 위작 업자들이었습니다. 씀씀이가 크고 사치스러웠던 메이헤런은 그 유혹에 넘어갔습니다. ‘평론가들을 골탕 먹이고 싶어서 위작을 그렸다’는 훗날의 변명은 거짓말. 이때까지만 해도 그의 작품은 평론가들에게 괜찮은 평가를 받고 있었습니다. 실제 그가 위작을 그리게 된 동기는 ‘편하게 돈을 많이 벌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단순한 이유로 그는 어둠의 세계에 발을 들여놨습니다. 메이헤런은 여러 거장의 작품을 위조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작품은 베르메르의 위작이었습니다. 17세기 세상을 떠난 뒤 한동안 잊혔던 베르메르는 19세기 후반에 미술계의 재조명을 받은 이후 렘브란트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네덜란드 역사상 최고의 화가로 대접받았습니다. 곳곳에 숨겨져 있던 베르메르의 작품들도 하나씩 발굴돼 세상의 빛을 봤습니다. 하지만 베르메르는 작품을 많이 그리지 않는 작가. 지금 기준으로도 그의 작품이라고 명확히 밝혀진 그림은 40점이 채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미국과 유럽의 부자들은 더더욱 베르메르의 그림을 갖고 싶어 했습니다. 그런 위대한 작품을 하나 소장한 것만으로도 가문의 품격이 확 올라갔기 때문입니다. “베르메르 작품이면 값을 안 보고 사겠다”는 부자들이 많았던 이유입니다. 당연히 미술상들은 눈에 불을 켜고 베르메르의 작품을 찾아 헤맸습니다. 찾기만 하면 대박이니까요. 위작 업자들은 그런 수요를 노려 위작을 만든 후 “숨겨진 베르메르의 작품을 찾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업자들 중 최고가 메이헤런 일당이었습니다. 일단 메이헤런은 그림을 잘 그렸습니다. 게다가 그림 재료도 좋았습니다. 메이헤런이 쓰는 재료는 방금 그린 그림을 몇백년 전 만들어진 것처럼 보이도록 하는 데 최적화돼 있었고, 당시 자주 쓰였던 위작 감별법(기름으로 닦아내기 등)도 통과할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게 입담. “이 작품이 어디서 나오느냐”는 질문에 메이헤런은 항상 임기응변으로 기가 막힌 대답을 해줬습니다. “혁명으로 유럽에 망명한 러시아 황태자의 마지막 그림입니다.” “유서 깊은 이탈리아 북부 가문의 저택에서 나왔습니다.”
술술 나오는 대답에 사람들은 의심을 거두고 돈다발을 건넸습니다. 덕분에 그는 돈을 갈퀴로 긁어모았습니다. 화가로서 뛰어난 재능, 사기꾼으로서는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20대의 메이헤런에게 세상은 너무나도 쉬운 게임과 같았습니다.
욕망이 잡아먹은 재능
그렇게 메이헤런은 30대에 접어들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메이헤런이 거물 위조범이 됐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습니다. 그는 여전히 귀족들에게 인기 있는 화가로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는 네덜란드 공주의 애완 암사슴 그림을 그려 큰 인기를 끈 적도 있었습니다. 누가 봐도 예쁜 이 암사슴 그림은 판화 등으로 복제돼 네덜란드 전역에 퍼졌다고 합니다. 위조로 떼돈을 벌었지만, 메이헤런은 여전히 위대한 화가가 된다는 꿈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젊은 시절부터 괜찮은 평가를 받았으니 그럴 만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 시기부터 메이헤런의 그림은 혹평을 받기 시작합니다. “독창성이 떨어지고 뭘 표현하려고 하는 건지도 잘 모르겠다”는 게 평론가들의 냉정한 의견이었습니다.
그럴 만도 했습니다. 메이헤런의 그림 그리는 기술이 뛰어난 건 사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훌륭한 작가가 되려면 기술만으로는 안 됩니다. 오랫동안 고민해 만들어낸 자신만의 독창적인 스타일과 작품 세계가 있어야만 합니다. 20대라면 기술만 괜찮으면 ‘유망하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지만, 경력이 10년 넘는 30대 작가라면 어느 정도의 독창성과 예술성을 보여줘야 한다는 게 당시 미술계의 기준이었습니다.
그리고 메이헤런의 그림에는 그런 독창성이 없었습니다. 한창 치열한 예술적 고민을 해야 할 시기에 다른 사람의 작품을 따라 그리고 위조하는 데 집중한 결과, 그는 작가로서 한 단계 뛰어오를 시기를 놓치고 자신의 예술을 잃어버린 겁니다. 자신의 처지를 깨달은 메이헤런은 좌절했습니다. 사실 그에게 위조는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고, 진정한 목표는 어린 시절부터 품어왔던 ‘역사에 남을 위대한 그림을 그리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꿈은 저 멀리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때부터라도 정신을 차리고 그림에 다시 매진하기 시작했다면 그는 꽤 괜찮은 화가로 남을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는 이유를 ‘아름다움을 모르는 썩어빠진 평론가들과 미술계 때문’으로 돌렸습니다. 고전 작품을 좋아했던 그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피카소, 마티스 따위나 좋아하는 놈들이 아름다움을 알아볼 리가 없지.’ 자기 잘못을 남 탓으로 돌리는, 자기 합리화를 한 겁니다.
