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활동 중인 김택수 현대음악 작곡가가 지난 20일 서울 서대문구 한 호텔에서 한국경제신문과 인터뷰하며 자신의 악보를 투명 보드에 그리고 있다. 
 /구본숙 사진작가
미국에서 활동 중인 김택수 현대음악 작곡가가 지난 20일 서울 서대문구 한 호텔에서 한국경제신문과 인터뷰하며 자신의 악보를 투명 보드에 그리고 있다. /구본숙 사진작가
거창한 꿈을 꾸기보단, 언제 뒤돌아봐도 스스로 떳떳한 작품을 남기는 걸 목표로 삼고 싶어요. 지쳐서 쓰러질지언정 조금의 후회도 남지 않도록요.

국제화학올림피아드에 한국 대표로 출전해 은메달을 따고 서울과학고 졸업 이후 서울대 화학과를 다니던 그는 20대 초반까지 삶의 길이 명확하게 정해진 것처럼 보였다. 그러던 그는 대학교 4학년 때 문득 인생 전체를 뒤흔드는 질문에 휩싸였다.

“화학을 공부할 땐 아무리 고민해도 앞으로 이걸로 뭘 하고 싶은지 모르겠더라. 그런데 음악을 할 때만큼은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 쉼 없이 떠올랐다.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작곡과 수업을 하나둘 청강하기 시작했다.”

그는 곧 서울대 작곡과로 편입한 뒤 ‘작곡가의 길을 걸어도 되겠다’고 확신했다. 대학원까지 졸업한 그는 2011년 미국으로 건너가 인디애나대 음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샌디에이고주립대 교수로서 미국과 유럽 명문 악단이 끊임없이 찾는 현대음악 작곡가가 됐다. 2021년 국제적 권위의 미국 버를로우 작곡상을 받은 김택수 작곡가(44)의 이야기다.

문제 풀듯…오선지에 풀어나간 선율…과학도, 작곡도, 답을 찾아가는 과정
과학 영재 출신인 김 작곡가는 네 살 때부터 피아노를 접하고 일곱 살부터 바이올린을 배운 게 전부였다. 몇몇 음악 동아리 활동은 했지만 전업 음악가로서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진로를 바꾼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지금은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샌프란시스코 심포니 오케스트라 등 이름만 대면 알 만한 미국 악단이 그의 작품을 잇달아 무대에 올린다. 독일 앙상블 모데른 등 최정상급 현대음악 단체에서 작품을 위촉할 정도로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그가 오랜만에 한국을 찾았다. 지난 20일 서울 서대문구 한 호텔에서 그를 만났다.

올해 7회를 맞은 힉엣눙크! 뮤직 페스티벌에서 그의 신곡 ‘네 대의 바이올린과 타악기를 위한 협주곡(with/out)’이 아시아 초연된다. 24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리는 이번 공연엔 프랭크 황 뉴욕 필하모닉 악장, 데이비드 챈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 악장, 다니엘 조 함부르크 필하모닉 악장, 앤드루 완 몬트리올 심포니 악장 등이 참여한다. 한국을 대표하는 실내악단인 세종솔로이스츠가 김 작곡가에게 위촉한 작품으로 올해 5월 미국 뉴욕 카네기홀에서 세계 초연됐다.

그는 “이번 곡은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한 건물(아파트)에 모여 살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이 철저히 고립된 모습에서 영감을 얻었다”며 “소셜미디어를 통해 이전보다 많은 사람과 가깝게 연결돼 있으나 더 강한 고독감을 느끼는 현대인과 매우 닮았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김 작곡가는 이번 작품에서 세 개 악장을 통해 ‘현시대의 사회적 거리’에 관한 고찰을 담아냈다.
문제 풀듯…오선지에 풀어나간 선율…과학도, 작곡도, 답을 찾아가는 과정
“1악장에서는 군중 속에서 느끼는 고독을, 2악장에서는 한 가지 목표를 향해 달리는 집단과 정해진 틀을 벗어나려는 개인 간 갈등, 긴밀한 소통 없이 각자 하고 싶은 말만 늘어놓는 집단 독백 등 사회집단에서 발견할 수 있는 다양한 거리감을 표현했어요. 현대사회에 존재하는 ‘외로움’이 비단 나에게만 찾아오는 불편한 감정이 아니라 모두에게 올 수 있는 보편적 감정임을 느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누군가에겐 그런 교감 자체가 큰 힘이 된다고 믿거든요.”

현대음악은 보통 난해하다는 인식이 강하지만 그의 작품은 듣기 어렵지 않다. 일상에서 소재를 찾고 유머러스한 요소를 충실히 활용한다. 한국 특유의 정서를 담은 작품도 여러 개다. “찹쌀떡!” “메밀묵!” 같은 정겨운 소리가 그대로 등장하는 합창곡 ‘찹쌀떡’, 옛날 국민체조 구령과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선율이 녹아 있는 ‘국민학교 환상곡’ 등이 그렇다. 국악과 클래식 간 융합도 김 작곡가 작품에선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영감이 대단한 경험에서 오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특별한 것 없는 일상에서 마주하는 소리 한 음, 생각 한 줄에서 나의 아이디어가 시작된다”고 말했다.

“같은 일상이라도 남들과 조금은 다른, 외국인에게 신선하게 느껴질 만한 경험이 무엇일지 고민했는데, 언제나 그에 대한 답은 ‘한국에서의 추억’이었어요. 한국에서 겪은 소중한 경험, 호소력 짙은 국악을 향한 끝없는 궁금증은 앞으로도 영감의 귀중한 원천이 될 것 같습니다.”

그에게 작곡가로서 최종 목표를 묻자 이런 답이 돌아왔다. “작곡이란 반복해서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고 끊임없이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시작도 끝도 제가 결정할 수 있죠. 그래서 거창한 꿈을 꾸기보다는 언제 뒤돌아봐도 스스로 떳떳한 작품을 남기는 걸 목표로 삼고 싶어요. 지쳐 쓰러질지언정 조금의 후회도 남지 않도록요.”

김수현 기자/사진=구본숙 사진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