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 성장동력을 찾기 위해 두산그룹이 준비해온 ‘새판 짜기’가 틀어졌다. 구조 개편의 핵심인 두산밥캣과 두산로보틱스 합병에 대해 이복현 금융감독원장과 일부 소액주주가 “최대주주에 일방적으로 유리하다”고 몰아붙인 여파로 29일 합병 계획을 철회해서다. 현행법에 따라 합병 비율을 산정하는 등 불법 소지가 없는 데다 주주총회를 통해 결정해야 할 합병 여부를 사실상 금융당국이 ‘힘’으로 가로막았다는 점에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날개 꺾인 두산 사업 재편

금감원 압박에 '백기'…M&A 어려워진 두산밥캣 '성장 플랜' 차질
두산이 그룹 사업 재편 방안을 내놓은 건 지난달 11일이다. 클린에너지, 스마트머신, 첨단 소재를 3대 축으로 계열사 역할을 재편하는 내용이었다. 핵심은 스마트머신이다. 성장성이 큰 로봇사업을 강화하기 위해 지난해 영업이익 1조3899억원을 올린 그룹 ‘캐시카우’ 밥캣을 적자기업인 로보틱스와 합병하기로 했다. 법이 정한 합병 비율(밥캣 1주에 로보틱스 0.6주)대로 합병하면 결과적으로 오너 일가가 지배하는 지주사인 ㈜두산의 밥캣 지배력이 높아진다.

금감원이 문제 삼은 게 이 대목이다. 이 원장은 “시가 기준으로 기업가치를 산정했더라도 현행법상 일부 할증·할인을 할 수 있다”며 “합병신고서에 대해 무제한 정정요구를 할 수 있다”고 했다. 금감원이 계속 정정요구를 하면 두산은 예정된 날짜에 주총을 열 수 없어 사실상 합병이 무산된다. 두산이 합병을 포기한 이유다.

두 회사는 대표이사 명의의 주주서한을 통해 “사업 구조 개편이 긍정적일 것으로 예상돼도 주주와 시장의 충분한 지지를 얻지 못하면 추진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고 철회 이유를 설명했다.

산업계에선 “인수합병(M&A)을 하거나 사업을 재편하려면 일일이 금감원 허락을 받으라는 얘기냐”고 하소연한다. 금감원이 각종 규제권으로 월권행위를 했다는 얘기다.

○밥캣, M&A 어려워져

합병 무산으로 밥캣의 ‘성장판’이 닫힐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밥캣은 북미에서 매출의 70%를 올리는데, 현지 건설장비 수요가 지난해 ‘피크’를 찍고 판매량이 떨어지고 있다. 신흥 시장에서는 중국 기업을 필두로 가격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다.

밥캣은 이런 문제를 인공지능(AI)과 모션(움직임) 제어, 비전 인식 등 스마트머신 기업 인수로 돌파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합병이 무산돼 ㈜두산-로보틱스-밥캣 구조가 되면서 이런 기업들을 인수하는 건 사실상 어려워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지주회사의 손자기업은 피인수 기업 지분을 100% 인수해야 한다’는 공정거래법 규제를 적용받기 때문이다. 로보틱스와 합병하면 피인수기업의 최대주주 지분만 인수해도 경영권을 확보할 수 있지만, 앞으론 100% 인수해야 하는 만큼 운신의 폭이 좁아졌다는 의미다. 로보틱스가 보유한 로봇기술을 활용하려는 계획도 무산됐다.

○에너빌리티·밥캣 분할은 진행

두산은 두산에너빌리티에서 밥캣을 떼내 로보틱스 자회사로 두는 방안은 예정대로 추진하기로 했다. 에너빌리티에 추가 투자 여력을 안겨주기 위해서다. 에너빌리티가 지분 46.0%를 가진 밥캣을 로보틱스 산하로 넘기면 밥캣이 금융권 등에서 빌린 차입금 7000억원이 사라져 추가 대출을 받을 수 있다.

에너빌리티는 최근 체코 원전 2기를 수주한 데 이어 폴란드 아랍에미리트(UAE) 사우디아라비아 영국 스웨덴 네덜란드 등에서 5년간 8기 안팎의 신규 수주를 기대하고 있다. 이 경우 상당한 자금이 필요하다. 에너빌리티가 두산큐벡스·분당리츠 등 비(非)핵심 자산을 지주사 ㈜두산에 매각해 현금 5000억원을 확보하기로 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박상현 두산에너빌리티 대표는 주주서한을 통해 “계획된 수주 규모가 원자력 주기기 제작 용량을 크게 웃돌고 있다”며 “(사업구조 재편이 완료되면) 투자 여력이 생겨 생산설비 증설에 투입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형규/김익환 기자 k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