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표범에 쫓기는 '톰슨가젤' 떠났다, 한국이 싫어서 [영화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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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영화 <한국이 싫어서>
인천의 집에서 서울 강남의 회사까지 출근 시간은 총 두 시간. 그것도 늘 배차시간이 정확지 않은 마을버스를 운 좋게 잡아타야만 가능한 일이다. 버스와 지하철을 반복해서 갈아타며 간신히 회사에 도착하면 이미 퇴근 직전의 몸 상태가 된다. 이렇게 저렇게 오전 시간이 지나가고 점심시간. 굳이 동행하고 싶지 않은 팀원들과 굳이 먹고 싶지 않은 동태탕으로 끼니를 때운다. 아메리카노로 입가심을 끝내면 오전 1부와 똑같은 오후 2부가 반복된다. 그리고 더더욱 지옥 같은 퇴근길…. 난 한국이 싫다.
결국 ‘계나’는 그렇게 싫다던 한국을 뒤로하고 마음에 품고 있던 나라, 뉴질랜드로 떠난다. 만원 버스, 지하철 대신 자전거로 출퇴근을 하고, 해가 지기 전에 일이 끝나면 친구들과 와인을 마시고, 1년 내내 온화한 날씨 속에서 바다를 거닐 수 있는 그곳에서 계나는 새로운 일상, 아니 새로운 운명과 마주한다.
장강명의 동명 소설, <한국이 싫어서>를 영화화한 작품 '한국이 싫어서'는 지긋지긋한 한국을 떠나 뉴질랜드로 향하는 계나(고아성)의 이야기를 그린다. 계나는 적당한 학벌과 적당한 가정, 그리고 적당한 직장을 가지고 있지만 그 무엇도 인상적이거나 “경쟁력이 있는” 레벨은 아니다.
계나는 자신의 인생을 톰슨가젤에 비유한다. 언젠가 표범에게 잡아 먹힐 톰슨가젤. 영화의 서두는 초원의 톰슨가젤만큼이나 유약하고 평범한 계나가 한국을 경멸할 수밖에 없는 상황들로 채워진다. 앞서 언급한 지극히 비인간적인 출퇴근 컨디션과 되도 않는 논리로 억지를 부리는 상사,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현실 자각 능력은 하나도 없는 남자친구, 억척같은 가족들과 부대끼며 살고 있는 그녀의 초라한 터전, 재개발 아파트 등 이 중 그 어떤 것에서도 소소한 행복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지극히 평범한 일상의 스케치지만 영화의 서두는 강력하게 보는 이를 빨아들인다. 왜냐하면 계나가 불행의 원천이라고 여기는 그녀의 일상은 우리 모두의 그것과 정확히 일치하기 때문이다. 일상은 곧 운명을 만든다. 따라서 지리멸렬한 일상은 지리멸렬한 운명을 의미하는 것이다.
더 암울한 사실은 ‘일상’이라는 덫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이다. 출퇴근으로 4시간을 버리지 않기 위해서는 서울에 집을 얻어야 하고, 그러려면 작은 희망이라도 담보했던 적금을 포기해야 한다. 그러고 나면 이 지옥에서 나갈 문은 완전히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래서 계나는 또다시 하루에 4시간을 길바닥에 버리는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우리와는 다르게) 계나는 빠르게 선택한다. 그 모든 것을 버리기로. 그녀는 빠르게 ‘헬조선’을 탈출하고 비교적 빠른 시간 안에 뉴질랜드 생활에 적응한다. 영화의 중반은 새로운 터전에 당도한 계나가 새로운 일상에 적응해가는 과정을 그린다. <한국이 싫어서>는 대한민국의 한 켠을 차지하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상황들로 전개된다. 그럼에도 안타까운 것은 정작 영화의 중추이자 본론인 한국을 떠난 이후의 이야기, 즉 뉴질랜드에서 계나가 조우하게 되는 캐릭터들과 그들과의 에피소드가 놀라울 정도로 단조롭다는 사실이다.
가령 계나처럼 한국이 싫어서 떠나온 유학생, 친절한 한국인 부부, 자유로운 영혼의 마오리 친구 등의 캐릭터들은 뉴질랜드가 아닌 어디서라도 만날 수 있는 전형적이고 흔한 캐릭터들이다. 이들과 일을 하고 파티를 벌이는 장면들 역시 사실상 한국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결국 이러한 예측 가능한 캐릭터들, 그리고 그들과의 예측 가능한 일상은 영화의 선택이 왜 ‘뉴질랜드’여야만 했는지 설득하지 못한다. 결론적으로 <한국이 싫어서>는 한국이 싫어서 떠난 자의 기행기이자, 현실에 도전하는 청년의 성장 영화다. 다만 이야기의 단조로움과 저예산 독립영화라는 현실적인 제약에서 비롯되었을 현지 풍광의 한계 등은 아쉬운 부분이다.
