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의동 백송'을 뒤로하고 길을 나오면 정면 골목으로 동양척식주식회사 관사가 보인다. 왼쪽으로 틀어 차가 다니는 큰 길로 나가려다 한적한 골목을 택했다. 아! 이곳은 한옥밀집지역 서촌이 아닌가. 가다가 막히고 또다시 연결되고 다시 막힐 듯 이어지는 골목의 생명력. 이 골목은 어릴 적 우리의 놀이터였다.

집이 좁아 골목에 나와 돗자리를 깔아 놓고 어른들은 둘러앉아 부채를 부쳤다. 나도 그 가장자리에 배를 깔고 누워 숙제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공놀이, 고무줄놀이, 딱지치기, 더러는 상을 펴고 밥도 먹었다. 외식이 없던 시절, 아버지는 우리에게 '외식이 별거냐? 집 밖에서 밥 먹으면 외식이지' 하며 돗자리를 깔았다. 어머니가 텃밭에서 뜯어온 상추에 밥을 넣고 고추장 얹어 쌈을 싸서 크게 한 입 먹으면 꿀맛이었다. 지금은 많은 가정에서 주말이면 맛집 순례하는 '외식'을 한다. 지금 생각해 보니 골목길 외식이 진짜 외식이었다. 남 눈치 볼 것 없고 메뉴 걱정 없는, 지금은 볼 수 없는 풍경. 이어지고 막힐 것 같지만 다시 시작되는 실타래 풀기와 같은 골목이 우리에게 많은 정서를 일깨운다. 아직도 서촌에는 골목이 참 많다.
서촌 골목길. 골목 저 끝에서 다시 이어진다 / 사진. © 한이수
서촌 골목길. 골목 저 끝에서 다시 이어진다 / 사진. © 한이수
골목에 사는 것은 사람만이 아니다. 새도 놀러 오라고 새집도 만들어 주었다. 사실 서촌의 골목길은 조선시대부터 있었던 길들로 볼 수 있다. 일제 강점기인 1912년에 제작된 서촌 끝 체부동 주변의 지적도를 경기대 이상구 교수, 시립대 양승우 교수가 컴퓨터에 일일이 입력했다. 보이지 않는 하천, 세세한 골목길 등이 나타났다. 1912년은 나라가 망한 뒤 고작 2년이 지난 후였기 때문에 그때의 자료는 조선시대의 것으로 볼 수 있다. 지적도를 입력해 얻은 자료와 지금의 골목과 대조해 보니 골목, 구조 등이 맞아떨어졌다. 그렇다면 이 길은 '조선의 골목길'이다. 체부동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이곳 통의동, 창성동, 효자동 주변 한옥 밀집지역도 조선시대부터 존재한 골목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조선의 골목길'이 개발 시대가 되면서 많이 훼손되었으나 띄엄띄엄 부분적으로라도 옛날부터 존재한 골목길이 남아 있을 것이다. 내가 걷는 이 길이 상투를 틀고 갓을 쓴, 두루마기 차림의 우리 할아버지들이 다닌 길이라 생각하니 낯선 길이 정겹게 느껴진다.

또한 이 길은 우리 형과 누나들이 데이트를 즐기던 밀회의 장소였다. 맘 놓고 연애하기도 어려웠던 시절의 일이다. 큰길을 가다가 두리번거려 사람이 보이지 않으면 형들은 잽싸게 누나들을 골목으로 밀어 넣고 서투른 사랑을 나누었다. 골목은 놀이터이고 외식의 장소였으며 사랑을 나누는 다목적 공간이었다. 이런 골목길을 순례하다 보면 참 감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다 밀어내고 아파트를 지었으면 어땠을까? 길 위에서 존재했던 모든 기억이 지우개로 지우듯 사라졌을 것이다. 우리는 기억상실자들처럼, 아무런 뿌리도 없이 현실에 둥둥 떠다니는 유령과 같은 존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역사는 책으로만 기록되는 것이 아니다. 나의 유년, 청년의 기록들이 내가 살고 지나던 곳곳에 기억으로 남아 있다.
김기찬, 《골목 안 풍경》 중에서
김기찬, 《골목 안 풍경》 중에서
서촌의 끝 사직터널이 뚫릴 무렵, 골목이 없어지는 것을 너무도 안타까워한 사람이 있었다. 《골목 안 풍경》의 사진작가 김기찬이다. 그의 집은 사직동이었는데 사직동과 행촌동을 연결하는 사직터널이 생기며 136미터의 터널이 생겼다. 1967년에 서울시장 김현옥에 의해 뚫린 서울 최초의 지하 터널이다. 이 터널로 사직동과 행촌동, 더 나아가 금화산, 연세대에 이르는 길이 생겨 무척 교통은 편리해졌지만 사직동 골목은 사라졌다. 3호선 경복궁역에서 사직터널 사이의 약 700미터 구간에 있던 산과 마을이 감쪽같이 자취를 감췄다. 100여 채의 집이 없어졌다. 집이 없어지는 것은 곧 골목길이 사라지는 것을 의미했다. 골목길이 없어지자 함께 뛰놀던 친구들의 모습이 기억에서 지워졌다. 유년의 실종이다. 그래서 김기찬은 유년의 기억을 더듬으며 중림동, 아현동, 만리동, 금호동의 골목을 다니며 셔터를 눌렀다. 그의 사진으로 인해 우리의 옛 기억이 참 많이도 복원되었다.