돈 버는 데 집중하기로 결정한 그는 공장에서 물건을 찍어내듯 위작을 생산하기 시작합니다. 1927년 그가 팔아치운 베르메르 위작 ‘레이스 짜는 사람’은 3만8000파운드(현재 가치로 40억원 이상)에 팔렸습니다. 당시 가장 비싼 피카소 작품값이 그 4분의 1에도 못 미쳤다는 걸 감안하면 엄청난 가격이었습니다. 다만 위대한 화가가 되지 못한 설움은 여전히 메이헤런의 가슴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는 이런 설움을 술과 약물, 사치와 방탕한 생활로 달랬습니다. 히틀러에게 충성을
베르메르를 좋아하고 그의 작품에 익숙한 분이라면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가짜라는 티가 나는데, 대체 왜 속은 거야?’
하지만 그 시절과 지금의 상황은 많이 달랐다는 점을 감안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베르메르의 작품 30여점을 인터넷으로 순식간에 찾아낼 수 있습니다. 베르메르의 작품이 대체로 어떤 분위기이고, 무슨 특징이 있는지도 비교 분석해 볼 수 있습니다. 좋은 책이나 자료도 많이 나와 있고, 어떤 재료를 썼는지도 모두 밝혀져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베르메르의 그림이 어떤 스타일인지’에 대한 정보가 지금보다 훨씬 적었습니다. 스마트폰 화면의 베르메르 작품을 참고할 수 없는 건 물론, 과학적 분석 수단도 훨씬 적었습니다. 최고의 베르메르 전문가라고 하는 사람조차 실제로 본 작품 수는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봤던 작품의 특징마저도 기억과 메모, 잘해야 화질 안 좋은 흑백 사진에 의존해야 했습니다.
게다가 메이헤런에게는 특별한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는 기존 베르메르 작품을 그대로 따라 하기보다는 아예 새로 만들어 내는 걸 선호했습니다. 실제 화가로 활동했고 미술계 사정에 밝았던 그는, 당시 미술계 사람들이 좋아하는 유행과 코드를 조금씩 그림에 집어넣었습니다. 가장 좋은 예가 메이헤런의 대표 위작인 ‘엠마오의 만찬’이었습니다. 당시 미술계에서는 ‘베르메르가 종교적 그림을 많이 그렸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베르메르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으니, 그가 그렸지만 아직 발견되지 않은 작품들이 분명 어딘가에는 있을 거라는 생각이었습니다. 메이헤런은 이런 믿음을 이용해 종교를 주제로 한 위작들을 그려냈습니다.
재미있는 건 메이헤런이 그림 속에 집어넣은 그릇이나 옷 등 소품들에 20세기 초반 유행이 반영돼 있다는 겁니다. 지금 보면 아주 이상한 일이지만 당시 사람들은 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습니다. 무의식적으로 친숙한 물건들이 그림에 나오니 더 좋게 느껴지기도 했고, 혹시 위화감을 느끼더라도 ‘거장들의 천재성이 시대를 뛰어넘은 거겠지’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엠마오의 만찬’이 네덜란드 대표 미술관에 전시되며 찬사를 받을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유럽을 휩쓸고 나치 독일이 네덜란드를 점령한 1940년, 어느덧 메이헤런의 나이는 50대가 돼 있었습니다. 그의 자산은 이미 요즘 돈으로 수백억~수천억 원에 달했습니다. 물론 이게 다 현금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넘쳐나는 현금을 다이아몬드, 금, 가구, 진짜 미술품 등은 물론이고 개인주택, 공동주택, 상업시설, 호텔 등 암스테르담에 있는 대량의 부동산으로 바꿨습니다.
나치가 들어온 건 메이헤런에게 오히려 좋은 일이었습니다. 일단 네덜란드는 독일과 같은 게르만족 국가로 분류돼 비교적 덜 가혹한 통치를 받았습니다. 개인적인 이유도 있었습니다. 히틀러는 고전과 근대 미술을 좋아하고 현대미술은 혐오했습니다. 메이헤런은 여기에 마음 깊이 공감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나치는 히틀러의 뜻을 받들어 메이헤런이 싫어했던 현대미술가들을 내쫓아 버리고, 나치 기준의 ‘건전한 미술’을 대중에게 선보일 사람들을 찾고 있었습니다. 메이헤런은 나치의 공모에 지원해 여러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진행했습니다. 그가 만든 위작 ‘그리스도와 회개하는 여인’을 괴링이 비싼 값에 사들인 것도 이때였습니다. 조국은 강제 점령을 당했지만 메이헤런 입장에서는 행복한 시절이었습니다. 1942년 그는 히틀러에게 이런 글을 써넣은 책 한 권을 선물했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총통께, 반 메이헤런이 감사를 드리며."
