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즈니+의 신작 ‘노 웨이 아웃 : 더 룰렛’의 생명력은 놀랍게도 '상투성'이다. 이전의 온갖 작품들에서 모티프와 이야기 구조, 캐릭터를 가져왔다. 그런데도 더욱 놀라운 것은 그런 모방의 상투성이 드라마를 더 재미있게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 작가 이수진의 영리한 짜깁기, 마치 이야기라는 기계에 있어 신형 이음새 부품을 새로 만들어 낸 듯한 놀라운 발명품 같은 느낌을 준다.

진부하지만 새롭다. 뻔한 얘기지만 오히려 그래서 안심하고 드라마를 이어 보게 된다. ‘이건 결국 선이 이길 것이야, 아 참 선 따위는 없지, 그래도 나름대로 악을 응징해 나갈 것이야. 아냐 아냐 그것도 아냐, 그냥 주인공이 살아남고 주인공의 가족이 안전해지며 게다가 주인공에게 돈도 생기게 될 거야’ 등등, 그런 안심의 마음을 준다. 그것이야말로 이 드라마의 동력이다.
디즈니+ '노 웨이 아웃 : 더 룰렛' 포스터 / 사진출처. 디즈니+
디즈니+ '노 웨이 아웃 : 더 룰렛' 포스터 / 사진출처. 디즈니+
기본적으로 ‘노 웨이 아웃 : 더 룰렛’의 속내는 미국의 잔혹 공포극 ‘더 쏘우’로부터 가져왔다. 여기에 ‘오징어 게임’을 얹혔지만 이건 순전히 극 중 ‘가면남’이 쓴 마스크의 이미지 때문이다. ‘오징어 게임’보다는 ‘에이트 쇼’가 더 가깝다. 좀 더 상세히 들여다보면 할리우드의 수많은 자경단(自警團) 영화, 예컨대 찰슨 브론슨의 ‘데스 위시’같은 시리즈의 컨셉을 본 따고 있다. 사법당국에 기대지 않고 직접 범죄자를 처단하는 이야기들이다.
디즈니+ '노 웨이 아웃 : 더 룰렛' 속 '가면남'의 마스크는 넷플릭스 '오징어 게임'을 떠오르게 한다
디즈니+ '노 웨이 아웃 : 더 룰렛' 속 '가면남'의 마스크는 넷플릭스 '오징어 게임'을 떠오르게 한다
극 초반의 추격전은 이명세 감독의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안성기–박중훈의 추적을 떠올리게 한다. 그만큼 드라마 전편에 각종 영화나 드라마의 레퍼런스가 넘쳐난다. 심지어 ‘노 웨이 아웃’이란 제목은 1986년 로저 도날드슨이 만든, 케빈 코스트너, 숀 영 주연의 영화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도날드슨의 영화에서 케빈 코스트너는 해군 소령 톰 파렐 역을 맡았는데 그는 소련에서 오래전 미 해군으로 잠입한 고정간첩으로 몰려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을’ 지경이 된다. 물론 ‘노 웨이 아웃’은 1950년에 나온 시드니 포이티에 주연의 인종차별 영화 제목이기도 했다. 이번 드라마 제작진이 그런 걸 다 의식하지는 못했겠으나 그런 등등 자체가 영화 올드팬들로 하여금 잠시나마 클릭해서 볼지 말지 여부를 유혹하는 데는 유용했을 것이다.
극 초반 추격전은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를 떠오르게 한다. /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극 초반 추격전은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를 떠오르게 한다. /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노 웨이 아웃 : 더 룰렛’은 오프닝을 성공적으로 연다. 두 남자가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는 장면이 시작이다. 한 남자(현봉식)가 고기 써는 막 칼로 또 한 남자 윤창재(이광수)의 귀를 자르려 한다. 둘은 친구 사이인 듯한 남자는 자꾸 ‘창재야 미안하다, 금방 끝난다’고 말하며 한쪽 귀를 잘라 낸다. 한편 이런저런 사기 사업에 돈을 탕진한 주인공 형사 백중식(조진웅)은 인생이 막장이다. 당장 이자 500만원을 갚지 못하면 딸의 첼로를 팔아야 할 판이다. 돈이 지옥이다. 마누라를 악다구니로 만든다. 돈이 급한 그이지만 형사인 만큼 수사는 마지못해서라도 해야 한다.