“골목 안은 가난해 보였지만 사람 사는 냄새와 온기가 가득 차 있었다. 고향을 잊었던 나에겐 마음속에 그리던 어릴 적 아름다운 고향을 되찾은 기분이었다.” (김기찬, 《골목 안 풍경》 중에서)

골목을 나와 길을 건너니 이상한 건물이 맞이한다. '계옴마루 총령경 세계 정교 발상지'라는 집이다. 인터넷을 뒤져 보니 이 종교를 만든 하정효는 1939년생으로 경남 진주에서 태어났다. 모친상을 당하고 어머니의 묘소에서 맨발 순례를 하다가 '천자지손사상'을 접하고 이 종교가 출범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런데 그는 특별히 한글을 사랑해서 교리가 한글로만 되어 있다. '뫄함뭐루'라는 고유 무술을 만들어 무술 동작을 보급하기도 하는, 어찌 보면 '착한 종교'이다.
'세계정교 발상지'라는 간판이 붙은 집. 한글을 사랑하는 종교다 / 사진. © 한이수
'세계정교 발상지'라는 간판이 붙은 집. 한글을 사랑하는 종교다 / 사진. © 한이수
그런데 집 옆 골목이 너무도 아름답다. 서촌에서 가장 아름다운 골목에 상을 준다면 바로 이곳에 주고 싶다. 전혀 멋스러울 수 없는 적산 가옥을 노란 원색으로 색을 입혔고 창틀은 옅은 붉은 색을 칠했다. 그런데 색이 튀지 않고 조화롭다. 원색의 페인트를 칠해 집이 눈에 들어오지만, 집 사이의 골목에는 아름다운 꽃들이 가득하다. 꽃은 대공원의 온실이 아닌 골목길에서 더욱 아름다워지는 모양이다. 꽃과 더불어 옛 기와와 구들장 뜯은 것을 버리지 않고 담장에 붙여 놓으니 더욱 멋스럽다. 골목의 어귀에 들풀을 심어 집 주변과 골목을 아름답게 꾸민 집주인을 만나보고 싶다.
[위] 수리하고 남은 기와로 골목 바깥을 꾸몄다 [아래] 구들장과 괴석, 화분이 아름다운 조형물이다 / 사진. © 한이수
[위] 수리하고 남은 기와로 골목 바깥을 꾸몄다 [아래] 구들장과 괴석, 화분이 아름다운 조형물이다 / 사진. © 한이수
골목길에 취해 가다 보니 '쌍홍문 터'가 나온다. 쌍홍문은 조선 14대 임금 선조가 문신 조원의 두 아들을 기리기 위한 정려문이다. 임진왜란 때 강화도로 피신을 가다가 왜군이 들이닥쳤다. 큰아들 희정이 어머니를 지키기 위해 맨손으로 칼을 제지하다가 죽고, 작은아들 희철이 왜군을 제압하고 극적으로 모친을 구했다. 자신은 굶어가며 모친을 봉양하였으나 끝내 왜군과 싸우다 생긴 상처와 굶주림으로 죽자 선조가 두 형제의 효심을 기리기 위해 두 개의 정려문을 내렸다. 쌍홍문 터의 유래다. 그래서 두 형제의 효심을 기려 동네 이름이 '효자동'이 된 것이다.
'쌍홍문 터' 표지석 / 사진. © 한이수
'쌍홍문 터' 표지석 / 사진. © 한이수
쌍홍문 터에서 대략 30여 미터 가서 오른쪽으로 들어서면 '신익희 가옥'에 이른다. 1930년대 지어진 도시형 한옥이다. ㄱ자형 사랑채와 ㄴ자형 안채가 만나 ㅁ자형 안마당을 이룬다. 신익희는 1954년 8월부터 1956년 5월까지 1년 9개월 동안 이 집에서 살았다. 3·1운동 후 상해로 망명했다가 임시정부 일행과 귀국한 신익희는 이집 저집 전전하다가 드디어 자신의 문패 달린 이 집으로 이사 왔다. 이곳으로 온 1954년은 6·25전쟁이 막 끝난 직후다. 1956년 5월 3일, 30만 명이 운집한 한강 백사장에서 민주당 대통령 후보 자격으로 연설을 했다. 이승만 독재에 맞서 싸워 정권을 되찾겠다고 기염을 토했다. 사상 최대의 인파가 모였다. 전쟁 후 변변히 사람들이 모일 장소가 없던 시절, 한강 백사장은 더없이 좋은 집회 장소였다.
