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막히게 불안하다, 유승호 연극 데뷔작 <엔젤스 인 아메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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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엔젤스 인 아메리카 - 파트원:밀레니엄이 다가온다>
1980년대 미국 사회의 혼란 속
소수자들의 불안과 차별 그려
음악과 천사의 목소리 등 사운드 연출 인상적,
인물 묘사는 섬세함 부족해 몰입 어려워
서울 마곡동 LG아트센터, 9월 28일까지
1980년대 미국 사회의 혼란 속
소수자들의 불안과 차별 그려
음악과 천사의 목소리 등 사운드 연출 인상적,
인물 묘사는 섬세함 부족해 몰입 어려워
서울 마곡동 LG아트센터, 9월 28일까지
"20세기 최고의 희곡"으로 불리는 명작이자 퓰리처상 수상작. 유승호의 연극 데뷔작. 여러모로 많은 화제를 모은 연극 '엔젤스 인 아메리카'지만 막상 관람을 하러 가면 난해하게 느껴질 수 있다. 레이거노믹스, 드랙퀸, 유대인 사회와 모르몬교 등의 테마가 담긴 지극히 미국적인 이야기기 때문이다. 1980년대 미국 사회상을 알고 관람한다면 더 즐길 수 있는 작품이다.
혼란과 불안 가득했던 1980년대 미국
'레이거노믹스'
작품은 1985년 미국 뉴욕을 배경으로 한다. 당시 미국의 대통령은 로널드 레이건. 1981년부터 1989년까지 재임했다. 취임 당시 미국 경제는 2차 석유파동으로 침체기를 겪고 있었다. 레이건 대통령은 자유시장 경제에 입각한 '레이거노믹스' 정책을 내세웠다. 정부지출 축소와 규제 완화로 미국 경제 중흥기를 이끌었다. 반면 부자 감세로 인해 빈부격차가 확대해 양극화를 심화하기도 했다.
냉전
80년대에는 소련과의 냉전이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었다. 레이건 대통령은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는 극단적인 표현으로 부르고, '아마겟돈'(종말)이라는 말을 사용해 공공연히 핵전쟁에 대한 공포에 불을 지폈다. 그는 군비경쟁에서 앞서기 위해 '스타워즈 계획'이라고도 불린 전략방위구상(SDI) 사업을 추진했다. 소련의 핵미사일을 요격하는 레이저 시스템을 만드는 계획이었다. SDI는 미국과 소련 사이 관계를 긴장시켰고 1986년 고르바초프 서기장과 이뤄진 회담이 결렬되는 원인을 제공했다.
에이즈
에이즈가 감염이 병리학적으로 확인된 첫 사례는 1981년에 발견됐다. 이후 4년 동안 1만2000명이 사망할 정도로 확산했지만 레이건 대통령은 공개석상에서 이 전염병에 대해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그가 '에이즈'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건 1987년에서였다. 언론도 에이즈 보도에 소극적이었다.
그 사이 에이즈 환자와 동성애자에 대한 혐오 감정만 커졌다. 레이건 대통령의 보좌관이던 팻 뷰캐넌은 "가난한 동성애자들이 자연과의 전쟁을 선포했으며, 이제 자연은 가공할 보복을 하고 있다"고 기고하기도 했다. 에이즈 환자는 어디서든 기피 대상으로 낙인되고 의료 혜택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다. 동성애자 사회는 절멸 위기에 몰렸고, 에이즈에 대한 공포심이 사회로 퍼져나갔다.
세기말 미국 사회 혼란이 빚어낸 8명의 주인공
<엔젤스 인 아메리카>의 저자 토니 쿠슈너는 유대인이자 동성애자다. 이런 정체성과 1980년대 혼란스러웠던 개인사가 이 작품의 배경이 됐다. 부제 <밀레니엄이 찾아온다>처럼 새로운 시대를 앞둔 세기말 미국 사회의 불안과 공포를 다양한 정체성의 주인공들의 이야기에 담았다. 작품을 이끌어가는 주인공 월터 프라이어. 전직 드랙퀸이자 에이즈에 걸려 괴로워하는 동성애자다. 몸이 아파 병원에 가지만 정확한 병명을 진단받기조차 어렵다. 의사는 피부 질환이라며 나아질 거라고 얘기하지만 그는 혈변을 바지에 지릴 정도로 몸이 망가져 간다.
그의 동성 연인 루이스 아이언슨은 유대인이다. 애인이 정체 모를 병에 걸려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며 그는 두려움에 떤다.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해 무의미하고 추상적인 정의와 이념에 대한 사념을 늘어놓고, 길거리의 지나가는 남자와 욕정을 나누기도 한다.
