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 중심 사회에 반기 든 나혜석 꽃은 지더라도 또 새로운 봄이 올 터이지”

“구미 만유기 1년 8개월간의 나의 생활은 이러하였다. 단발을 하고 양복을 입고 빵이나 차를 먹고 침대에서 자고 스케치 박스를 들고 연구소(아카데미)를 다니고, 책상에서 프랑스말 단자(單子, 단어)를 외우고, 때로는 사랑의 꿈도 꾸어 보고 장차 그림 대가(大家)가 될 공상도 해 보았다. 흥 나면 춤도 추어 보고 시간 있으면 연극장에도 갔다. 왕 전하와 각국 대신의 연회석상에도 참가해 보고 혁명가도 찾아보고, 여자 참정권론자도 만나 보았다. 프랑스 가정의 가족도 되어 보았다. 그 기분은 여성이요, 학생이요, 처녀로서이었다. 실상 조선 여성으로는 누리지 못할 경제상으로나 기분상 아무 장애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나혜석, 아아 자유의 파리가 그리워,『삼천리』, 1932. 1.)

100여 년 전, 짧은 단발머리로 거리를 누비며 파리의 자유를 만끽하던 조선 여자 나혜석의 당찬 모습이 떠올라 절로 미소가 지어지지 않나요?

▶[나혜석 편 ①] 나혜석의 자화상, 한국 최초 여성화가의 초상에 담긴 근대의 흔적들
▶[나혜석 편 ②] 염상섭은 '나혜석의 연애와 결혼'으로 동아일보에 소설을 썼다

나혜석이 펠리시앙 샬레의 집에 머물 때 찍은 사진. 뒷줄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샬레의 큰딸 쟈클린, 샬레의 부인 잔느, 나혜석, 둘째 딸 엘렌, 샬레, 독립운동가 서영해, 샬레의 아들 장, 미상, 김우영 / 사진출처. 수원시립미술관

파리 체류 시절 석 달 정도 묵었던 샬레의 집 앞에서 따스한 햇볕을 받으며 찍은 사진 속 그녀는 문득 역사 속에서 걸어 나와 우리 앞에 마주 섭니다. 그렇습니다. 이 땅에는 우리만 살았던 게 아니지요. 사람들의 사연이 겹겹이 쌓이면서 시간이 흘러 역사가 되었던 겁니다.

나혜석은 왜 파리에 갔을까요? 마침 남편 김우영이 안둥현 부영사 임기가 끝나고 일본 외무성에서 벽지 근무자에게 제공하는 구미 시찰 여행의 기회를 얻게 되었던 겁니다. 시베리아 철도로 러시아를 횡단하여 독일,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등을 돈 뒤 미국을 거쳐 귀국하는 여정이었습니다. 사생을 위해 여행하기를 좋아했던 데다가 화풍 변화를 갈망하던 화가에게 1927년부터 1929년까지 21개월에 걸친 세계 여행은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나혜석은 8개월여 파리에 체재하면서 아카데미 랑송에서 야수파 화가 비시에르(1888-1964)의 지도를 받기도 하고 여행하면서 많은 미술관과 박물관 등을 방문하기도 합니다. 나혜석의 세계 여행은 흔히 파리에서 있었던 최린과의 염문으로 더 유명해서, 그 여행이 나혜석의 회화에 큰 영향을 끼친 점은 잘 알려져있지 않습니다.

일본이라는 창을 통해 서양화를 배운 나혜석에게 예술의 본고장 파리에서 지낸 기간은 강렬한 예술적 자극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나혜석의 아카데믹한 화풍은 야수파적, 표현주의적으로 바뀌게 됩니다. 1편에서 소개한 <자화상>(1928) 외에 <스페인 국경>(1928), <무희>(1927-28) 등이 이때 그려진 작품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제5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특선을 했던 <천후궁>(1926)과 비교할 때 형태의 입체감보다는 평면성이 두드러집니다. 나혜석의 회화와 양식 변화에 대해서는 다음 편에서 더 다루어 보겠습니다.

