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억원 주겠다"…집안 재산 털어 일본인에게 건넨 이유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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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우리 문화재 지킨
간송 전형필의 삶
대구에서 만나는
그의 최고 수집품들
간송 전형필의 삶
대구에서 만나는
그의 최고 수집품들
일제 강점기인 1935년, 경성(지금의 서울)에서 일본인에게 거액을 건넨 20대 ‘금수저 청년’이 있었습니다. 골동품을 사면서 청년이 낸 돈은 2만원. 당시 서울 시내 기와집 20채를 살 수 있는 돈이었습니다. 수도권 아파트 중위가격(5억~6억원)을 기준으로 지금 가치 100억원 이상, 서울 시내 아파트 중위가격(9억~10억원)에 대입하면 200억원에 육박하는 어마어마한 액수였지요.
그런데 이 소식이 퍼지자 가장 놀라고 안타까워한 건 일본인 부자들이었습니다. “살 사람이 없어서 가격을 내리면 그때 사려고 했는데…. 최고의 명품이 다른 사람 손에 넘어가다니 원통하다.” 탄식하며 앓아누운 일본인 수집가도 있었다고 합니다. 급기야 일본인 부자 한 명은, 청년을 찾아가 “당신이 산값의 두 배를 줄 테니 물건을 넘기라”고 제안했습니다. 청년 입장에서는 불과 며칠 새 떼돈을 벌 기회. 하지만 청년은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우리 문화유산을 이 땅에 남겨야 한다’는 소신 때문이었습니다.
문화재 애호가들에게 이미 잘 알려진 이 이야기는, 조선의 전설적인 문화재 수집가이자 보성 중고등학교 동성학원 설립자인 간송 전형필(1906~1962)이 고려청자 국보인 청자상감운학문매병을 살 때의 일화입니다. 간송은 이렇게 수십 년에 걸쳐 한국의 명품 문화유산들을 수집하며 수많은 국가적 보물들을 우리 땅에 남겼습니다. 그리고 그가 남긴 간송미술관은 한국의 아름다움을 널리 알리는 역할을 하고 있지요. 9월 3일 개막하는 대구간송미술관 개관전을 계기로 삼아서, 이번 전시에 나온 주요 유물들과 담백하게 정리한 간송의 삶 이야기를 함께 풀어 봅니다.
전설의 수집가, 간송
간송은 1906년 경성 최고의 부잣집 중 한 곳에서 늦둥이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말하자면 재벌 집 막내아들입니다. 그의 집안은 간송의 증조할아버지 때 지금의 종로 4가(배오개)에서 장사를 시작한 이래 종로의 상권을 휘어잡으며 엄청난 부자 가문이 됐습니다. 집안의 땅이 지금의 왕십리, 답십리, 청량리, 송파 가락동, 창동 등 서울 각지는 물론 황해도, 공주, 서산 등 전국에 퍼져있었다고 합니다.
간송이 스물세 살이던 1929년 부친이 별세하면서 그는 이 막대한 재산의 유일한 상속자가 됩니다. 1919년 작은아버지가 재산을 물려받을 아들 없이 세상을 떠났고, 같은 해 형이 스물여덟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등졌기 때문입니다. 당시 물려받은 재산의 규모는 논만 해도 총 800만평 이상. 여기서 나온 쌀을 팔아 받을 수 있는 순수익은 한 해에 15만원에 달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총자산 규모는 수천억 원에 가만히 앉아 있어도 일 년에 수십억 원의 돈이 들어오는 셈이었습니다. 원하면 무엇이든지 이룰 수 있는 이 재산을, 간송은 우리 문화유산을 지키는 데 쓰기로 결심합니다. 이듬해인 1930년 간송은 일본 와세다대학교 법학과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했습니다. 그리고 대대로 쌓아온 재산 대부분을 써서 우리 유물들을 사들이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비웃었습니다. “조상이 물려준 재산을 낡은 그림 쪼가리와 그릇, 너덜너덜한 책을 사는 데 탕진한다”라고요.
하지만 간송은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유물 수집뿐만 아니라 막대한 돈을 들여 복원과 보존에 힘썼습니다. 그리고 한국 최초의 사설 박물관을 세워 이를 사람들에게 널리 보여주려고 했습니다. 그는 문화재 수집과 보존에 자신의 삶을 온전히 바쳤습니다.