루이스는 법원에서 조셉 피트를 만난다. 혼전 관계를 포함한 혼외 관계와 동성애를 금기시하는 모르몬교 신자인데다 아내와 결혼한 유부남이다. 스스로도 부정하려하지만, 동성애자인 자신의 정체성에 괴로워한다. 그와 같은 모르몬교도인 아내 하퍼는 약물에 중독돼 매일 환각을 보며 "새로운 시대가 온다"는 말을 늘어놓으며 하루를 보낸다. 이들 외에도 흑인 드랙퀸인 벨리즈, 동성 관계로 에이즈에 걸리지만 자신은 동성애자가 아니라 '재미 삼아' 남자와 잤다고 주장하는 보수 정치계 유력인사이자 부패한 유대인 변호사인 로이 콘을 포함한 8명의 이야기가 서로 교차하며 극이 진행된다.
이 이야기에 난데없이 등장하는 천사. 당시 에이즈를 '동성애자에게 내리는 천벌'로 여긴 사회 속에 에이즈 환자들이 마주했던 공포와 죄책감이 응집된 설정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혼란을 겪는다는 점이다. 종교적, 사회적 자아와 내면에서 꿈틀거리는 정체성이 서로 엇갈리고 충돌한다. 하지만 80년대 미국 사회는 이들을 보듬어주기에는 너무 혼란스럽고 차갑다. 소수자들이 겪은 차별과 고통을 그리면서 다양성과 존엄의 가치를 이야기한다.
밋밋한 인물 묘사가 몰입하기 어려워 극의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분위기를 만드는 데에 가장 큰 역할을 하는 요소는 바로 소리. 극 전반에 깔린 불협화음의 음악이 깔린다. 천사가 불호령 같은 개시를 내리는 대사도 깊은 목소리부터 고음역대의 목소리까지 뒤섞인 기이한 소리가 극장을 쩌렁쩌렁 울려 웅장하면서 소름이 끼친다. 당시 소수자들과 에이즈 환자들이 느꼈던 공포가 객석으로 전해진다.
미국의 이야기지만 등장인물들이 겪는 갈등과 모순은 보편적이다. 종교, 성 정체성, 질병과 낙인. 이런 실체가 보이지 않는 어려움에 부닥친 인물들이 느끼는 무기력함과 공포가 이 작품을 이끌어가는 힘이다. 다만 이런 인물들의 공감을 끌어내기에는 인물 묘사가 다소 투박하다. 넓은 감정 폭을 연기하는 과정에서 속삭이거나 격정적으로 대사를 내뱉는 부분에서 대사가 잘 안 들리는 장면도 있다. 인물들이 유기적으로 발전하기보다는 감정과 다른 인물과의 관계 변화가 다소 투박하고 딱딱하게 그려진다.
인물들의 각자의 이유로 속이 썩어들어가고 치열한 고뇌에 빠지는 모습도 섬세하게 전해지지 않아 이들의 행동에 공감하기 쉽지 않다. 등장인물의 강한 개성과 입체적인 매력에 걸맞은 연기와 표현이 관객이 몰입하기 위해 필요하다.
무기력함과 불안감이 숨 막히는 작품. 매력적인 등장인물들의 감정을 더 섬세한 연출로 그린다면 더 호소력있는 공연으로 거듭날 가능성이 보인다. 공연은 9월 28일까지 서울 마곡동 LG아트센터에서.
구교범 기자
혼란과 불안 가득했던 1980년대 미국
'레이거노믹스'
작품은 1985년 미국 뉴욕을 배경으로 한다. 당시 미국의 대통령은 로널드 레이건. 1981년부터 1989년까지 재임했다. 취임 당시 미국 경제는 2차 석유파동으로 침체기를 겪고 있었다. 레이건 대통령은 자유시장 경제에 입각한 '레이거노믹스' 정책을 내세웠다. 정부지출 축소와 규제 완화로 미국 경제 중흥기를 이끌었다. 반면 부자 감세로 인해 빈부격차가 확대해 양극화를 심화하기도 했다.
냉전
80년대에는 소련과의 냉전이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었다. 레이건 대통령은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는 극단적인 표현으로 부르고, '아마겟돈'(종말)이라는 말을 사용해 공공연히 핵전쟁에 대한 공포에 불을 지폈다. 그는 군비경쟁에서 앞서기 위해 '스타워즈 계획'이라고도 불린 전략방위구상(SDI) 사업을 추진했다. 소련의 핵미사일을 요격하는 레이저 시스템을 만드는 계획이었다. SDI는 미국과 소련 사이 관계를 긴장시켰고 1986년 고르바초프 서기장과 이뤄진 회담이 결렬되는 원인을 제공했다.
에이즈
에이즈가 감염이 병리학적으로 확인된 첫 사례는 1981년에 발견됐다. 이후 4년 동안 1만2000명이 사망할 정도로 확산했지만 레이건 대통령은 공개석상에서 이 전염병에 대해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그가 '에이즈'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건 1987년에서였다. 언론도 에이즈 보도에 소극적이었다.