역전 홈런,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메이헤런의 얼굴빛이 사색이었던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습니다. 나치의 패색은 이미 짙은 상황. 네덜란드가 해방되고 새 정부가 들어서면, 누가 봐도 적극적인 부역자였던 메이헤런은 무거운 처벌을 받을 게 뻔했습니다. 자살을 고민한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처벌을 각오한 그는 일단 재산이라도 지키기 위해 아내와 위장 이혼을 했습니다. 예상대로 그는 1945년 네덜란드가 해방된 후 감옥에 갇혀 조사받는 신세가 됐습니다.
그런데 상황은 예상과 다르게 흘러갔습니다. 사람들은 희망적인 이야깃거리에 굶주려 있었습니다. 누군가 ‘메이헤런이 괴링을 속여넘겼다’는 이야기를 퍼뜨렸고, 갈수록 이야기는 부풀려졌습니다. 어느새 소문 속에서 메이헤런은 마치 나치를 속이기 위해 목숨을 건 사람처럼 포장돼 있었습니다. 머리 회전이 빠른 메이헤런은 즉시 시나리오를 꾸며냈습니다. 그리고 특유의 멋진 언변으로 1947년 열린 재판에서 자신을 이렇게 변호했습니다. “나는 비평가들의 주장에 반박하기 위해 옛 거장들의 작품을 위조하기 시작했습니다. 작품을 위조할 때만큼은 과거 위대한 예술가들과 비슷한 수준이 된 것 같아 잠시나마 행복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휴…. 차라리 돈 때문에 위조했다면 좋았을 텐데. 결국에는 자괴감 때문에 불행할 뿐이었습니다. 정말 멍청한 짓이지요.”
메이헤런의 인기를 알고 있었던 검찰은 그를 강하게 추궁하지 않았습니다. 검찰 입장에서는 아직 처벌해야 할 나쁜 부역자들이 많았습니다. 메이헤런이 누굴 죽인 것도 아니고, 사람들의 인기를 끌고 있던 그를 자칫 잘못 처벌했다가는 검찰이 비난받을 수도 있다는 걱정이 있었습니다.
그래도 판사는 물었습니다. “그래도 당신은 그 위작들을 아주 비싼 값에 팔아서 돈을 많이 벌지 않았습니까.” 메이헤런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글쎄요, 제가 위작을 싼값에 팔았다면 나치도 속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묻는 말의 요점을 비껴간 궤변이었지만, 방청석에서는 웃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메이헤런의 완벽한 승리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징역 1년과 재산 몰수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가 적극적 나치 부역자인데다 이미 위장 이혼으로 재산을 빼돌렸다는 점을 감안하면 말도 안 되는 솜방망이 처벌이지요.
그리고 메이헤런은 두 달 뒤 5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문란한 생활로 얻은 병과 술·약물 남용으로 인한 심부전증 때문이었습니다. 감옥에 들어가 형기가 시작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난 것이니, 실질적으로 그는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전설을 더욱 널리 퍼뜨렸습니다. 그렇게 메이헤런은 진상이 제대로 밝혀진 2008년까지 60여년간 영웅과 같은 대접을 받았습니다. 사실은 지금도 여전히 많은 이들이 메이헤런의 실체를 알지 못하거나 의도적으로 무시한 채, 그의 전설을 퍼뜨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뭘 배울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아마도 이야기를 접하는 사람만큼이나 다양할 겁니다. 잘못된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퍼지는 과정에 집중한다면, ‘사람들은 진실보다 흥미로운 이야기를 더 좋아한다’고 표현할 수도 있겠지요.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이 믿고 싶은 걸 믿는다’는 생각을 떠올릴 수도 있겠습니다. 사람들은 메이헤런의 위작을 베르메르의 진품으로, 나치를 골탕 먹이려 했다는 그의 거짓말을 진실로 믿고 싶어 했습니다.
반면 현대미술에 대해 의구심을 갖고 있던 사람 중에서는, 수집가와 평론가들이 위작에 속았다는 사실에 집중해 “역시 현대미술은 사기와 같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분도 있을 겁니다. 좀 더 깊이 있게 들어가 “우리가 명작이라고 믿는 작품들은 그 자체로 명작인가, 평론가와 사회가 만든 것인가” 등의 질문을 던질 수도 있겠습니다.