그 이유를 간송 자신이 글로 뚜렷하게 밝힌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간송이 걸어온 길과 수집한 문화재, 주변의 증언을 종합하면 자연스럽게 드러납니다. 간송은 우리 문화재의 멋을 마음 깊이 사랑했고, 나라가 독립될 것을 믿었으며, 독립된 나라의 자존심은 전통문화와 문화재에 있다고 진심으로 믿었습니다. 그래서 훗날의 대한민국과 국민들을 위해 ‘문화의 힘’을 지키고 기르는 것을 사명이자 삶의 이유로 삼았습니다. 조선대표 화가들의 명품 회화
새로 개관한 대구간송미술관 전시장에서는 이렇게 모은 국보급 수집품 중 대부분을 만날 수 있습니다. 말만 국보가 아니라 출품작 66건 중 절반 이상인 40건이 실제 국보·보물입니다. 꼭 봐야 할 유물들의 정보를 중심으로, 간송이 어떻게 작품을 손에 넣었는지를 설명하겠습니다. 조선을 대표하는 그림들부터 시작합니다. 미인도(보물)는 조선시대 말기의 대가 혜원 신윤복이 그린 작품입니다. 신윤복의 삶에 대해 알려진 정보는 거의 없습니다.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만한 이 작품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어쩌다 그림을 그리게 되었는지에 대한 정보도 없습니다. 미인도라는 제목조차 후대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하지만 작품의 품격과 미묘한 분위기는 다른 어떤 조선시대 인물화도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독보적입니다. 갸름한 얼굴에 그윽한 눈매, 세련된 저고리와 풍성한 쪽빛 치마. 옷고름을 풀어 노리개를 매는 자연스러운 동작과 살짝 삐져나온 버선. 보고 있자면 여인의 정체가 궁금해집니다. 신윤복이 사랑했던 여성이었을까요?
거장의 대표 초상화가 보여주는 탁월한 완성도, 그림을 둘러싼 미스터리가 더하는 신비함. 여러모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와 공통점이 많은 작품입니다. 그래서 이 그림을 놓고 ‘조선의 모나리자’라 부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혜원전신첩(국보). 신윤복이 그린 풍속화 30쪽을 모은 책으로, 전인건 간송미술관 관장이 “대중적으로 가장 인기 있는 간송 소장품”이라고 소개한 작품입니다. 단오풍정을 비롯한 수록 작품들은 국사 교과서를 비롯한 여러 매체에 실려 한국인이라면 익숙한 이미지들이기도 합니다. 조선 후기 멋쟁이 양반들의 생활과 그 속에 숨겨진 부조리 등 당대 조선의 생활상을 탁월한 재치와 솜씨로 그려낸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한때 일본으로 유출됐다가, 1934~1936년경 간송이 거액을 주고 사 온 것입니다. 해악전신첩(보물). 조선 후기의 대가 겸재 정선(1676~1759)이 말년에 그린 이 화첩에는 금강산을 중심으로 강원도와 동해안 일대를 그린 21폭의 신비로우면서도 아름다운 그림이 실려 있습니다. 그런데 이 귀중한 그림들은 한때 잿더미가 될 위기를 겪었습니다. 친일파 송병준(1857~1925)의 집에 소장돼 있을 때였습니다.
송병준은 아마도 이 화첩을 선물 받았을 겁니다. 친일파로 권세를 누리던 그에게 잘 보이고 싶었던 누군가가 선물해 주었겠지요. 하지만 송병준은 문화재의 가치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 선물 받은 문화재들을 아무렇게나 버려두곤 했습니다. 송병준도 모르는 유물의 가치를 머슴들이 알 리 없습니다. 머슴들은 여기저기 떨어진 여러 귀중한 그림이나 책을 땔감으로 써버리곤 했습니다. 다행히도 이 책은, 우연히 송병준의 집을 방문한 골동품상이 아궁이에 들어가기 직전 발견한 덕에 잿더미 신세를 면할 수 있었습니다. 간송은 작품을 가져온 골동상에게 후한 값을 주고 이 작품을 구매했습니다. 마상청앵(보물)은 단원 김홍도(1745~1806?)의 작품입니다. 마상청앵(馬上聽鶯)이라는 제목은 '말 위에서 꾀꼬리 소리를 듣는다'는 뜻. 꾀꼬리의 울음소리는, 암수가 서로 만나는 봄철에 특히 아름답다고 합니다. 그림 속 나귀를 탄 선비는 길을 가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버드나무 가지에 앉은 노란 꾀꼬리 한 쌍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봄이 왔다는 사실을 다시 느끼게 되지요. 선비의 표정을 보세요. 김홍도가 평생에 걸쳐 그림을 그린 끝에 말년에 도달한 경지를 느낄 수 있습니다. 상단의 시에는 ‘생황(전통 악기) 소리 같은 꾀꼬리가 베틀의 북(직물을 짜는 장치)처럼 오가며 봄비로 된 베를 짠다’는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촉잔도권(보물)은 현재 심사정(1707~1769)이 말년에 그린 걸작입니다. 끝없이 이어진 위험한 길을 인생에 비유한 작품인데, 가로폭이 8m가 넘습니다. 그 길이 때문이라도 이 작품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실제로 전시장을 찾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만큼 보존이 어렵습니다. 간송은 훼손된 이 작품을 5000원에 구입한 뒤 6000원을 들여 복원했습니다. 구입비보다 수리비가 더 나왔는데, 지금으로 치면 총 비용이 수십억원이 들어간 셈입니다. 좋은 작품을 후세에 남기기 위해서라면 돈을 따지지 않았던 간송의 면모가 잘 드러나는 일화입니다.