나혜석, <천후궁>, 1926. 나혜석이 중국 안둥현에 거주하면서 근방의 유적지 천후궁을 그린 작품. 본전을 원경으로, 중문을 중경으로, 정문을 근경으로 한 구도로 아카데믹한 데생력을 보여준다. / 사진출처. 조선미술전람회도록

나혜석, <스페인 국경>, 1928년 경. 목판에 유채, 23.5×33cm / 이미지출처. 금성문화재단

나혜석은 그림뿐만 아니라 여행기나 평론, 수필 형식으로 당시 조선 여성은 거의 누려볼 수 없었던 세계 여행의 경험을 공유하기도 했습니다. 1932~1935년까지 월간『삼천리』에 「구미유기」라는 세계 일주 기행문을 연재합니다. 서양의 미술 사조 및 미술계 소개, 미술 작품에 대한 감상 등 미술 관련 글 외에도 외국 여성과 한국 여성의 사회적 지위 비교, 영국 여성 참정권 운동가 인터뷰 등 페미니스트로서의 관점을 드러내는 글도 여러 편 썼습니다.

인사동에 있는 조계사 뒤편으로 수송공원이라는 자그마한 녹지가 있습니다. 주변의 건물에 폭 둘러싸여 있어 이런 곳이 있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은 곳입니다. 공원이라기보다 표석원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여러 개의 표지석, 동상, 기념탑 등이 줄줄이 들어서서 일제 강점기를 전후하여 치열한 역사의 현장이었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보성학교(1906), 숙명여학교(1906) 등 신교육의 전당들이 자리 잡았던 터전이고, 대한제국 말기의 항일 민족 언론 대한매일신보(1904)의 사옥 터가 있던 곳입니다. 당시 보성학교 구내에 있던 인쇄소 보성사는 1919년 3·1운동 당시 기미독립선언서와 조선독립신문을 비밀리에 찍어낸 역사적인 장소입니다. 1999년 3·1운동 80주년을 맞아 세워진 기념비에는 보성사와 보성학교 정문이 양각되어 있고 독립선언서와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이 음각되어 있습니다.

수송공원 内의 3·1운동 80주년 기념비 중 보성학교, 보성사 부조 부분 / 사진. ⓒ최은규

그 이름 중에 최린(1878-1958)이 있습니다. 한때 독립운동가로서, 민족대표로서 찬란했던 최린은 현재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역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념탑 끄트머리에 희미한 글씨로 남아 있는 그의 이름은 같은 장소에 독립운동가로 우뚝 서 있는 옥파 이종일(1858-1925) 선생의 동상과 비교되어 더욱 초라해 보입니다.

남편 김우영이 베를린에서 법학 공부를 하는 동안 나혜석은 파리에서 최린을 만나 불륜에 빠지게 됩니다. 결국 이 일이 주원인이 되어 나혜석은 귀국 후 1930년 11월에 이혼을 합니다. 이혼 후에도 나혜석은 작품 제작이나 글쓰기 등 사회적 활동을 지속하면서 닥쳐온 역경을 뚫고 나가고자 노력합니다. 거의 빈손으로 이혼한 경제 상황도 한몫했습니다. 일정한 거처도 수입도 없는 불안정한 생활을 타개하기 위해 금강산에 머물면서 그림을 그리기도 했으나 숙소에 불이 나서 작품 30~40점 중에 10여 점밖에 건지지 못하는 불행도 설상가상으로 찾아왔습니다. 그때의 충격으로 건강도 나빠지게 됩니다.

1편에서 살펴본 정동예배당 건너편에는 경성지방법원이 있습니다. 나혜석은 1934년 9월 경성지방법원에 최린을 피고로 하는 정조유린죄 위자료 청구 소송을 제기합니다.

