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추덕영 기자
일러스트=추덕영 기자
지난 11일 막을 내린 2024 파리올림픽에서 한국 대표팀은 역대급 성적을 거뒀지만 종목 간 양극화 현상도 뚜렷하게 나타났다. 한국이 딴 금메달 13개 가운데 ‘총·칼·활’로 대표되는 사격과 펜싱, 양궁에서 10개가 쏟아졌다. 1985년부터 40년간 현대자동차그룹으로부터 500억원이 넘는 투자를 받은 양궁은 금메달 5개를 싹쓸이했다. SK텔레콤이 20년 넘게 회장사를 맡고 있는 펜싱은 금메달 2개, 지난해까지 20년간 한화그룹이 후원한 사격에선 3개의 금메달이 나왔다.

반면 기업의 후원이 끊긴 종목들은 하락세를 이어갔다. 레슬링이 대표적이다. 역대 올림픽에서 36개의 메달(금 11)을 따내며 대표 효자 종목으로 불린 레슬링은 30년간 300억원에 달하는 지원을 했던 삼성이 떠난 뒤 몰락의 길을 걸었다. 2021년 열린 2020 도쿄올림픽에서 49년 만에 노메달에 그치더니 이번 파리올림픽에서 동메달조차 수확하지 못했다. 스포츠 종목 간의 이 같은 양극화는 각 체육협회의 주먹구구식 행정과 낡은 관행이 논란이 되면서 기업들이 하나둘 후원에서 손을 떼고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안세영 폭로로 드러난 체육협회 민낯

선수들은 무너지고 기업들은 떠나간다
28일 한국경제신문이 대한체육회 산하 64개 정회원 종목 단체의 회장사를 분석한 결과 최근 15년간 8개 기업이 10개 종목에서 손을 뗀 것으로 확인됐다. 과거 스포츠계 큰손으로 불린 삼성은 2012년 대한레슬링협회를 시작으로 2017년 대한승마협회, 2018년 대한빙상연맹의 회장사에서 차례로 물러났다. 한때 탁구, 배드민턴, 태권도 등 7개 아마추어 종목을 후원한 삼성이 회장사로 명맥을 유지하는 종목은 육상이 유일하다. 한솔그룹(대한테니스협회), 한진그룹(대한탁구협회), 두산그룹(대한철인3종협회) 등도 각 종목 회장사에서 물러났다.

기업들이 손을 떼면서 각 협회의 재정자립도는 최근 5년 새 더 악화했다. 지난해 대한체육회 산하 64개 정회원 종목 단체의 재정자립도는 평균 44.49%(2023년 기준)로 5년 전인 2018년(47.04%)보다 2.55%포인트 하락했다.

국고보조금이 없으면 사실상 문을 닫아야 하는 종목 단체도 태반이다. 재정자립도가 20%에 못 미치는 단체는 8개나 된다. 대한스쿼시연맹의 재정자립도는 12.72%. 자체 수입이 2억2444만원밖에 되지 않는다. 자체 수입 가운데 회장과 임원 등이 내는 기부금을 제외하면 재정자립도는 7.16%로 하락한다. 파리올림픽에 출전한 종목 중에선 체조의 상황이 심각하다. 대한체조협회의 재정자립도는 17.47%. 포스코이앤씨의 지원이 없었으면 재정자립도는 5.43%로 추락한다.

안세영과의 갈등으로 논란이 된 대한배드민턴협회의 재정자립도는 46.73%로 파리올림픽 출전 종목 가운데 10번째로 낮다. 총수익 171억원 가운데 자체 수입은 96억404만원이지만 전년도 이월금 28억4212만원과 공인료, 선수 등록비 및 참가비를 제외하면 협찬금은 43억4093만원뿐이다.

후원 의지 잃고 떠나는 기업

스포츠는 돈이다. 체육계에서는 “금메달 한 개 만드는 데 40억원이 든다”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대한양궁협회는 한국 스포츠계에서 가장 이상적인 모델로 꼽힌다. 현대차그룹이 40년째 회장사를 맡아 물심양면으로 지원하고 있다. 대한민국 양궁이 세계 최강자의 자리를 이어가면서 기업도 ‘국익에 기여하는 기업’이라는 이미지를 얻었다.

하지만 모든 종목이 양궁처럼 지원받을 수 있는 건 아니다. 정부가 대기업에 체육 단체 지원을 강요할 수 있는 시대도 지났다. 특히 국정 농단 사태가 터진 뒤엔 삼성을 시작으로 국내 굵직한 대기업이 하나둘씩 체육 단체 후원에서 발을 빼는 분위기가 조성됐다. 그 결과 2008 베이징올림픽 이후 최근 15년간 8개 대기업이 10개 체육 단체의 회장사에서 물러났다. 국정 농단 사태 이후로 시기를 좁히면 5개 대기업이 후원을 끊었다.

체육계 내부에서는 “체육협회에서 기업을 떠나보냈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크다. 자생력을 갖추려고 노력하지 않는 방만하고 허술한 행정과 자신들의 이권을 지키기 위한 체육인 중심의 폐쇄적인 구조가 기업들의 후원 의지를 꺾었다는 것이다.

오랜 파벌 다툼과 수시로 터져 나오는 사건·사고로 악명 높은 빙상이 대표적이다. 한 대기업 스포츠 마케팅 관계자는 “기껏 거액을 후원했는데 나쁜 뉴스만 나온다면 보람도, 효과도 없지 않나”고 반문했다. 각 협회의 후진적 분위기로 기업이 떠나고, 외부 전문가가 수혈되지 않으면서 협회 운영은 더욱 폐쇄적이고 방만해지는 악순환이 이어지는 셈이다.

체육계 안팎에선 “행정 전문성 강화” 목소리

체육계 관계자에 따르면 협회 임원에는 다양한 유·무형의 이권이 따라온다. 용품사, 기업 등과 자연스럽게 네트워크를 형성할 수 있고 국가대표 선발, 심판 선발 등에 참여하는 권한을 갖게 된다. 협회 부회장은 대한체육회 이사로서 체육계 주요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다. 지역별, 권역별 조직을 보유한 종목 협회는 정치권에서도 중요한 관리 대상이다. 한 올림픽 종목 협회 관계자는 “외부 전문가 대신 체육인들이 요직을 차지하고, 종목별로 파벌이 끊이지 않는 이유”라고 분석했다.

체육인들로 인한 협회의 후진적 운영은 곳곳에서 드러난다. 대한역도연맹의 감사보고서에 따르면 연맹이 2019년부터 2022년까지 치른 일곱 번의 국가대표 선수 선발 가운데 홈페이지를 통해 선발 기준을 공개한 것은 단 한 번에 불과했다. 선발 이전 사전 공고, 선발 결과 공고도 이뤄지지 않았다. 선발 일정·기준 등을 선발 예정일 2개월 전에, 선발 결과는 즉시 공고해야 하는 내부 규정을 무시했다. 대한태권도협회는 2022년 신입직원 공채에서 응시 자격 공통·우대사항에 포함되지 않는 학력과 공인어학 성적을 서류 평가에서 각각 45%, 10%로 평가한 사실이 대한체육회 감사에서 드러났다.

체육계 안팎에서는 협회의 행정 전문성이 강화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박성희 한국외국어대 글로벌스포츠산업학과 교수는 “미국의 종목 협회들은 최고재무책임자와 행정 전문가를 둔다”며 “당장의 기부금으로만 운영되는 조직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자생력을 갖는 조직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조수영/서재원 기자 delinew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