도자기와 금속 예술의 명작
앞서 본 청자상감운학문매병(국보)은 고려청자를 대표하는 명작 중 하나입니다. 전체적인 형태와 색, 정교한 무늬가 모두 완벽하게 우아합니다. 고려 무신정권 때인 13세기 제작됐는데 술이나 물 같은 액체류를 담았거나 꽃병으로 활용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간송은 이 작품을 1935년 일본인 골동품상에게서 2만원에 구입했습니다. 얼마 안 돼 찾아온 일본인 골동품상이 “4만원에 사겠다”고 했지만 간송은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그래서 이 유물은 간송이 돈을 위해 미술품을 수집한 게 아니라는 가장 뚜렷한 증거이기도 합니다. 동그라미 속 학은 하늘로 올라가고 있고 밖에 있는 학은 땅으로 내려가고 있다는 점도 재미있습니다. 고려의 도교적 사상이 담긴 문양인데,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날아가는 학들이 어우러지며 균형감 있는 아름다움을 연출합니다. 안타까운 건 한 부분이 깨져 있다는 점입니다. 당시 도굴꾼들은 유물이 있을 것 같은 땅에 쇠꼬챙이를 찔러넣어 가며 끝에 걸리는 유물이 있는지 찾았는데, 이 과정에서 손상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백자청화철채동채초충난국문병(국보). 한 번에 이어서 발음하기 좀 어려운 이름입니다만 뜯어보면 그 뜻은 쉽습니다. 백자에다가(백자) 청화, 철채, 동채로 그림을 그렸는데(청화철채동채), 풀(초)과 벌과 나비 등 벌레(충), 난초(난)와 국화(국) 무늬(문)가 있는 병이라는 뜻입니다. 18세기 만들어진 이 백자는 일단 예쁘고 완성도가 높습니다. 게다가 다양한 색을 쓰고 입체감을 더하는 등 조선시대 백자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기법을 써서 더 귀합니다. 간송은 이 작품을 경매에서 구입했습니다. 일본 골동품 상인과의 치열한 경쟁 끝에 1만4580원, 지금 가치로 최소 수십억 원 이상을 줬습니다.
아이러니한 건 이 작품의 최초 가격이 1원이었다는 겁니다. 경기도 광주의 한 농민이 가마터에서 도자기를 우연히 발견, 참기름을 담아 팔다가 “병도 같이 팔아 달라”는 일본인의 요청에 1원을 더 받고 팔았다고 합니다. 아무리 귀중한 유물이라도 가치를 알아보는 안목이 없으면 낡은 소모품에 불과합니다.