개인의 삶과 선택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재능 있는 화가였던 메이헤런이 돈을 좇다 화가로서의 삶을 스스로 망쳤다는 내용에 집중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미국 뉴요커지에서 일했던 미술 평론가인 피터 셸달처럼 이렇게 멋지게 말할 수도 있겠지요. “자신의 본모습을 제대로 마주하지 않으면, ‘진정한 나’는 영영 사라지고 만다(The state of being oneself dies when set aside).”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
**이번 기사는 Jonathan Lopez의 'The Man Who Made Vermeers'를 중심으로 2008년 Peter Schjeldahl의 New yorker 기사 'Dutch Master', Edward Dolnick의 'The Forger's Spell', Frederik H. Kreuger의 'Han van Meegeren, Meestervervalser' 등을 참조해 작성했습니다.
***8월 말에서 9월 초, 초대형 아트페어인 ‘KIAF-프리즈’를 중심으로 국내 각종 미술 행사들이 집중 개최됩니다. 국내 주요 미술관에서도 블록버스터급 전시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열립니다. 멋진 전시들을 계속 소개하고, 당분간 <그때 그 사람들>도 지금 국내에서 열리는 전시와 관련한 내용으로 준비하겠습니다. 기자 페이지를 지켜봐 주세요!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1947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지방법원 재판정에 선 남자가 말하자 방청석에서는 웃음이 터졌습니다. 그 남자의 죄목은 위작(僞作) 제조. 요하네스 페르메이르(베르메르), 프란츠 할스 등 미술 역사에 남은 네덜란드 출신 거장들의 작품을 위조해낸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그는 평론가들과 감정가들을 속였고, 부자나 권력자들에게 작품을 비싼 값에 팔아넘겼습니다.
그렇게 속은 이들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이 바로 헤르만 괴링. 인류 역사상 최악의 학살자 중 한 명인 히틀러, 그의 오른팔 역할을 한 남자였습니다. 소문에 따르면 당시 감옥에 갇혀 있던 괴링은 자신이 구입했던 베르메르의 그림이 가짜라는 사실을 알고 분노로 울부짖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남자에게 환호했습니다. 괴링은 네덜란드를 침략한 독일군의 최고 사령관이자, 학살 등 수많은 전쟁 범죄에 연루된 끔찍한 범죄자. 그런 사람을 감쪽같이 속여넘겼다니 속이 다 시원했습니다. 다른 피해자들도 있었지만 그건 대부분의 사람에게 중요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위작의 피해자라고 해봐야 평소에 거들먹거리던 부자들과 미술계 사람들입니다. 그런 유식하고 고상한 척하던 사람들이 가짜를 알아보지도 못하고 덥석 사버렸다니, 내심 고소한 기분이 들었지요. 남자는 1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일반적인 위작 범죄보다 훨씬 낮은 형량으로, 남자의 높은 인기가 반영된 결과였습니다. 그 해 네덜란드 신문의 ‘가장 좋아하는 인물’ 설문조사에서 남자가 당시 지도자(수상)를 이은 2위를 기록했거든요. 그야말로 그는 네덜란드의 ‘국민 영웅’이었습니다. 영국·미국 등 해외의 여러 신문도 남자의 극적인 이야기를 보도했습니다. ‘나치를 속인 천재 예술가’, ‘가장 위대한 사기꾼’…. 세상은 그에게 박수를 보냈습니다. 이후 수십 년 동안 그의 전설적인 이야기는 책과 영화 등 여러 매체로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 남자, 정말 ‘착한 사기꾼’이었을까요? 오늘은 네덜란드의 사기꾼이자 화가인 한 판 메이헤런(1889~1947)에 대해 우리가 잘 몰랐던 이야기들을 풀어봅니다.
통쾌한 천재 사기꾼?
잘 알려진 버전의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1889년 네덜란드에서 태어난 메이헤런은 어릴 때부터 열심히 미술을 공부했습니다. 그는 베르메르를 비롯한 고전 거장들의 작품을 사랑했습니다. ‘나도 이런 그림을 그리는 위대한 화가가 되겠다’는 꿈을 품고 열심히 노력한 덕분에, 메이헤런의 작품은 일찌감치 미술 평론가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미술계의 유행이 피카소와 마티스 같은 작가들의 ‘현대미술’로 넘어가면서 분위기가 바뀌었습니다. 고풍스럽고 전통적이라고 평가받던 메이헤런의 그림은, 점차 ‘유행에 뒤처진 낡은 그림’이라는 비판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수백 년 전 거장들의 작품은 물론 위대한 고전 명작이다. 하지만 메이헤런의 그림은 화풍만 비슷하게 따라 했을 뿐 수준은 훨씬 떨어지는, 구닥다리 졸작일 뿐이다.” 메이헤런은 분노했습니다. “그림 그릴 줄도 모르는 평론가 놈들이 입만 살았구나. 그래, 어디 한 번 네 녀석들 눈이 얼마나 정확한지 보자.” 그는 고전 거장들의 그림을 위조해 평론가들을 골탕 먹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자신이 그린 그림에 평론가들이 감쪽같이 속아 넘어간다면, 메이헤런의 실력은 그들이 칭찬하는 거장 못지않다는 얘기가 되겠지요. 평론가들에게 망신을 줄 수도 있을 거고요.