그 사이 에이즈 환자와 동성애자에 대한 혐오 감정만 커졌다. 레이건 대통령의 보좌관이던 팻 뷰캐넌은 "가난한 동성애자들이 자연과의 전쟁을 선포했으며, 이제 자연은 가공할 보복을 하고 있다"고 기고하기도 했다. 에이즈 환자는 어디서든 기피 대상으로 낙인되고 의료 혜택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다. 동성애자 사회는 절멸 위기에 몰렸고, 에이즈에 대한 공포심이 사회로 퍼져나갔다.
세기말 미국 사회 혼란이 빚어낸 8명의 주인공
<엔젤스 인 아메리카>의 저자 토니 쿠슈너는 유대인이자 동성애자다. 이런 정체성과 1980년대 혼란스러웠던 개인사가 이 작품의 배경이 됐다. 부제 <밀레니엄이 찾아온다>처럼 새로운 시대를 앞둔 세기말 미국 사회의 불안과 공포를 다양한 정체성의 주인공들의 이야기에 담았다. 작품을 이끌어가는 주인공 월터 프라이어. 전직 드랙퀸이자 에이즈에 걸려 괴로워하는 동성애자다. 몸이 아파 병원에 가지만 정확한 병명을 진단받기조차 어렵다. 의사는 피부 질환이라며 나아질 거라고 얘기하지만 그는 혈변을 바지에 지릴 정도로 몸이 망가져 간다.
그의 동성 연인 루이스 아이언슨은 유대인이다. 애인이 정체 모를 병에 걸려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며 그는 두려움에 떤다.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해 무의미하고 추상적인 정의와 이념에 대한 사념을 늘어놓고, 길거리의 지나가는 남자와 욕정을 나누기도 한다.
루이스는 법원에서 조셉 피트를 만난다. 혼전 관계를 포함한 혼외 관계와 동성애를 금기시하는 모르몬교 신자인데다 아내와 결혼한 유부남이다. 스스로도 부정하려하지만, 동성애자인 자신의 정체성에 괴로워한다. 그와 같은 모르몬교도인 아내 하퍼는 약물에 중독돼 매일 환각을 보며 "새로운 시대가 온다"는 말을 늘어놓으며 하루를 보낸다. 이들 외에도 흑인 드랙퀸인 벨리즈, 동성 관계로 에이즈에 걸리지만 자신은 동성애자가 아니라 '재미 삼아' 남자와 잤다고 주장하는 보수 정치계 유력인사이자 부패한 유대인 변호사인 로이 콘을 포함한 8명의 이야기가 서로 교차하며 극이 진행된다.
이 이야기에 난데없이 등장하는 천사. 당시 에이즈를 '동성애자에게 내리는 천벌'로 여긴 사회 속에 에이즈 환자들이 마주했던 공포와 죄책감이 응집된 설정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혼란을 겪는다는 점이다. 종교적, 사회적 자아와 내면에서 꿈틀거리는 정체성이 서로 엇갈리고 충돌한다. 하지만 80년대 미국 사회는 이들을 보듬어주기에는 너무 혼란스럽고 차갑다. 소수자들이 겪은 차별과 고통을 그리면서 다양성과 존엄의 가치를 이야기한다.
밋밋한 인물 묘사가 몰입하기 어려워 극의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분위기를 만드는 데에 가장 큰 역할을 하는 요소는 바로 소리. 극 전반에 깔린 불협화음의 음악이 깔린다. 천사가 불호령 같은 개시를 내리는 대사도 깊은 목소리부터 고음역대의 목소리까지 뒤섞인 기이한 소리가 극장을 쩌렁쩌렁 울려 웅장하면서 소름이 끼친다. 당시 소수자들과 에이즈 환자들이 느꼈던 공포가 객석으로 전해진다.
미국의 이야기지만 등장인물들이 겪는 갈등과 모순은 보편적이다. 종교, 성 정체성, 질병과 낙인. 이런 실체가 보이지 않는 어려움에 부닥친 인물들이 느끼는 무기력함과 공포가 이 작품을 이끌어가는 힘이다. 다만 이런 인물들의 공감을 끌어내기에는 인물 묘사가 다소 투박하다. 넓은 감정 폭을 연기하는 과정에서 속삭이거나 격정적으로 대사를 내뱉는 부분에서 대사가 잘 안 들리는 장면도 있다. 인물들이 유기적으로 발전하기보다는 감정과 다른 인물과의 관계 변화가 다소 투박하고 딱딱하게 그려진다.
인물들의 각자의 이유로 속이 썩어들어가고 치열한 고뇌에 빠지는 모습도 섬세하게 전해지지 않아 이들의 행동에 공감하기 쉽지 않다. 등장인물의 강한 개성과 입체적인 매력에 걸맞은 연기와 표현이 관객이 몰입하기 위해 필요하다.
무기력함과 불안감이 숨 막히는 작품. 매력적인 등장인물들의 감정을 더 섬세한 연출로 그린다면 더 호소력있는 공연으로 거듭날 가능성이 보인다. 공연은 9월 28일까지 서울 마곡동 LG아트센터에서.
구교범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