1995년까지 대법원 청사였던 이곳은 현재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조선 말기 정동 지역이 외래문화의 유입지 역할을 하면서 이곳도 역사의 풍파를 비껴가지는 못했는데요. 현 서울시립미술관과 서울시청 별관이 있는 곳은 원래 1886년부터 1891년까지 최초의 근대학교인 육영공원이 있었고 그 후 독일영사관이 자리를 잡습니다. 1895년에는 을미개혁으로 근대적 재판제도가 도입되면서 한성재판소(1895-1907)가 문을 열고 현 고등법원에 해당하는 평리원(1899-1907)이 1902년 이후 이 지역으로 옮겨 옵니다. 1928년 일제강점기에는 경성재판소 건물이 세워지면서 경성지방법원과 함께 고등법원, 복심법원(당시 지방법원과 고등법원 사이에 있던 재판소)이 여기로 모이게 됩니다.

현 서울시립미술관 건물은 파사드(facade) 보존 설계 방식을 적용한 사례입니다. 정면 벽체와 현관부는 보존하고 뒤쪽에 3층 현대식 건물을 신축했습니다. 경성재판소 건립 당시 총독으로 재 부임한 사이토의 필체로 보이는 ‘정초 소화이년(1927) 십일월 조선총독 자작 사이토 마코토(定礎昭和二年十一月朝鮮總督子爵齋藤實)’라 기록된 정초석은 지금도 건물 측면에 남아 있습니다.

조각품이 놓여 있는 정원에는 산책과 담소로 잠시 여유를 즐기는 사람들이 평화로워 보이고 아치형 옛 현관을 통해 건물로 들어서면 현대식 미술관에서 문화를 향유하는 사람들이 가득합니다. 100여년간 법원으로 사용되면서 수많은 사람들의 한과 원망이 쌓였던 곳임을 이제 기억하기는 어렵습니다.

나혜석도 그런 수많은 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소송은 합의로 마무리되어 실제 재판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나혜석은 자신의 이혼에 최린이 도의적으로 책임지는 모습을 보고자 했을 겁니다. 소송을 내기 바로 직전에는 잡지 『삼천리』 8, 9월호에 「이혼고백서」를 발표합니다.

여기에서 나혜석은 자신의 연애, 결혼, 이혼에 이르는 과정을 소상히 설명하고 조선 사회의 차별적 남녀관계를 비판합니다.

“조선 남성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 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 합니다.”(나혜석, 이혼고백서,『삼천리』, 1934. 9)

남성과 여성에게 다르게 적용되는 전통 관습, 여성에게만 순결을 요구하는 사회적 허위의식 등 금기를 깨는 여성주의적 글쓰기에 대해 세간의 여론은 분분했는데, 비난과 선정적 호기심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사회적 불명예를 각오하고 자기 행동을 고백하는 일을 용기로 보는 사람들은 없었습니다.

“나는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나이다. 죽는 일은 쉽사외다. 한 번 결심만 하면 뒤는 극락이외다. 그러나 내 사명이 무엇이 있는 것 같사외다. 없는 길을 찾는 것이 내 힘이요 없는 희망을 만드는 것이 내 힘이었나이다.”(나혜석, 이혼고백서,『삼천리』, 1934. 9)

나혜석은 하고자 하는 일을 밀고 나가는 용기 있는 성격으로 주체적인 삶을 사는 근대적 인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건을 고려하지 않는 고집으로 상황을 악화시키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이혼고백서」를 쓰고 최린을 상대로 소송을 했던 일은 전통 사회의 불공정에 대한 자기 나름의 투쟁 방식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여러 언론매체로부터 투고를 거절당하고 1935년 경성의 진고개 조선관에서 열린 소품전은 혹평과 함께 미술계의 외면을 받았습니다. 사회적으로 매장된 여인에게 남은 것은 고독과 빈곤뿐이었습니다.

“꽃은 지더라도 또 새로운 봄이 올 터이지. 그것이 기다리는 불가사의가 아니라고 누가 말을 할까. 그날을 기다린다. 그날을 기다린다.”(나혜석, 독신 여성의 정조론, 『삼천리』, 1935. 10)

최은규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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