디즈니+ '노 웨이 아웃 : 더 룰렛' 1,2화 예고편 / 사진출처. 디즈니 플러스 코리아 YouTube
디즈니+ '노 웨이 아웃 : 더 룰렛' 1,2화 예고편 / 사진출처. 디즈니 플러스 코리아 YouTube
디즈니+ '노 웨이 아웃 : 더 룰렛' 스틸컷 / 사진출처. 디즈니+
디즈니+ '노 웨이 아웃 : 더 룰렛' 스틸컷 / 사진출처. 디즈니+
백중식은 병원에서 사라진 귀 잘린 남자의 뒤를 쫓다가 귀를 자른 남자의 정체를 알게 되고 비좁은 골목길을 헉헉대며 추격하던 와중에 남자는 계단을 구르다 죽는다. 문제는 그 바로 직전 백중식이 남자의 집에서 10억원이 든 가방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백중식은 돈이 급하다. 아이의 첼로는 지켜야 한다. 그는 10억원을 가로채기로 한다. 8부작 드라마의 모든 복잡한 문제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한다. 형사가 돈을 ‘꿀꺽’하는 것, 부패 형사가 된 주인공의 사정이 이 영화의 모든 모티프를 제공한다. 주인공 형사가 돈 10억을 보고 동공이 흔들리는 장면이 모든 것을 말한다. 드라마는 모든 사람의 본성, 특히 악의 본성을 자극하기 시작한다.

돈 10억원은 게임의 상금 같은 것이다. 인터넷 사이트에서는 가면남이라는 희대의 인간이 나타나 룰렛 게임을 한다. 법과 사법당국이 단죄하지 못한 사람 이름들과 별도의 형벌, 그리고 그걸 집행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상금 등을 룰렛 판을 돌려 결정한다. 얼마 전 스토커 짓으로 한 여자를 자살까지 몰아가게 했던 윤창재라는 이름이 타깃이 되고 그의 귀를 자르면 상금 10억원을 준다는 것이 룰렛에서 결정된다. 앞의 모든 상황, 두 남자의 활극과 주인공 형사가 10억원 가방을 가로 챈 것은 모두 거기서 비롯된 것이다. 이 룰렛 게임은 삽시간에 ‘돈의 맛’을 전염병처럼 퍼뜨린다. 가면남은 새로운 목표를 정한다. 연쇄 강간범으로 고작 13년을 살다가 형집행정지로 나오게 되는 김국호(유재명)의 목에 200억을 건다. 전국이 난리가 난다.
디즈니+ '노 웨이 아웃 : 더 룰렛' 하이라이트 / 사진출처. 디즈니 플러스 코리아 YouTube
디즈니+ '노 웨이 아웃 : 더 룰렛' 하이라이트 / 사진출처. 디즈니 플러스 코리아 YouTube
현상금을 걸고 범죄자를 처단하는 이야기로만 이어 갔으면 드라마는 8부작을 채우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여러 캐릭터들을 같이 비벼 넣음으로써 이야기를 풍부하게 만드는 재주를 부린다. 또 그런 재주는, 결국 우리 사회의 인간들 모두가 상하를 막론하고 돈에 미쳐 있으며 도덕이나 사회적 정의와는 멀어도 한참 먼 거리에 떨어져 살고있는 ‘미친 인간들’ 뿐이라는 자각을 갖게 만든다. 드라마 자체는 매우 상업적이고 재미를 위해 만든 것인 양하지만 사실 알고 보면 그 안에 사회적 의미의 메타포를 폭탄처럼 여기저기 심어 놓고 있다. 그 선의의 이율배반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드라마는 현상금 사냥이라는 불법적 행위에 나 몰라라, 몰려 대는 시민들, 그들을 이용해 조회수 장사를 하려는, 악마에 가까운 온갖 유튜버들의 모습들, 그에 못지않게 줏대 없이 현상만 쫓아다니며 나락 해 있는 기성 언론들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게 한다. 신축 중인 상가 건물의 자금난을 해결하려는 욕심으로 연쇄강간범 김국호의 인권을 편의대로 이용하려는 변호사 이상봉(김무열)은 한국 사회의 오염된 사법 시스템을 보여 준다. 그런 변호사를 자신의 정적을 옭아매려는 데 이용하려는 집권당 대표와 거기에 맞서 자신의 정치적 입지와 야욕을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지키려는 여자 시장 안명자(염정아)의 모습도 가관이긴 마찬가지이다. 가상 공간인 호산 시장의 시장 안명자 캐릭터는 다소 극적으로 과장되기는 했으나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들이 개연성의 측면에서 그리 탓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디즈니+ '노 웨이 아웃 : 더 룰렛' 스틸컷 / 사진출처. 디즈니+
디즈니+ '노 웨이 아웃 : 더 룰렛' 스틸컷 / 사진출처. 디즈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드라마의 가장 큰 ‘구멍’은 이 여자 시장 캐릭터이고, 이 여자 시장이 나오는 에피소드 분량이며, 이 여자 시장 역할을 맡은 염정아의 연기이다. 좀 더 그럴듯한 빌런으로 다듬어졌어야 했다. 중간에 나오는 외국인 킬러 스마일맨(대만 배우 허광한) 캐릭터도 ‘글쎄’이다. 킬러 역량에 비해 허망하게 무너진다. 그보다는 현실적인 ‘킬러’는 김국호의 친아들이자 그에게서 떨어지려고 애쓰는 엄마의 성을 따라 김씨가 아닌, 서씨가 된 서동하(성유빈)이다. 그는 천재 바이올리니스트이지만 이 모든 어두운 원죄를 끊어 내기 위해 아버지 김국호를 직접 처단하려고 애쓴다. 엄마도 마찬가지다. 엄마는 연약하지만, 아들을 위해 남자를 죽이려 한다. 이 모자의 에피소드는 좋다.