그의 생각은 적중했습니다. 평론가, 미술품을 수집하는 부자, 권력자들은 감쪽같이 속아 큰돈을 내고 메이헤런이 만든 위작을 사들였습니다. 그러는 사이 제2차 세계대전이 터졌고, 네덜란드는 나치 독일에 점령당했습니다. 뜻밖에 미술품 수집에 열을 올리던 히틀러의 오른팔 괴링도 메이헤런의 덫에 걸려들었습니다. 메이헤런은 자신이 만든 위작을 괴링에게 엄청나게 비싼 값에 팔아넘겼습니다.
몇 년 후, 전쟁이 끝나고 메이헤런은 법정에 섰습니다. ‘네덜란드의 국보인 거장 작품들을 나치에게 팔았다’는 죄로요. 중형을 받을 위기에 처한 메이헤런은 비로소 진실을 밝혔습니다. “난 조국을 배반한 게 아닙니다. 그건 전부 위작이오. 처음엔 평론가들을 골탕 먹이고 싶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나치를 속이는 건 더 즐겁더군요.” 그리고 그는 사람들이 보는 눈앞에서 멋진 위작을 그려내 이를 증명했습니다. 사람들은 나치 고위 간부를 속여넘긴 메이헤런의 이야기에 통쾌함을 느꼈습니다. 한때 나라가 나치에게 점령당했었다는 패배감, 점령기를 겪으며 쌓인 스트레스, 재판을 통해 드러나는 나치 부역자들의 끔찍한 범죄 때문에 답답했던 가슴을 뻥 뚫어주는 얘기였지요. 비록 위조범이긴 했지만 그는 애국적인 위조범, 착한 위조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위조범이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벌어졌던 일은 이것과는 상당히 달랐습니다. 진상은 2008년 미술사학자 조나단 로페즈가 오랜 조사를 거쳐 발표한 책 <The Man Who Made Vermeers>을 통해 밝혀졌습니다.
화가, 범죄자가 되다
메이헤런은 1889년 네덜란드의 한 지방 도시의 중산층 집안에서 태어나 미술을 공부했습니다. 그는 재능 있는 젊은이였습니다. 게다가 잘 생기고 재치가 넘치는 데다 옷도 잘 입는 멋쟁이였다고 합니다. 스물두 살 때 일찌감치 가정을 꾸린 그는 미술 강사로 일하면서 짬짬이 자신의 그림을 그려 판매했습니다. 수입이 꽤 짭짤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매력을 이용해 많은 친구를 사귀었고, 사교계에서 소위 말하는 ‘인싸’(인기인)가 됐습니다. 파티에 참석할 때마다 그는 돈 많고 인기 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목탄으로 스케치해 건네주곤 했습니다. 그 실력에 감탄한 상류층 사람들은 메이헤런에게 초상화를 의뢰했습니다. 금세 메이헤런은 ‘스타 초상화가’가 됐습니다.
그러던 그에게 어느 날 수상한 사람들이 접근했습니다. “위작을 그려주면 큰돈을 벌게 해주겠다”는, 위작 업자들이었습니다. 씀씀이가 크고 사치스러웠던 메이헤런은 그 유혹에 넘어갔습니다. ‘평론가들을 골탕 먹이고 싶어서 위작을 그렸다’는 훗날의 변명은 거짓말. 이때까지만 해도 그의 작품은 평론가들에게 괜찮은 평가를 받고 있었습니다. 실제 그가 위작을 그리게 된 동기는 ‘편하게 돈을 많이 벌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단순한 이유로 그는 어둠의 세계에 발을 들여놨습니다. 메이헤런은 여러 거장의 작품을 위조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작품은 베르메르의 위작이었습니다. 17세기 세상을 떠난 뒤 한동안 잊혔던 베르메르는 19세기 후반에 미술계의 재조명을 받은 이후 렘브란트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네덜란드 역사상 최고의 화가로 대접받았습니다. 곳곳에 숨겨져 있던 베르메르의 작품들도 하나씩 발굴돼 세상의 빛을 봤습니다. 하지만 베르메르는 작품을 많이 그리지 않는 작가. 지금 기준으로도 그의 작품이라고 명확히 밝혀진 그림은 40점이 채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미국과 유럽의 부자들은 더더욱 베르메르의 그림을 갖고 싶어 했습니다. 그런 위대한 작품을 하나 소장한 것만으로도 가문의 품격이 확 올라갔기 때문입니다. “베르메르 작품이면 값을 안 보고 사겠다”는 부자들이 많았던 이유입니다. 당연히 미술상들은 눈에 불을 켜고 베르메르의 작품을 찾아 헤맸습니다. 찾기만 하면 대박이니까요. 위작 업자들은 그런 수요를 노려 위작을 만든 후 “숨겨진 베르메르의 작품을 찾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업자들 중 최고가 메이헤런 일당이었습니다. 일단 메이헤런은 그림을 잘 그렸습니다. 게다가 그림 재료도 좋았습니다. 메이헤런이 쓰는 재료는 방금 그린 그림을 몇백년 전 만들어진 것처럼 보이도록 하는 데 최적화돼 있었고, 당시 자주 쓰였던 위작 감별법(기름으로 닦아내기 등)도 통과할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게 입담. “이 작품이 어디서 나오느냐”는 질문에 메이헤런은 항상 임기응변으로 기가 막힌 대답을 해줬습니다. “혁명으로 유럽에 망명한 러시아 황태자의 마지막 그림입니다.” “유서 깊은 이탈리아 북부 가문의 저택에서 나왔습니다.”