그렇다고 그 농민을 탓할 수는 없습니다. 생활에 여유가 없는 사람에게 미술이나 문화재는 사치니까요. 그저 안타까울 뿐이고, 간송이 다시 사들인 덕에 귀한 유물을 볼 수 있어 다행일 따름입니다. 높이 9.9cm, 청자모자원숭이형연적(국보)의 모습이 너무 귀엽지요? 고려시대인 12세기, 새끼를 품고 있는 원숭이의 모양으로 만든 연적(먹을 갈 때 물을 붓기 위해 물을 담아 두는 그릇)입니다. 이 작품을 비롯해 전시장에 나온 여러 명품 청자들은, 일제 강점기 도쿄에 살았던 영국인 존 개스비의 소장품이었습니다. 개스비는 문화재 애호가로, 특히 고려청자의 매력에 푹 빠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개스비는 1937년 이 작품을 팔기로 결심합니다. 고향인 영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작품을 모두 들고 가기는 부담이 됐기 때문입니다. 간송은 발 빠르게 움직여 개스비의 컬렉션 중 20점을 일괄로 사들이는 데 성공합니다. 하지만 너무 가격이 높았기 때문에, 간송은 집안 대대로 내려오던 충남 공주 일대의 땅 1만 마지기(약 200만평)를 팔아야 했습니다. 계미명금동삼존불입상(국보)은 삼국시대인 563년 제작된 작품입니다. 높이 17.7cm에 불과하지만 정교하면서도 화려한 표현, 그리고 고요한 부처의 얼굴이 인상 깊습니다. 조선인 소장자가 가지고 있던 이 작품을 먼저 사겠다고 한 건 일본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소장자는 ‘일본에 유물을 넘기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고, 간송에게 따로 연락해 작품을 사라고 했습니다. 간송은 이 작품에도 거액(7만원이라는 설이 있음)을 치렀다고 합니다. 금동삼존불감(국보) 역시 다른 사람의 권유로 구입한 작품입니다. 전체 높이는 17.8cm에 불과하지만 구조가 아주 정교합니다. 불감(불상을 모시기 위해 작은 규모로 만든 건축물 모형) 안에 불상이 모셔져 있는데, 불상과 불감은 서로 분리할 수 있습니다. 불감 안에 있는 불상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 느낌이 실제 불당 앞에 앉은 듯합니다. 특이한 건 이 작품을 사라고 권유한 게 일본인 골동품상인 신보 기조라는 점입니다. 신보 기조는 간송의 인품과 안목에 반해 유물 수집을 적극적으로 도운 측근이었습니다. 매입 당시 가격은 무려 15만원이었습니다.
최고의 유물 훈민정음해례본, 그리고
훈민정음해례본(국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은 간송을 대표하는 유물 중 하나입니다. 1443년 훈민정음이 창제되고 3년 뒤인 1446년 나온 책입니다. 여기엔 훈민정음의 창제 원리와 사용법 등이 자세히 서술돼 있습니다. 오랫동안 어디 있는지 밝혀지지 않았던 이 귀중한 책은 1940년 안동에서 발견됐습니다. 간송은 이 책을 1만1000원, 현재 가치로는 수십억 원을 주고 구입했습니다. 간송이 6·25전쟁 당시 피난길에 잠을 잘 때도 베개 밑에 넣어둘 정도로 애지중지하며 지킨 유물로 유명합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너무나도 가치가 높은 유물이기 때문에 대중 전시에 나오는 일은 흔치 않습니다. 이렇게 문화재 수집에 모든 걸 바친 간송은, 1945년 해방 이후에는 수집을 멈췄습니다. 이미 재산의 상당 부분을 쓰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이제 유물이 해외로 유출될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이후로도 간송은 많은 고초를 겪었습니다. 6·25전쟁 때는 모아든 유물을 북한에 모두 빼앗길 뻔한 일도 있었고, 전쟁통에 많은 유물을 도둑맞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간송은 갖은 고생을 하며 주요 유물들을 성공적으로 지켜냈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엔 자신이 모았다가 도둑맞은 유물들을 다시 사 모으고 문화재보존위원으로 일하며 한국 문화재의 보존과 복원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하지만 1962년, 간송은 56세의 나이에 갑작스러운 병으로 안타깝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다행히도 간송의 자손들이 그 뜻을 이었습니다. 아들인 전영우 전 간송미술관장은 간송이 수집한 막대한 양의 유물을 조사하고 정리한 뒤 아버지가 1938년 설립한 한국 최초의 사립미술관 보화각(현재 성북구 간송미술관)을 대중에 개방했습니다. 그리고 유물 보존과 연구 작업을 이어갔습니다. 지금의 전인건 관장은 3대째입니다. 기사 하나 치고는 꽤 많은 유물을 소개했습니다. 그런데도 전시에 나온 지정문화재 중 절반도 소개하지 못해 아쉽습니다.
솔직히 말해 요즘 사람들이 우리 문화유산을 다소 고리타분하게 느끼는 건 사실입니다. 컬러풀한 서양 회화에 비해 우리 회화는 화려함이 덜해서 사진도 예쁘게 안 나옵니다. 무엇보다도 화면을 통해 그 매력을 전하기가 어렵습니다. 곳곳에 나오는 한문도 엄청난 진입 장벽이지요. 여기엔 상세한 설명을 꺼리는, 다소 불친절한 문화재계의 성향도 한몫했다고 봅니다.