디즈니+ '노 웨이 아웃 : 더 룰렛' 하이라이트 / 사진출처. 디즈니 플러스 코리아 YouTube
디즈니+ '노 웨이 아웃 : 더 룰렛' 하이라이트 / 사진출처. 디즈니 플러스 코리아 YouTube
드라마 ‘노 웨이 아웃 : 더 룰렛’은 이처럼 오르락내리락 완성도의 롤러코스터를 탄다. 어느 부분은 매우 좋고 어느 부분은 매우 나쁘다. 다만 그걸 리듬감으로 커버하고 있어 8부작의 흐름을 중단시키지는 않게 만든다. 다시 말하지만, 이음새들이 나쁘지 않기 때문이다. 과하다 싶으면 다른 에피소드로 점핑 컷을 하는, 영리함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노 웨이 아웃 : 더 룰렛’은 한편으로는 삼중 사중의 빌런 드라마이다. 좋은 놈은 없다. 아주 나쁜 놈과 그저 나쁜 놈만이 있을 뿐이다. 그중에서 원초 빌런인 연쇄 강간범 김국호와 자신의 귀 잘린 돈 10억을 찾겠다고 하다가 나중에 200억까지 욕심을 내는 윤창재 캐릭터, 그 ‘이중 케익’ 구조가 잘 짜여 있다. 이 부분만큼은 작가 이수진의 역량이 돋보인다. 두 악당이자 악마 모두 주인공인 백중식을 더 이상 도망갈 데 없는 구석으로 몰아간다.

귀 잘린 남 윤창재는 자신의 돈 10억을 가져오라며 백중식의 딸을 납치했다가 나중에는 200억 현상금이 걸린 김국호를 자기에게 데려오라는 요구를 내놓는다. 백중식은 딸만은 건드리지 말라고 하지만 윤창재는 결국 딸에게 몹쓸 짓을 한다. 백중식은 더 이상 갈 데가 없다. 좋으나 싫으나 그 역시 자신이 이 광란의 살인극에 이미 뛰어 들어와 있음을 알게 된다. 이미 10억원을 훔친 경찰 백중식은 또 다른 200억 게임에 들어올 것인가, 무엇보다 가면남은 과연 누구인가.
디즈니+ '노 웨이 아웃 : 더 룰렛' 스틸컷 / 사진출처. 한경DB
디즈니+ '노 웨이 아웃 : 더 룰렛' 스틸컷 / 사진출처. 한경DB
'노 웨이 아웃 : 더 룰렛’은 디즈니+의 신작 중 재미있는 것으로 추천할 만한 작품이다. 대단한 작품, 걸작까지는 아니다. 대본이 좋고 배우들 대다수의 연기가 좋았던, 거기에 더한 연출의 합이 좋았던 작품이다. OTT 드라마로서 이 정도면 수작이다. 더 이상 바라는 것은 욕심일 수 있다. 故이선균이 캐스팅됐던 작품이다. 조진웅이 대신했다. LG U+가 처음으로 컨텐츠 산업에 투자해서 만든 작품이다. 신생 제작사 '제리 굿 컴패니'가 만들었다. 이런 걸 두고 모두가 다 선방한 작품이라고들 한다.

주말 정주행용 드라마이다. 팝콘과 치킨, 맥주를 곁들이며 보면 좋은 드라마다. 단 맥주가 아주 차가워야 할 드라마이다. 어두운 이야기지만 오히려 어둡지 않은 분위기와 마음으로 봐야 한다. 그렇게들 보시기 바란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고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다. 때론 그 경계를 잘 지키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오동진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