술술 나오는 대답에 사람들은 의심을 거두고 돈다발을 건넸습니다. 덕분에 그는 돈을 갈퀴로 긁어모았습니다. 화가로서 뛰어난 재능, 사기꾼으로서는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20대의 메이헤런에게 세상은 너무나도 쉬운 게임과 같았습니다.
욕망이 잡아먹은 재능
그렇게 메이헤런은 30대에 접어들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메이헤런이 거물 위조범이 됐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습니다. 그는 여전히 귀족들에게 인기 있는 화가로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는 네덜란드 공주의 애완 암사슴 그림을 그려 큰 인기를 끈 적도 있었습니다. 누가 봐도 예쁜 이 암사슴 그림은 판화 등으로 복제돼 네덜란드 전역에 퍼졌다고 합니다. 위조로 떼돈을 벌었지만, 메이헤런은 여전히 위대한 화가가 된다는 꿈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젊은 시절부터 괜찮은 평가를 받았으니 그럴 만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 시기부터 메이헤런의 그림은 혹평을 받기 시작합니다. “독창성이 떨어지고 뭘 표현하려고 하는 건지도 잘 모르겠다”는 게 평론가들의 냉정한 의견이었습니다.
그럴 만도 했습니다. 메이헤런의 그림 그리는 기술이 뛰어난 건 사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훌륭한 작가가 되려면 기술만으로는 안 됩니다. 오랫동안 고민해 만들어낸 자신만의 독창적인 스타일과 작품 세계가 있어야만 합니다. 20대라면 기술만 괜찮으면 ‘유망하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지만, 경력이 10년 넘는 30대 작가라면 어느 정도의 독창성과 예술성을 보여줘야 한다는 게 당시 미술계의 기준이었습니다.
그리고 메이헤런의 그림에는 그런 독창성이 없었습니다. 한창 치열한 예술적 고민을 해야 할 시기에 다른 사람의 작품을 따라 그리고 위조하는 데 집중한 결과, 그는 작가로서 한 단계 뛰어오를 시기를 놓치고 자신의 예술을 잃어버린 겁니다. 자신의 처지를 깨달은 메이헤런은 좌절했습니다. 사실 그에게 위조는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고, 진정한 목표는 어린 시절부터 품어왔던 ‘역사에 남을 위대한 그림을 그리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꿈은 저 멀리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때부터라도 정신을 차리고 그림에 다시 매진하기 시작했다면 그는 꽤 괜찮은 화가로 남을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는 이유를 ‘아름다움을 모르는 썩어빠진 평론가들과 미술계 때문’으로 돌렸습니다. 고전 작품을 좋아했던 그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피카소, 마티스 따위나 좋아하는 놈들이 아름다움을 알아볼 리가 없지.’ 자기 잘못을 남 탓으로 돌리는, 자기 합리화를 한 겁니다.
돈 버는 데 집중하기로 결정한 그는 공장에서 물건을 찍어내듯 위작을 생산하기 시작합니다. 1927년 그가 팔아치운 베르메르 위작 ‘레이스 짜는 사람’은 3만8000파운드(현재 가치로 40억원 이상)에 팔렸습니다. 당시 가장 비싼 피카소 작품값이 그 4분의 1에도 못 미쳤다는 걸 감안하면 엄청난 가격이었습니다. 다만 위대한 화가가 되지 못한 설움은 여전히 메이헤런의 가슴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는 이런 설움을 술과 약물, 사치와 방탕한 생활로 달랬습니다. 히틀러에게 충성을
베르메르를 좋아하고 그의 작품에 익숙한 분이라면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가짜라는 티가 나는데, 대체 왜 속은 거야?’