하지만 실제로 대구간송미술관에 전시된 작품들 앞에 서서 작품을 바라보고 있으면 생각이 달라집니다. 단순히 ‘아끼고 사랑해야 할 의무가 있는 우리 문화재’라서가 아니라, 우리가 수백 수천 년동안 쌓아온 오묘한 아름다움의 정수가 모인 명품들이기 때문입니다. 미술관은 이번 전시를 12월 1일까지 열 계획입니다. 전시가 끝나기 전 한 번쯤 감상하고, 우리 문화재의 참모습과 조상의 유머를 느껴보셨으면 합니다.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
*이번 기사는 전시도록인 '여세동보-세상 함께 보배 삼아'와 간송미술관이 제공하는 약전을 참조해 작성했습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그런데 이 소식이 퍼지자 가장 놀라고 안타까워한 건 일본인 부자들이었습니다. “살 사람이 없어서 가격을 내리면 그때 사려고 했는데…. 최고의 명품이 다른 사람 손에 넘어가다니 원통하다.” 탄식하며 앓아누운 일본인 수집가도 있었다고 합니다. 급기야 일본인 부자 한 명은, 청년을 찾아가 “당신이 산값의 두 배를 줄 테니 물건을 넘기라”고 제안했습니다. 청년 입장에서는 불과 며칠 새 떼돈을 벌 기회. 하지만 청년은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우리 문화유산을 이 땅에 남겨야 한다’는 소신 때문이었습니다.
문화재 애호가들에게 이미 잘 알려진 이 이야기는, 조선의 전설적인 문화재 수집가이자 보성 중고등학교 동성학원 설립자인 간송 전형필(1906~1962)이 고려청자 국보인 청자상감운학문매병을 살 때의 일화입니다. 간송은 이렇게 수십 년에 걸쳐 한국의 명품 문화유산들을 수집하며 수많은 국가적 보물들을 우리 땅에 남겼습니다. 그리고 그가 남긴 간송미술관은 한국의 아름다움을 널리 알리는 역할을 하고 있지요. 9월 3일 개막하는 대구간송미술관 개관전을 계기로 삼아서, 이번 전시에 나온 주요 유물들과 담백하게 정리한 간송의 삶 이야기를 함께 풀어 봅니다.
전설의 수집가, 간송
간송은 1906년 경성 최고의 부잣집 중 한 곳에서 늦둥이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말하자면 재벌 집 막내아들입니다. 그의 집안은 간송의 증조할아버지 때 지금의 종로 4가(배오개)에서 장사를 시작한 이래 종로의 상권을 휘어잡으며 엄청난 부자 가문이 됐습니다. 집안의 땅이 지금의 왕십리, 답십리, 청량리, 송파 가락동, 창동 등 서울 각지는 물론 황해도, 공주, 서산 등 전국에 퍼져있었다고 합니다.
간송이 스물세 살이던 1929년 부친이 별세하면서 그는 이 막대한 재산의 유일한 상속자가 됩니다. 1919년 작은아버지가 재산을 물려받을 아들 없이 세상을 떠났고, 같은 해 형이 스물여덟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등졌기 때문입니다. 당시 물려받은 재산의 규모는 논만 해도 총 800만평 이상. 여기서 나온 쌀을 팔아 받을 수 있는 순수익은 한 해에 15만원에 달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총자산 규모는 수천억 원에 가만히 앉아 있어도 일 년에 수십억 원의 돈이 들어오는 셈이었습니다. 원하면 무엇이든지 이룰 수 있는 이 재산을, 간송은 우리 문화유산을 지키는 데 쓰기로 결심합니다. 이듬해인 1930년 간송은 일본 와세다대학교 법학과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했습니다. 그리고 대대로 쌓아온 재산 대부분을 써서 우리 유물들을 사들이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비웃었습니다. “조상이 물려준 재산을 낡은 그림 쪼가리와 그릇, 너덜너덜한 책을 사는 데 탕진한다”라고요.
하지만 간송은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유물 수집뿐만 아니라 막대한 돈을 들여 복원과 보존에 힘썼습니다. 그리고 한국 최초의 사설 박물관을 세워 이를 사람들에게 널리 보여주려고 했습니다. 그는 문화재 수집과 보존에 자신의 삶을 온전히 바쳤습니다.
