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장 칼럼] 산으로 가는 전기차 화재 대책
인천 청라 아파트 주차장 화재로 시작된 ‘전기차 포비아’의 기세가 여전하다. 한 중고차 거래 사이트에선 불이 난 차종(메르세데스벤츠 EQE350+)의 2024년식 모델이 7000만원대에 나와 있다. 신차 가격이 1억1000만원인 점을 감안하면 폭락 수준이다.

한 달이 지났는데도 전기차 포비아가 잠잠해지지 않은 데는 제조·판매사인 메르세데스벤츠의 책임이 크다. 이 회사는 그동안 자사 전기차 배터리를 CATL로부터 공급받고 있다고 밝혀왔다. 독일과 미국의 회사 홈페이지에도 배터리 섹션에 CATL만 소개하고 있다. CATL은 전기차 배터리 부문에서 점유율 세계 1위 회사다.

신뢰 잃은 벤츠코리아

이번 화재로 아파트 5개 동, 480가구의 전기 공급이 끊겼다. 옆에 주차된 87대의 차량이 전소됐다. 783대의 차량이 연기에 검게 그을렸다. 이런 사고에도 벤츠코리아는 배터리 제조사를 공개하지 않았다. 화재가 발생한 뒤 2주일이 지나고 정부가 차관급 대책회의를 연 지난 13일에서야 벤츠코리아는 중국의 파라시스라는 회사가 생산한 배터리가 들어 있다고 밝혔다. 이번 사고와 상관없는 현대자동차, 기아, BMW코리아 등이 자사 배터리 제조사를 자발적으로 공개한 뒤였다.

벤츠코리아는 아파트 단지를 찾아 45억원의 복구 지원금을 냈다. 하지만 이 금액은 벤츠 차주가 물어야 할 추정 금액의 절반도 되지 않는다. 이마저도 벤츠코리아는 행여 법적인 문제로 비화될까 ‘인도적 지원’이라는 단서를 붙였다.

두 번째 책임은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에 있다. 정부는 여론을 의식해 비현실적인 대책을 마구 쏟아냈다. 해양수산부는 사고 1주일 만인 8일 전기차를 배에 실을 때 배터리 충전을 50% 미만으로 제한하는 내용의 전기차 해상운송 안전대책을 발표했다. 이후 선착장에선 배터리 충전량을 절반 아래로 떨어뜨리기 위해 주변을 뱅뱅 도는 전기차들이 눈에 띄었다고 한다.

정부의 포퓰리즘 대책도 책임

서울시는 한 발 더 나아갔다. 서울시는 전기차 충전율을 90% 아래로 낮춰야 아파트 지하주차장 출입을 허용하는 내용의 ‘공동주택 관리규약 준칙’을 마련한다고 발표했다.

해수부와 서울시가 내놓은 ‘안전 충전율’ 기준은 왜 이렇게 큰 차이가 있을까. 과학적 근거가 없어서다. 국내 전기차 제조사들은 “충전율에 제한을 두는 이유는 화재 위험이 아니라 배터리 수명 때문”이라고 반복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지하주차장 출입을 금지하는 것도 과학적이지 않다고 한다. 지난 5월 전북 군산의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전기차 화재가 발생했는데 스프링클러가 작동해 45분 만에 진화됐고, 주변 차량으로 불이 옮겨붙지도 않았다. 문제는 지하주차장이 아니라 스프링클러 작동 여부라는 얘기다.

그런데도 서울시는 전기차주를 ‘민폐인’으로 만들고 불안을 증폭시키고 있다. 그사이 여러 아파트 단지에 ‘전기차 출입금지’ 공고가 붙고, 전기차주들은 아파트 단지에 없는 지상 주차장으로 내몰리고 있다. 보조금까지 지급하면서 전기차 구매를 독려해온 정부와 지자체가 내건 정책들이다. 국무총리실이 주관하는 범정부 대책은 다음달 나온다. 이 대책에는 국민 안전은 물론 한국 전기차산업의 성장을 도울 수 있는 내용이 담기길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