'신익희 가옥' 내부 / 사진. © 한이수
'신익희 가옥' 내부 / 사진. © 한이수
1956년 5월 5일자 동아일보는 '사상 최대의 인파, 민주당 정견 발표회 한강 변서 대성황'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신익희의 선거 구호는 아주 간단했다.
1956년 대통령 후보 신익희의 연설을 듣기 위해 한강 백사장에 모인 인파
1956년 대통령 후보 신익희의 연설을 듣기 위해 한강 백사장에 모인 인파
"못 살겠다. 갈아보자!" 장면을 부통령 후보로 지목하여 유세를 하던 그는 그다음 날 호남지방으로 유세를 가던 중 열차 안에서 뇌일혈 및 심장마비로 급사했다. 각 지역을 다니며 피로가 누적된 상태였다. 나이는 63세, 지금은 늙는다는 축에도 끼일 수 없는 나이지만 그때 나이로는 연로했다. 과로가 극에 달했다. 서거 후 열흘이 지난 5월 15일 대통령 선거가 시작되었다. 조봉암 216만 표, 이승만 504만 표로 집계되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무효표가 185만 표나 나온 것이다.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은 열흘 전에 급서한 신익희 후보에게 던진 '추모 표'였다. 그만큼 민심은 신익희에게 쏠려 있었다. 이 선거 이후 이승만은 3대 대통령으로 올랐고 2위로 표를 많이 얻은 조봉암은 간첩 혐의로 형장의 이슬이 되었다. 이때 신익희가 당선되어 대통령이 되었더라면 역사는 어떻게 흘러갔을까?
[왼쪽] 제3대 대통령 선거 벽보 [오른쪽] 제3대 대통령 선거 득표수
[왼쪽] 제3대 대통령 선거 벽보 [오른쪽] 제3대 대통령 선거 득표수
해공 신익희 선생이 호남선 열차에서 서거하면서 세간에서는 가수 손인호가 부른 <비 내리는 호남선>이란 유행가가 널리 퍼졌다. 참고로 이 노래는 '비 내리는 호남선'이라는 가사로 시작하는 김수희의 <남행열차>와는 전혀 다른 노래다. 애초 이 노래는 해공 신익희 선생 서거 3개월 전 호남선을 배경으로 만든 노래이다. 박춘석 작곡에 손로원이 노랫말을 붙여 손인호가 부른 노래인데 신익희가 안타깝게 호남선 열차에서 서거하자 그를 추모하는 노래로 사용되면서 전국적으로 큰 유행을 탔다. 작곡가, 작사가, 가수가 한때 경찰에 연행되기도 하는 웃지 못할 촌극도 빚어졌다.

"목이 메인 이별가를 불러야 옳으냐/ 돌아서서 피눈물을 흘려야 옳으냐/ 사랑이란 이런가요 비 내리는 호남선에/ 헤어지던 그 인사가 야속도 하더란다/ 다시 못 올 그 날짜를 믿어야 옳으냐/ 속는 줄을 알면서도 속아야 옳으냐/ 죄도 많은 청춘이냐 비 내리는 호남선에/ 지나가는 열차마다 원수와 같더란다"

아마도 비 내리는 날 호남선을 타고 떠나는 야속한 연인을 생각하며 지은 노래로 보인다. 자신을 차버리고 떠난 연인이 얼마나 야속하길래 열차가 원수처럼 보일까. 우리의 형과 아버지들은 이런 노래를 부르며 골목길에서 사랑도 하고 노래도 부르며 살았다.

한이수 칼럼니스트

[♪ 손인호 '비 내리는 호남선' (채널. KBS 레전드 케이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