그 이유를 간송 자신이 글로 뚜렷하게 밝힌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간송이 걸어온 길과 수집한 문화재, 주변의 증언을 종합하면 자연스럽게 드러납니다. 간송은 우리 문화재의 멋을 마음 깊이 사랑했고, 나라가 독립될 것을 믿었으며, 독립된 나라의 자존심은 전통문화와 문화재에 있다고 진심으로 믿었습니다. 그래서 훗날의 대한민국과 국민들을 위해 ‘문화의 힘’을 지키고 기르는 것을 사명이자 삶의 이유로 삼았습니다. 조선대표 화가들의 명품 회화
새로 개관한 대구간송미술관 전시장에서는 이렇게 모은 국보급 수집품 중 대부분을 만날 수 있습니다. 말만 국보가 아니라 출품작 66건 중 절반 이상인 40건이 실제 국보·보물입니다. 꼭 봐야 할 유물들의 정보를 중심으로, 간송이 어떻게 작품을 손에 넣었는지를 설명하겠습니다. 조선을 대표하는 그림들부터 시작합니다. 미인도(보물)는 조선시대 말기의 대가 혜원 신윤복이 그린 작품입니다. 신윤복의 삶에 대해 알려진 정보는 거의 없습니다.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만한 이 작품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어쩌다 그림을 그리게 되었는지에 대한 정보도 없습니다. 미인도라는 제목조차 후대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하지만 작품의 품격과 미묘한 분위기는 다른 어떤 조선시대 인물화도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독보적입니다. 갸름한 얼굴에 그윽한 눈매, 세련된 저고리와 풍성한 쪽빛 치마. 옷고름을 풀어 노리개를 매는 자연스러운 동작과 살짝 삐져나온 버선. 보고 있자면 여인의 정체가 궁금해집니다. 신윤복이 사랑했던 여성이었을까요?
거장의 대표 초상화가 보여주는 탁월한 완성도, 그림을 둘러싼 미스터리가 더하는 신비함. 여러모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와 공통점이 많은 작품입니다. 그래서 이 그림을 놓고 ‘조선의 모나리자’라 부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혜원전신첩(국보). 신윤복이 그린 풍속화 30쪽을 모은 책으로, 전인건 간송미술관 관장이 “대중적으로 가장 인기 있는 간송 소장품”이라고 소개한 작품입니다. 단오풍정을 비롯한 수록 작품들은 국사 교과서를 비롯한 여러 매체에 실려 한국인이라면 익숙한 이미지들이기도 합니다. 조선 후기 멋쟁이 양반들의 생활과 그 속에 숨겨진 부조리 등 당대 조선의 생활상을 탁월한 재치와 솜씨로 그려낸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한때 일본으로 유출됐다가, 1934~1936년경 간송이 거액을 주고 사 온 것입니다. 해악전신첩(보물). 조선 후기의 대가 겸재 정선(1676~1759)이 말년에 그린 이 화첩에는 금강산을 중심으로 강원도와 동해안 일대를 그린 21폭의 신비로우면서도 아름다운 그림이 실려 있습니다. 그런데 이 귀중한 그림들은 한때 잿더미가 될 위기를 겪었습니다. 친일파 송병준(1857~1925)의 집에 소장돼 있을 때였습니다.
송병준은 아마도 이 화첩을 선물 받았을 겁니다. 친일파로 권세를 누리던 그에게 잘 보이고 싶었던 누군가가 선물해 주었겠지요. 하지만 송병준은 문화재의 가치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 선물 받은 문화재들을 아무렇게나 버려두곤 했습니다. 송병준도 모르는 유물의 가치를 머슴들이 알 리 없습니다. 머슴들은 여기저기 떨어진 여러 귀중한 그림이나 책을 땔감으로 써버리곤 했습니다. 다행히도 이 책은, 우연히 송병준의 집을 방문한 골동품상이 아궁이에 들어가기 직전 발견한 덕에 잿더미 신세를 면할 수 있었습니다. 간송은 작품을 가져온 골동상에게 후한 값을 주고 이 작품을 구매했습니다. 마상청앵(보물)은 단원 김홍도(1745~1806?)의 작품입니다. 마상청앵(馬上聽鶯)이라는 제목은 '말 위에서 꾀꼬리 소리를 듣는다'는 뜻. 꾀꼬리의 울음소리는, 암수가 서로 만나는 봄철에 특히 아름답다고 합니다. 그림 속 나귀를 탄 선비는 길을 가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버드나무 가지에 앉은 노란 꾀꼬리 한 쌍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봄이 왔다는 사실을 다시 느끼게 되지요. 선비의 표정을 보세요. 김홍도가 평생에 걸쳐 그림을 그린 끝에 말년에 도달한 경지를 느낄 수 있습니다. 상단의 시에는 ‘생황(전통 악기) 소리 같은 꾀꼬리가 베틀의 북(직물을 짜는 장치)처럼 오가며 봄비로 된 베를 짠다’는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촉잔도권(보물)은 현재 심사정(1707~1769)이 말년에 그린 걸작입니다. 끝없이 이어진 위험한 길을 인생에 비유한 작품인데, 가로폭이 8m가 넘습니다. 그 길이 때문이라도 이 작품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실제로 전시장을 찾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만큼 보존이 어렵습니다. 간송은 훼손된 이 작품을 5000원에 구입한 뒤 6000원을 들여 복원했습니다. 구입비보다 수리비가 더 나왔는데, 지금으로 치면 총 비용이 수십억원이 들어간 셈입니다. 좋은 작품을 후세에 남기기 위해서라면 돈을 따지지 않았던 간송의 면모가 잘 드러나는 일화입니다.