하지만 그 시절과 지금의 상황은 많이 달랐다는 점을 감안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베르메르의 작품 30여점을 인터넷으로 순식간에 찾아낼 수 있습니다. 베르메르의 작품이 대체로 어떤 분위기이고, 무슨 특징이 있는지도 비교 분석해 볼 수 있습니다. 좋은 책이나 자료도 많이 나와 있고, 어떤 재료를 썼는지도 모두 밝혀져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베르메르의 그림이 어떤 스타일인지’에 대한 정보가 지금보다 훨씬 적었습니다. 스마트폰 화면의 베르메르 작품을 참고할 수 없는 건 물론, 과학적 분석 수단도 훨씬 적었습니다. 최고의 베르메르 전문가라고 하는 사람조차 실제로 본 작품 수는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봤던 작품의 특징마저도 기억과 메모, 잘해야 화질 안 좋은 흑백 사진에 의존해야 했습니다.
게다가 메이헤런에게는 특별한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는 기존 베르메르 작품을 그대로 따라 하기보다는 아예 새로 만들어 내는 걸 선호했습니다. 실제 화가로 활동했고 미술계 사정에 밝았던 그는, 당시 미술계 사람들이 좋아하는 유행과 코드를 조금씩 그림에 집어넣었습니다. 가장 좋은 예가 메이헤런의 대표 위작인 ‘엠마오의 만찬’이었습니다. 당시 미술계에서는 ‘베르메르가 종교적 그림을 많이 그렸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베르메르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으니, 그가 그렸지만 아직 발견되지 않은 작품들이 분명 어딘가에는 있을 거라는 생각이었습니다. 메이헤런은 이런 믿음을 이용해 종교를 주제로 한 위작들을 그려냈습니다.
재미있는 건 메이헤런이 그림 속에 집어넣은 그릇이나 옷 등 소품들에 20세기 초반 유행이 반영돼 있다는 겁니다. 지금 보면 아주 이상한 일이지만 당시 사람들은 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습니다. 무의식적으로 친숙한 물건들이 그림에 나오니 더 좋게 느껴지기도 했고, 혹시 위화감을 느끼더라도 ‘거장들의 천재성이 시대를 뛰어넘은 거겠지’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엠마오의 만찬’이 네덜란드 대표 미술관에 전시되며 찬사를 받을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유럽을 휩쓸고 나치 독일이 네덜란드를 점령한 1940년, 어느덧 메이헤런의 나이는 50대가 돼 있었습니다. 그의 자산은 이미 요즘 돈으로 수백억~수천억 원에 달했습니다. 물론 이게 다 현금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넘쳐나는 현금을 다이아몬드, 금, 가구, 진짜 미술품 등은 물론이고 개인주택, 공동주택, 상업시설, 호텔 등 암스테르담에 있는 대량의 부동산으로 바꿨습니다.
나치가 들어온 건 메이헤런에게 오히려 좋은 일이었습니다. 일단 네덜란드는 독일과 같은 게르만족 국가로 분류돼 비교적 덜 가혹한 통치를 받았습니다. 개인적인 이유도 있었습니다. 히틀러는 고전과 근대 미술을 좋아하고 현대미술은 혐오했습니다. 메이헤런은 여기에 마음 깊이 공감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나치는 히틀러의 뜻을 받들어 메이헤런이 싫어했던 현대미술가들을 내쫓아 버리고, 나치 기준의 ‘건전한 미술’을 대중에게 선보일 사람들을 찾고 있었습니다. 메이헤런은 나치의 공모에 지원해 여러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진행했습니다. 그가 만든 위작 ‘그리스도와 회개하는 여인’을 괴링이 비싼 값에 사들인 것도 이때였습니다. 조국은 강제 점령을 당했지만 메이헤런 입장에서는 행복한 시절이었습니다. 1942년 그는 히틀러에게 이런 글을 써넣은 책 한 권을 선물했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총통께, 반 메이헤런이 감사를 드리며."
역전 홈런,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메이헤런의 얼굴빛이 사색이었던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습니다. 나치의 패색은 이미 짙은 상황. 네덜란드가 해방되고 새 정부가 들어서면, 누가 봐도 적극적인 부역자였던 메이헤런은 무거운 처벌을 받을 게 뻔했습니다. 자살을 고민한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처벌을 각오한 그는 일단 재산이라도 지키기 위해 아내와 위장 이혼을 했습니다. 예상대로 그는 1945년 네덜란드가 해방된 후 감옥에 갇혀 조사받는 신세가 됐습니다.
