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도널드 트럼프를 다룬 영화 '어프렌티스' 스틸. /누리픽쳐스 제공
젊은 도널드 트럼프를 다룬 영화 '어프렌티스' 스틸. /누리픽쳐스 제공
오는 11월 미국 대선을 앞두고 극장가에 흥미로운 영화 한 편이 걸린다. 대선주자인 도널드 트럼프(78) 전 미국 대통령을 다룬 ‘어프렌티스’(The Apprentice)다. 얼핏 먼 나라 이야기 같지만, 관람 열기가 적잖을 것이란 기대감이 극장가에서 나온다. 트럼프의 재집권 여부가 경제, 안보 등 굵직한 국가 정책 방향은 물론 금리나 집값 같은 민감한 이슈에도 영향을 줄 수 있어서다. 지금의 트럼프를 만든 ‘젊은 사업가 트럼프’의 이야기에 관심이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29일 영화배급사 누리픽쳐스에 따르면 ‘어프렌티스’는 오는 10월 23일 국내 개봉한다. 그런데 한국에서 개봉을 확정 지은 이 영화가 정작 미국 개봉은 감감무소식이다. 도대체 어떤 문제적 감독이 만든 민감한 영화길래, 미국 대신 한국에 먼저 상륙하게 되는 걸까.
트럼프 망신주고, 칸에서 호평받은 영화, 美보다 한국서 먼저 개봉
‘현실판 파우스트’ 젊은 사업가, 어둠에 물들다

영화는 뉴욕 부동산 거물의 아들로 태어나 세계적인 부동산 재벌로 성장하고 미국 대통령까지 오른 트럼프의 젊은 시절을 보여준다. 이렇게만 보면 할리우드에서 자주 보이는 입지전적 영웅 서사 같지만, 실상은 트럼프를 고발하는 폭로에 가깝다는 게 영화의 반전 매력이다. 온갖 불법과 협박, 사기, 선동을 일삼아 ‘악마의 변호사’라 불리던 미국의 법조인 로이 콘을 스승으로 삼은 트럼프가 성공을 거듭할수록 어둠에 물드는 과정을 그렸기 때문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 /AFP, 연합
도널드 트럼프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 /AFP, 연합
마블 ‘어벤져스’ 시리즈의 윈터 솔져로 유명한 세바스찬 스탠이 연기한 영화 속 트럼프는 “도널드는 부끄러움이 없다(Donald has no shame)”는 첫 아내 이바나의 한 마디로 설명된다. 트럼프는 돈을 벌수록 가족 등 주변 사람을 무시하는 건방진 인물이 된다. 몰염치하고 비정한데다 때때로 비겁할 때도 있다. 살을 빼려 마약류인 암페타민을 복용하고 모발 이식까지 받는 등 치부까지 드러난다. 외모를 비하한 아내 이바나에게 달려들어 원치 않는 성관계를 맺는 장면은 충격적인 대목이다.

칸에선 8분 기립박수, 지지자들은 “속았다”

영화는 지난 5월 열린 제77회 칸 국제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됐고, 상영 직후 무려 8분의 기립박수를 받았다. 트럼프가 영화 등 해외 예술인들에게 밉상인 점도 있지만, 그만큼 영화의 화제성도 충분하다는 뜻이었다. 문제는 다시 한번 미국 대통령의 꿈을 꾸고 있던 트럼프가 영화에 격노했다는 것. 트럼프 측은 영화가 공개된 후 “이 쓰레기(영화)는 거짓말을 선정적으로 다룬 허구”라면서 노골적인 불쾌감을 드러냈다.

영화에 투자한 트럼프 지지자들도 경악했다. 트럼프를 긍정적으로 그린 영화라고 생각해 투자했다가 낭패를 봤기 때문. ‘어프렌티스’란 제목이 젊은 사회 초년생이 트럼프 회사의 고연봉 직원 채용을 걸고 벌이는 서바이벌로, 2004년부터 10여년 간 인기를 끌었던 동명의 방송 제목과 같단 점에서 충격은 더욱 컸다.

방송에 직접 출연한 트럼프는 “당신은 해고야(You're Fired)”라는 유행어로 인기를 끌었고, 1990년대 실패하고 나이 든 사업가라는 이미지를 만회했다. 트럼프 지지자들이 방송 프로그램처럼 영화가 대선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게임 체인저’로 기대했던 이유다.
지난 5월 프랑스 칸에서 열린 칸국제영화제에서 영화 ‘어프렌티스’ 감독과 배우 등이 시사회에 참석한 모습. /AFP, 연합뉴스
지난 5월 프랑스 칸에서 열린 칸국제영화제에서 영화 ‘어프렌티스’ 감독과 배우 등이 시사회에 참석한 모습. /AFP, 연합뉴스
미국 연예매체 버라이어티에 따르면 트럼프 선거캠프에 거액을 기부한 사업가인 댄 스나이더는 영화 내용을 알게 된 후 분노하며 개봉을 막으려고 시도했다. 미국의 영화배급사들이 작품에 눈길을 주지 않는 이유다. 영화가 개봉하는 순간 소송전에 휘말릴 수 있어서다.

이란 자극한 아바시, 트럼프도 긁었다

영화를 연출한 아바시 감독은 크게 개의치 않는 모습이다. 아바시 감독은 지난 5월 칸 영화제 기자회견에 나서 “모두가 트럼프가 제기한 소송을 말하지만, 그의 승률이 얼마인진 얘기하지 않는다”며 태연하게 답하기도 했다. 아바시 감독이 비난에 익숙한 영향이다. 제75회 칸 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되고 여우주연상까지 받은 아바시 감독의 ‘성스러운 거미’는 이란의 이슬람 성지에서 발생한 연쇄 살인을 다루면서 이란 정부의 탄압을 받기도 했다.

정치인을 다뤄 논란거리가 된 영화는 한국에서도 종종 눈에 띈다. 올해 1월 김대중 전 대통령을 다룬 ‘길위에 김대중’을 시작으로 2월엔 이승만 전 대통령을 조명한 ‘건국전쟁’이 개봉해 117만 명의 관객을 끌어모았다. 지난 5월엔 노무현 전 대통령을 그리워하는 목소리를 담은 ‘노무현과 바보들: 못다한 이야기’가, 지난달엔 뮤지컬 공연실황 영화인 ‘박정희: 경제대국을 꿈꾼 남자’가 개봉해 눈길을 끌었다.

유승목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