도자기와 금속 예술의 명작
앞서 본 청자상감운학문매병(국보)은 고려청자를 대표하는 명작 중 하나입니다. 전체적인 형태와 색, 정교한 무늬가 모두 완벽하게 우아합니다. 고려 무신정권 때인 13세기 제작됐는데 술이나 물 같은 액체류를 담았거나 꽃병으로 활용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간송은 이 작품을 1935년 일본인 골동품상에게서 2만원에 구입했습니다. 얼마 안 돼 찾아온 일본인 골동품상이 “4만원에 사겠다”고 했지만 간송은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그래서 이 유물은 간송이 돈을 위해 미술품을 수집한 게 아니라는 가장 뚜렷한 증거이기도 합니다. 동그라미 속 학은 하늘로 올라가고 있고 밖에 있는 학은 땅으로 내려가고 있다는 점도 재미있습니다. 고려의 도교적 사상이 담긴 문양인데,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날아가는 학들이 어우러지며 균형감 있는 아름다움을 연출합니다. 안타까운 건 한 부분이 깨져 있다는 점입니다. 당시 도굴꾼들은 유물이 있을 것 같은 땅에 쇠꼬챙이를 찔러넣어 가며 끝에 걸리는 유물이 있는지 찾았는데, 이 과정에서 손상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백자청화철채동채초충난국문병(국보). 한 번에 이어서 발음하기 좀 어려운 이름입니다만 뜯어보면 그 뜻은 쉽습니다. 백자에다가(백자) 청화, 철채, 동채로 그림을 그렸는데(청화철채동채), 풀(초)과 벌과 나비 등 벌레(충), 난초(난)와 국화(국) 무늬(문)가 있는 병이라는 뜻입니다. 18세기 만들어진 이 백자는 일단 예쁘고 완성도가 높습니다. 게다가 다양한 색을 쓰고 입체감을 더하는 등 조선시대 백자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기법을 써서 더 귀합니다. 간송은 이 작품을 경매에서 구입했습니다. 일본 골동품 상인과의 치열한 경쟁 끝에 1만4580원, 지금 가치로 최소 수십억 원 이상을 줬습니다.
아이러니한 건 이 작품의 최초 가격이 1원이었다는 겁니다. 경기도 광주의 한 농민이 가마터에서 도자기를 우연히 발견, 참기름을 담아 팔다가 “병도 같이 팔아 달라”는 일본인의 요청에 1원을 더 받고 팔았다고 합니다. 아무리 귀중한 유물이라도 가치를 알아보는 안목이 없으면 낡은 소모품에 불과합니다.
그렇다고 그 농민을 탓할 수는 없습니다. 생활에 여유가 없는 사람에게 미술이나 문화재는 사치니까요. 그저 안타까울 뿐이고, 간송이 다시 사들인 덕에 귀한 유물을 볼 수 있어 다행일 따름입니다. 높이 9.9cm, 청자모자원숭이형연적(국보)의 모습이 너무 귀엽지요? 고려시대인 12세기, 새끼를 품고 있는 원숭이의 모양으로 만든 연적(먹을 갈 때 물을 붓기 위해 물을 담아 두는 그릇)입니다. 이 작품을 비롯해 전시장에 나온 여러 명품 청자들은, 일제 강점기 도쿄에 살았던 영국인 존 개스비의 소장품이었습니다. 개스비는 문화재 애호가로, 특히 고려청자의 매력에 푹 빠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개스비는 1937년 이 작품을 팔기로 결심합니다. 고향인 영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작품을 모두 들고 가기는 부담이 됐기 때문입니다. 간송은 발 빠르게 움직여 개스비의 컬렉션 중 20점을 일괄로 사들이는 데 성공합니다. 하지만 너무 가격이 높았기 때문에, 간송은 집안 대대로 내려오던 충남 공주 일대의 땅 1만 마지기(약 200만평)를 팔아야 했습니다. 계미명금동삼존불입상(국보)은 삼국시대인 563년 제작된 작품입니다. 높이 17.7cm에 불과하지만 정교하면서도 화려한 표현, 그리고 고요한 부처의 얼굴이 인상 깊습니다. 조선인 소장자가 가지고 있던 이 작품을 먼저 사겠다고 한 건 일본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소장자는 ‘일본에 유물을 넘기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고, 간송에게 따로 연락해 작품을 사라고 했습니다. 간송은 이 작품에도 거액(7만원이라는 설이 있음)을 치렀다고 합니다. 금동삼존불감(국보) 역시 다른 사람의 권유로 구입한 작품입니다. 전체 높이는 17.8cm에 불과하지만 구조가 아주 정교합니다. 불감(불상을 모시기 위해 작은 규모로 만든 건축물 모형) 안에 불상이 모셔져 있는데, 불상과 불감은 서로 분리할 수 있습니다. 불감 안에 있는 불상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 느낌이 실제 불당 앞에 앉은 듯합니다. 특이한 건 이 작품을 사라고 권유한 게 일본인 골동품상인 신보 기조라는 점입니다. 신보 기조는 간송의 인품과 안목에 반해 유물 수집을 적극적으로 도운 측근이었습니다. 매입 당시 가격은 무려 15만원이었습니다.