그럼에도 확실한 것은 이 영화가 ‘후련함’이라는 강력한 묘약을 선사한다는 사실이다. 일상의 선을 넘지 못하는 누군가에게, 혹은 현실의 덫에서 빠져나갈 궁리만 하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한국이 싫어서>는 후련하고도 설레는 탈피를 선도한다.
김효정 영화평론가·아르떼 객원기자
장강명의 동명 소설, <한국이 싫어서>를 영화화한 작품 '한국이 싫어서'는 지긋지긋한 한국을 떠나 뉴질랜드로 향하는 계나(고아성)의 이야기를 그린다. 계나는 적당한 학벌과 적당한 가정, 그리고 적당한 직장을 가지고 있지만 그 무엇도 인상적이거나 “경쟁력이 있는” 레벨은 아니다.
계나는 자신의 인생을 톰슨가젤에 비유한다. 언젠가 표범에게 잡아 먹힐 톰슨가젤. 영화의 서두는 초원의 톰슨가젤만큼이나 유약하고 평범한 계나가 한국을 경멸할 수밖에 없는 상황들로 채워진다. 앞서 언급한 지극히 비인간적인 출퇴근 컨디션과 되도 않는 논리로 억지를 부리는 상사,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현실 자각 능력은 하나도 없는 남자친구, 억척같은 가족들과 부대끼며 살고 있는 그녀의 초라한 터전, 재개발 아파트 등 이 중 그 어떤 것에서도 소소한 행복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지극히 평범한 일상의 스케치지만 영화의 서두는 강력하게 보는 이를 빨아들인다. 왜냐하면 계나가 불행의 원천이라고 여기는 그녀의 일상은 우리 모두의 그것과 정확히 일치하기 때문이다. 일상은 곧 운명을 만든다. 따라서 지리멸렬한 일상은 지리멸렬한 운명을 의미하는 것이다.
더 암울한 사실은 ‘일상’이라는 덫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이다. 출퇴근으로 4시간을 버리지 않기 위해서는 서울에 집을 얻어야 하고, 그러려면 작은 희망이라도 담보했던 적금을 포기해야 한다. 그러고 나면 이 지옥에서 나갈 문은 완전히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래서 계나는 또다시 하루에 4시간을 길바닥에 버리는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우리와는 다르게) 계나는 빠르게 선택한다. 그 모든 것을 버리기로. 그녀는 빠르게 ‘헬조선’을 탈출하고 비교적 빠른 시간 안에 뉴질랜드 생활에 적응한다. 영화의 중반은 새로운 터전에 당도한 계나가 새로운 일상에 적응해가는 과정을 그린다. <한국이 싫어서>는 대한민국의 한 켠을 차지하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상황들로 전개된다. 그럼에도 안타까운 것은 정작 영화의 중추이자 본론인 한국을 떠난 이후의 이야기, 즉 뉴질랜드에서 계나가 조우하게 되는 캐릭터들과 그들과의 에피소드가 놀라울 정도로 단조롭다는 사실이다.
가령 계나처럼 한국이 싫어서 떠나온 유학생, 친절한 한국인 부부, 자유로운 영혼의 마오리 친구 등의 캐릭터들은 뉴질랜드가 아닌 어디서라도 만날 수 있는 전형적이고 흔한 캐릭터들이다. 이들과 일을 하고 파티를 벌이는 장면들 역시 사실상 한국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결국 이러한 예측 가능한 캐릭터들, 그리고 그들과의 예측 가능한 일상은 영화의 선택이 왜 ‘뉴질랜드’여야만 했는지 설득하지 못한다. 결론적으로 <한국이 싫어서>는 한국이 싫어서 떠난 자의 기행기이자, 현실에 도전하는 청년의 성장 영화다. 다만 이야기의 단조로움과 저예산 독립영화라는 현실적인 제약에서 비롯되었을 현지 풍광의 한계 등은 아쉬운 부분이다.
그럼에도 확실한 것은 이 영화가 ‘후련함’이라는 강력한 묘약을 선사한다는 사실이다. 일상의 선을 넘지 못하는 누군가에게, 혹은 현실의 덫에서 빠져나갈 궁리만 하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한국이 싫어서>는 후련하고도 설레는 탈피를 선도한다.
김효정 영화평론가·아르떼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