그런데 상황은 예상과 다르게 흘러갔습니다. 사람들은 희망적인 이야깃거리에 굶주려 있었습니다. 누군가 ‘메이헤런이 괴링을 속여넘겼다’는 이야기를 퍼뜨렸고, 갈수록 이야기는 부풀려졌습니다. 어느새 소문 속에서 메이헤런은 마치 나치를 속이기 위해 목숨을 건 사람처럼 포장돼 있었습니다. 머리 회전이 빠른 메이헤런은 즉시 시나리오를 꾸며냈습니다. 그리고 특유의 멋진 언변으로 1947년 열린 재판에서 자신을 이렇게 변호했습니다. “나는 비평가들의 주장에 반박하기 위해 옛 거장들의 작품을 위조하기 시작했습니다. 작품을 위조할 때만큼은 과거 위대한 예술가들과 비슷한 수준이 된 것 같아 잠시나마 행복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휴…. 차라리 돈 때문에 위조했다면 좋았을 텐데. 결국에는 자괴감 때문에 불행할 뿐이었습니다. 정말 멍청한 짓이지요.”
메이헤런의 인기를 알고 있었던 검찰은 그를 강하게 추궁하지 않았습니다. 검찰 입장에서는 아직 처벌해야 할 나쁜 부역자들이 많았습니다. 메이헤런이 누굴 죽인 것도 아니고, 사람들의 인기를 끌고 있던 그를 자칫 잘못 처벌했다가는 검찰이 비난받을 수도 있다는 걱정이 있었습니다.
그래도 판사는 물었습니다. “그래도 당신은 그 위작들을 아주 비싼 값에 팔아서 돈을 많이 벌지 않았습니까.” 메이헤런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글쎄요, 제가 위작을 싼값에 팔았다면 나치도 속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묻는 말의 요점을 비껴간 궤변이었지만, 방청석에서는 웃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메이헤런의 완벽한 승리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징역 1년과 재산 몰수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가 적극적 나치 부역자인데다 이미 위장 이혼으로 재산을 빼돌렸다는 점을 감안하면 말도 안 되는 솜방망이 처벌이지요.
그리고 메이헤런은 두 달 뒤 5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문란한 생활로 얻은 병과 술·약물 남용으로 인한 심부전증 때문이었습니다. 감옥에 들어가 형기가 시작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난 것이니, 실질적으로 그는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전설을 더욱 널리 퍼뜨렸습니다. 그렇게 메이헤런은 진상이 제대로 밝혀진 2008년까지 60여년간 영웅과 같은 대접을 받았습니다. 사실은 지금도 여전히 많은 이들이 메이헤런의 실체를 알지 못하거나 의도적으로 무시한 채, 그의 전설을 퍼뜨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뭘 배울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아마도 이야기를 접하는 사람만큼이나 다양할 겁니다. 잘못된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퍼지는 과정에 집중한다면, ‘사람들은 진실보다 흥미로운 이야기를 더 좋아한다’고 표현할 수도 있겠지요.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이 믿고 싶은 걸 믿는다’는 생각을 떠올릴 수도 있겠습니다. 사람들은 메이헤런의 위작을 베르메르의 진품으로, 나치를 골탕 먹이려 했다는 그의 거짓말을 진실로 믿고 싶어 했습니다.
반면 현대미술에 대해 의구심을 갖고 있던 사람 중에서는, 수집가와 평론가들이 위작에 속았다는 사실에 집중해 “역시 현대미술은 사기와 같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분도 있을 겁니다. 좀 더 깊이 있게 들어가 “우리가 명작이라고 믿는 작품들은 그 자체로 명작인가, 평론가와 사회가 만든 것인가” 등의 질문을 던질 수도 있겠습니다.
개인의 삶과 선택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재능 있는 화가였던 메이헤런이 돈을 좇다 화가로서의 삶을 스스로 망쳤다는 내용에 집중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미국 뉴요커지에서 일했던 미술 평론가인 피터 셸달처럼 이렇게 멋지게 말할 수도 있겠지요. “자신의 본모습을 제대로 마주하지 않으면, ‘진정한 나’는 영영 사라지고 만다(The state of being oneself dies when set aside).”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
**이번 기사는 Jonathan Lopez의 'The Man Who Made Vermeers'를 중심으로 2008년 Peter Schjeldahl의 New yorker 기사 'Dutch Master', Edward Dolnick의 'The Forger's Spell', Frederik H. Kreuger의 'Han van Meegeren, Meestervervalser' 등을 참조해 작성했습니다.
***8월 말에서 9월 초, 초대형 아트페어인 ‘KIAF-프리즈’를 중심으로 국내 각종 미술 행사들이 집중 개최됩니다. 국내 주요 미술관에서도 블록버스터급 전시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열립니다. 멋진 전시들을 계속 소개하고, 당분간 <그때 그 사람들>도 지금 국내에서 열리는 전시와 관련한 내용으로 준비하겠습니다. 기자 페이지를 지켜봐 주세요!
<그때 그 사람들>은 미술과 고고학, 역사 등 과거 사람들이 남긴 흥미로운 것들에 대해 다루는 코너입니다. 토요일마다 연재합니다. 쉽고 재미있게 쓰겠습니다. 네이버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6만여명 독자가 선택한 연재 기사를 비롯해 재미있는 전시 소식과 미술시장 이야기를 놓치지 않고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