최고의 유물 훈민정음해례본, 그리고
훈민정음해례본(국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은 간송을 대표하는 유물 중 하나입니다. 1443년 훈민정음이 창제되고 3년 뒤인 1446년 나온 책입니다. 여기엔 훈민정음의 창제 원리와 사용법 등이 자세히 서술돼 있습니다. 오랫동안 어디 있는지 밝혀지지 않았던 이 귀중한 책은 1940년 안동에서 발견됐습니다. 간송은 이 책을 1만1000원, 현재 가치로는 수십억 원을 주고 구입했습니다. 간송이 6·25전쟁 당시 피난길에 잠을 잘 때도 베개 밑에 넣어둘 정도로 애지중지하며 지킨 유물로 유명합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너무나도 가치가 높은 유물이기 때문에 대중 전시에 나오는 일은 흔치 않습니다. 이렇게 문화재 수집에 모든 걸 바친 간송은, 1945년 해방 이후에는 수집을 멈췄습니다. 이미 재산의 상당 부분을 쓰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이제 유물이 해외로 유출될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이후로도 간송은 많은 고초를 겪었습니다. 6·25전쟁 때는 모아든 유물을 북한에 모두 빼앗길 뻔한 일도 있었고, 전쟁통에 많은 유물을 도둑맞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간송은 갖은 고생을 하며 주요 유물들을 성공적으로 지켜냈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엔 자신이 모았다가 도둑맞은 유물들을 다시 사 모으고 문화재보존위원으로 일하며 한국 문화재의 보존과 복원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하지만 1962년, 간송은 56세의 나이에 갑작스러운 병으로 안타깝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다행히도 간송의 자손들이 그 뜻을 이었습니다. 아들인 전영우 전 간송미술관장은 간송이 수집한 막대한 양의 유물을 조사하고 정리한 뒤 아버지가 1938년 설립한 한국 최초의 사립미술관 보화각(현재 성북구 간송미술관)을 대중에 개방했습니다. 그리고 유물 보존과 연구 작업을 이어갔습니다. 지금의 전인건 관장은 3대째입니다. 기사 하나 치고는 꽤 많은 유물을 소개했습니다. 그런데도 전시에 나온 지정문화재 중 절반도 소개하지 못해 아쉽습니다.
솔직히 말해 요즘 사람들이 우리 문화유산을 다소 고리타분하게 느끼는 건 사실입니다. 컬러풀한 서양 회화에 비해 우리 회화는 화려함이 덜해서 사진도 예쁘게 안 나옵니다. 무엇보다도 화면을 통해 그 매력을 전하기가 어렵습니다. 곳곳에 나오는 한문도 엄청난 진입 장벽이지요. 여기엔 상세한 설명을 꺼리는, 다소 불친절한 문화재계의 성향도 한몫했다고 봅니다.
하지만 실제로 대구간송미술관에 전시된 작품들 앞에 서서 작품을 바라보고 있으면 생각이 달라집니다. 단순히 ‘아끼고 사랑해야 할 의무가 있는 우리 문화재’라서가 아니라, 우리가 수백 수천 년동안 쌓아온 오묘한 아름다움의 정수가 모인 명품들이기 때문입니다. 미술관은 이번 전시를 12월 1일까지 열 계획입니다. 전시가 끝나기 전 한 번쯤 감상하고, 우리 문화재의 참모습과 조상의 유머를 느껴보셨으면 합니다.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
*이번 기사는 전시도록인 '여세동보-세상 함께 보배 삼아'와 간송미술관이 제공하는 약전을 참조해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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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