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의 한 노후 아파트 단지 모습. 숲을 연상시키는 입구 너머에는 초등학교와 중학교, 고등학교가 모여 있다. 사진=오세성 한경닷컴 기자
수도권의 한 노후 아파트 단지 모습. 숲을 연상시키는 입구 너머에는 초등학교와 중학교, 고등학교가 모여 있다. 사진=오세성 한경닷컴 기자
부동산 시장에서 '얼죽신'(얼어 죽어도 신축) 열풍이 일고 있습니다. 이같이 청년층을 중심으로 신축 아파트 선호 현상이 나타났지만 노후 아파트 거주자들은 "'얼죽신'보단 '슬세권'(슬리퍼+세권)"이라고 입을 모아 말합니다. 직접 살아보면 부동산은 입지가 중요하다는 말을 체감하게 된다는 주장입니다.

"얼어 죽어도 신축" 열풍에도…"슬세권은 못 따라와"

1993년 지어진 경기 안양시 노후 아파트에 거주하는 박모(39)씨는 현재 아파트에서 계속 거주할 계획입니다. 집을 팔고 신축 아파트로 옮기는 것이 어떠냐는 지인들의 말에도 고개를 젓습니다. 아파트 단지 주변의 생활 여건이 쾌적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집에서 도보로 5분이면 지하철역에 도착합니다. 백화점과 상점 등이 모인 중심 상권과의 거리도 도보 4분, 10만㎡ 규모의 중앙공원까지는 도보 2분이면 닿습니다. 도보 10분 거리에 대학병원도 자리 잡고 있습니다. 슬리퍼 차림과 같이 편한 복장으로 이용할 수 있는 가까운 권역 내에 도시의 주요 시설이 모두 모여있는 것입니다.

박씨는 "신축 아파트는 재건축이 아닌 이상 도시 외곽에 위치하지 않느냐"며 "지인이 신축 아파트를 매수해 집들이를 다녀왔는데, 집 자체는 좋아도 입지가 너무 나빴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도시 중심에 세워진 노후 아파트는 말 그대로 '슬세권'이기에 외곽의 신축 아파트보다 생활하기 좋다"고 평가했습니다.
낮 시간 노후 아파트 주차장에 차량이 빼곡하게 들어선 모습. 사진=독자제공
낮 시간 노후 아파트 주차장에 차량이 빼곡하게 들어선 모습. 사진=독자제공
물론 노후 아파트의 단점도 있습니다. 건물의 노후도와 배관 부식으로 발생하는 녹물, 열악한 주차 공간 등이 대표적입니다. 하지만 박씨는 이러한 단점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반박합니다. 다수 아파트가 배관과 엘리베이터를 교체하는 추세이고 집 안 인테리어를 새로 하면 노후도도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차에 대해선 "차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고충이 있는 것 같다. 저녁 시간이면 단지 밖 도로에 주차하는 사람들이 있다"면서도 "도보 5분 거리 지하철로 출퇴근하고, 식자재 등은 근처 대형마트에서 배송받으니 차량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고 털어놨습니다.

시장에서는 '얼죽신'과 '슬세권'이 팽팽한 경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한국부동산원이 발표한 7월 전국주택가격동향조사에 따르면 5년 이하 신축 아파트 매매가격지수는 전달 대비 0.47% 올랐습니다. 이에 반해 준공 20년 초과 노후 아파트 매매가격지수는 0.13% 오르는 데 그쳤습니다. 신축 아파트 가격의 상승 폭이 노후 아파트의 세 배를 넘어선 것입니다.

자연환경 매력적인 노후 아파트…"그 자체로 숲이고 공원"

주택 선호도 측면에서는 슬세권이 앞서고 있습니다. 한국갤럽조사연구소가 발표한 '부동산 트렌드 2024'에 따르면 주택 결정 시 주요 고려 요인으로 △교통 편리성(52%) △직주 근접성(47%) △생활편의·상업시설 접근 편리성(40%) 등 입지적 요인이 최상위 고려 요인으로 꼽혔습니다. 신축 아파트의 강점으로 꼽히는 △세대 내부 평면구조·시설은 9%에 그쳤습니다.

입지적 측면 외에 자연환경도 노후 아파트의 매력 중 하나입니다. 아파트 연식이 지나면서 처음 심을 때는 앙상했던 조경수들이 아름드리나무로 커졌기 때문입니다. 1987년 준공된 경기 안산시 노후 아파트에 거주하는 오모(42)씨는 "요즘 '공세권', '숲세권'이라는 말들을 하던데, 노후 아파트는 그 자체가 숲이고 공원"이라고 말합니다.
수도권 노후 아파트 공동현관에서 발견된 사슴벌레를 다시 풀어준 모습. 사진=독자제공
수도권 노후 아파트 공동현관에서 발견된 사슴벌레를 다시 풀어준 모습. 사진=독자제공
그는 "나무가 우거지니 새가 많다. 참새나 까치는 물론이고 저녁이면 간혹 소쩍새 소리가 들린다"며 "단지 사이를 가로질러 달리는 족제비나 청설모도 심심찮게 보인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어 "여름이면 매미가 울고 가을에는 귀뚜라미를 비롯한 풀벌레 소리가 들린다"며 "올해 여름에는 아파트 공동현관에서 사슴벌레를 주워 이틀 정도 돌보다가 뒷산에 풀어줬다"고 설명했습니다.

통상 아파트를 새로 지을 때는 지하 주차장 깊이 이상으로 땅을 파서 공사하고, 나무 등의 식재를 새로 심는 절차를 밟습니다. 그렇다 보니 단지 안의 나무 대부분은 앙상하고, 뿌리를 제대로 내리지 못한 탓에 지지대도 필요합니다. 매미 등의 곤충을 구경하기도 어렵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여러 곤충이 생기고 작은 생태계가 형성되지만, 아파트 역시 신축이 아니게 됩니다. 숲세권 같은 환경 역시 노후 아파트의 특징인 셈입니다.

부동산 업계 관계자는 "가격만 놓고 보자면 재건축 기대감이 낮아지면서 노후 아파트가 약세를 보이는 것이 사실"이라면서도 "실제 주거 환경 측면에서는 노후 아파트가 갖는 강점도 적지 않다. 특히 도시 개발과 함께 지어진 노후 아파트라면 핵심지역에 자리 잡은 경우가 많다"고 평가했습니다.

오세성 한경닷컴 기자 ses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