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 고려대 안암병원 외과 교수(왼쪽 첫 번째)가 복강경을 활용해 대장암 수술을 집도하고 있다.  /고려대 안암병원 제공
김진 고려대 안암병원 외과 교수(왼쪽 첫 번째)가 복강경을 활용해 대장암 수술을 집도하고 있다. /고려대 안암병원 제공
암세포가 먼 거리에 있는 다른 장기로 번진 4기암은 말기암으로 불린다. 과거 제한적으로 항암제를 쓰면서 생존 기간을 일부 연장하는 게 치료법의 전부이던 시기에 붙은 명칭이다. 김진 고려대 안암병원 외과 교수(사진)는 이런 ‘4기암=말기암’ 공식을 깬 의사다. 간·폐 등으로 전이된 대장암 환자도 적극적으로 수술해 생존율을 높이고 있어서다. 그는 “대장암은 4기라고 해도 수술로 치료할 수 있는 여지가 많아졌다”며 “임종이 얼마 남지 않은 환자가 아니라면 ‘말기’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끝까지 수술해 대장암 말기 환자 살려

'4기암=말기암' 편견 깬 외과의사…후기암 생존율 2배 높였다
암은 발생한 위치와 크기, 주변 림프절 전이 여부, 다른 장기 전이 여부 등에 따라 1~4기로 병기가 정해진다. 암이 원래 생긴 장기에만 작게 있을 때 발견됐다면 1기다. 크기가 다소 크지만 주변 림프절 등으로 번지지 않았다면 2기로 판단한다. 이렇게 이른 시기에 발견한 대장암은 완치율(5년 생존율)이 90%를 넘는다. 암이 생긴 뒤 시간이 지나 주변 림프절로 번지거나(3기) 먼 거리에 있는 다른 장기로 퍼졌다면(4기) 치료 난도가 더 높아진다. 다른 장기로까지 대장암이 광범위하게 번진 4기암 환자는 5년 생존율이 14%로 떨어진다.

김 교수는 대장암이 재발하거나 인근 골반벽으로 전이된 3~4기 환자 등을 수술로 치료한다. 2010년 난치암 수술을 전문으로 하는 호주 시드니 RPA(Royal Prince Alfred) 병원에서 연수를 받고 온 게 시작이었다. 연수 전 병원을 결정할 때만 해도 고민이 많았다. 복강경 등 최신 수술 기술이 발전하는 시대에 배를 여는 방식으로 난치암 환자를 치료하는 병원에서 배울 점이 많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해서다.

하지만 RPA 병원에서 보낸 1년은 김 교수의 삶을 바꾸는 계기가 됐다. 치료가 불가능한 암 환자에게 새 생명을 선물할 가능성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김 교수가 연수를 떠나던 때만 해도 국내에서 재발·전이성 대장암 환자 상당수는 수술을 포기하고 항암 치료를 받으며 여명을 보냈다. 김 교수팀이 ‘공격적’으로 수술해 암 덩어리를 제거하기 시작하자 이런 환자의 절반 이상은 이제 수술도 기대해볼 수 있게 됐다. 그는 “과거에는 4기 대장암 환자를 수술로 완치시킬 가능성이 ‘제로’였다면 10년 전에는 40%, 최근에는 60%까지 높아졌다”며 “암을 줄여 여명을 늘리는 ‘고식적 치료’뿐만 아니라 상당수 환자가 암을 없애는 ‘근치적 치료’도 기대할 수 있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지뢰밭 같은 골반벽 전이 환자도 수술

암이 골반벽으로까지 퍼진 환자의 수술 시대를 연 것도 김 교수다. 김 교수팀이 첫 수술에 성공한 것은 6년 전이다. 이후 매년 이런 환자를 한두 명 수술하고 있다. 골반벽엔 신경과 혈관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다. 방사선 치료 등으로 조직이 섬유화돼 암과 정상 조직의 경계를 구분하기 어려운 환자도 많다. 골반벽 재발암 수술을 ‘지뢰밭 같다’고 표현하는 배경이다. 이들에게서 암세포 등을 잘 제거하기 위해선 인체의 해부학적 구조에 익숙해져야 한다.

단순히 암을 제거하는 것뿐 아니라 환자가 수술 후에도 최대한 기능적으로 문제없이 생활하도록 돕는 게 중요하다. 배를 열기 전 다양한 변수를 고려해 A안, B안, C안, D안 등 수술 대안을 짜야 하는 이유다. 평소 이미지트레이닝으로도 해법이 보이지 않을 땐 꿈에서도 치료법을 설계한다.

김 교수는 수술을 하루에 한 개 정도만 잡는다. 난치암 환자는 변수가 많아 수술 시간이 얼마나 길어질지 알 수 없어서다. 꼬리뼈로 암이 전이된 환자에게는 정형외과, 성형외과 등의 의료진이 참여해 수술 중 뼈를 자르고 비어 있는 공간을 메워주는 수술을 집도한다. 여러 진료과 의사가 손을 바꿔가며 수술하는데, 아침에 시작한 수술이 해가 진 뒤 끝나는 일이 많다.

복막이나 다른 장기로 전이된 환자 배 속에 40도 넘게 데운 항암 약물을 부어주는 하이펙 치료도 자주 시행한다. 고용량 항암제를 암에 직접 투여할 수 있지만 2~3시간 동안 기화된 고온 항암 약물에 노출되는 탓에 의료진 건강엔 좋지 않다. 하지만 환자 치료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면 주저하지 않는다. 환자 상처를 줄이고 회복을 돕기 위해 로봇 수술, 3차원(3D) 복강경 수술 등도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있다.

○“후기암 진단받아도 적극 치료해야”

조기에 암을 찾지 못해 후기암 진단을 받았더라도 치료를 포기해선 안 된다. 의학 기술이 발전하고 항암제, 방사선 치료법이 함께 성장하면서 과거보다 선택지가 늘었기 때문이다.

난치암 환자 수술을 책임지는 고된 일상이지만 김 교수에게 환자는 또 다른 스승이다. 치료법을 다양한 방식으로 설계하면서 새 수술법을 고안하는 사례도 많다.

“다른 병원에서 방광과 직장을 다 없애야 한다는 진단을 받고 병원을 찾은 환자가 있었어요. 수술로 암을 없앨 수는 있겠지만 이후 환자 삶의 질을 장담할 수 없었죠. 영상의학과 교수와 함께 환자 상태를 꼼꼼히 살펴 살릴 수 있는 부분을 체크했어요. 고민 끝에 방광도 살리고 장루도 만들지 않는 상태로 수술을 끝냈죠. 대장암이 꼬리뼈 쪽으로 크게 전이된 환자도 기억에 남아요. 전이 탓에 수술이 어려우니 방사선 치료만으로 끝내자는 통보를 받고 찾아온 환자였죠. 방사선 치료를 했더니 수술로 없앨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결국 추가 수술을 해서 4년 넘게 문제없이 잘 살고 계십니다. 이런 분들을 살릴 수 있다는 게 큰 보람입니다.”

이지현 기자 blues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