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처음 만난 폭염은 1994년의 여름이었습니다. 가건물처럼 지어진 옥탑방 자취생에게는 더욱 잔인한 더위였습니다. 무작정 긴 노선의 버스를 타고 열대야로 부족했던 잠을 채우거나 책을 읽기도 했고, 견디기 힘들 땐 노래방이나 비디오방에 가기도 했습니다. 1994년의 폭염은 <개같은 날의 오후>라는 영화로도, <응답하라 1994> 등의 드라마로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중목욕탕에서 뜨거운 열탕에 들어갈 때, 발을 넣었다가 놀라서 멈칫하고는 일단 온탕으로 타협하게 되는데요. 처음 온탕에서 서서히 적응하면 이내 열탕으로의 진입이 쉬워지듯, 매년 점점 뜨거워지는 여름 날씨에 익숙(?)해지며 그렇게 30년이 흘렀습니다.

물론 2018년의 폭염은 이른바 ‘폭염 불감증’에 빠져있던 저를 또 한 번 자신에게 주목하게 했습니다. 더워 죽겠네, 추워 죽겠네, 배고파 죽겠네라는 말을 생각 없이 달고 살아왔지만 진짜로 ‘더워 죽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키우던 고양이가 폭염으로 인해 원인 모를 피부병에 걸렸고, 고양이를 데리고 병원을 왔다 갔다 하다가 온열질환을 경험하고는 그해에 큰맘 먹고 에어컨을 들여놓았습니다.

사실 그전에도 에어컨이 있었지만 가동 시킨 날이 별로 없었고, 산속 동네로 이사를 하면서 쓰던 에어컨을 양도했었는데 불과 2년 만에 에어컨을 다시 들여놓았고, 2018년 이후 에어컨이 없는 여름은 이제 상상할 수가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드라마 '응답하라 1994'의 한 장면, 1994년은 당시 기상관측 사상 무더위가 가장 극심했던 해였다. / 사진출처. tvN 유튜브 캡처
드라마 '응답하라 1994'의 한 장면, 1994년은 당시 기상관측 사상 무더위가 가장 극심했던 해였다. / 사진출처. tvN 유튜브 캡처

저자 소개란에 ‘전 지구를 가로지르며 참혹한 기후 재앙의 현장을 전해온 최전선의 기후 저널리스트’ 제프 구델의 책 <폭염 살인>은 2023년, 그러니까 1년 전에 이미 인간의 ‘적응 가능한 범위(Goldilocks zone)’를 벗어났다고 합니다.

세계 곳곳에서 더위로 발화된 대형 산불들, 빙하는 빠르게 녹아내리는데 바닷물 온도상승으로 인해 물고기는 떼죽임당하고, 잦은 태풍과 폭우로 고통받는 사람들과 가뭄으로 말라붙은 열대우림이 동시에 발생하고 있다는 소식도 점점 더 심각한 상황으로 전해지지만, 이 역시 온탕에서 열탕으로 적응하듯 자연스럽게 느껴지고 있습니다.

전 세계 전문가들은 ‘인류세 대멸종’ 같은 종말론을 언급하고, 기후행동가들도 명확한 데이터를 제시하며 이대로 가다간 ‘다 죽는다’는 묵시록적 경고를 진심 거칠게 쏟아내지만 웬만해서는 폭염이라는 위기 불감증에 빠져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공감과 행동 변화를 이끌어내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입니다.
“폭주하는 더위에 대한 무기력한 상상”
그런데 이 책 <폭염 살인>의 2장, ‘열과 진화’ 편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폭염에 대한 인간의 적응 가능 범위, 즉 골디락스 존을 벗어났다는 의미를 진화론과 연결시켜 이야기하는 부분인데요. 지구가 뜨거워지는 속도를 우리의 진화 속도가 따라갈 수 없을 때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 때문입니다.

보통 인정머리 없고 차가운 사람(원래는 남자)을 ‘냉혈한’이라고 합니다. 차가운 피를 가졌단 뜻이지요. 반면에 뭔가 열정을 쏟을 일이 생기면 ‘피가 끓는다’라고 하거나 ‘뜨거운 피’라는 표현을 합니다. 하지만 인정이 많든 적든 사람 피의 온도는 늘 일정하죠. 우리가 도마뱀이나 개구리처럼 체온이 변하는 생명체가 아니니까요. 사람을 포함한 모든 포유류는 마찬가지입니다.

파충류나 양서류와 같은 변온동물은 주변 상황에 따라 체온을 조절할 필요가 없지만, 포유류나 조류와 같이 환경에 따라 몸 안에서 항상 안정적인 체온을 유지해야 하는 온혈 동물은 이를 위해 많은 칼로리를 소모해야 합니다. 하지만 스스로 체온을 조절하도록 진화해 온 온혈동물은 변온동물에 비해 크고, 빠르고, 강하고 똑똑한 생명체를 지구상에 출현시킬 수 있었습니다.
드라마 '응답하라 1994'의 한 장면, 1994년은 당시 기상관측 사상 무더위가 가장 극심했던 해였다. / 사진출처. tvN 유튜브 캡처
드라마 '응답하라 1994'의 한 장면, 1994년은 당시 기상관측 사상 무더위가 가장 극심했던 해였다. / 사진출처. tvN 유튜브 캡처
인류의 진화를 더위 또는 열의 관점에서 보면, 인류가 땀을 흘림으로써 체온을 유지하게끔 몸속에 스프링클러 시스템을 장착하게 된 점과 다른 포유류에 비해 인류가 최소한의 털(hair)을 갖게 된 이유도 보다 많을 땀을 흘릴 수 있도록 불필요한 털(fur)은 빠질 수밖에 없었다는 겁니다.

상대적으로 볼 때 개들이 여름에 혀를 내밀고 숨을 헐떡거리는 것보다, 숨을 참고 단거리를 빠르게 달려 사냥을 하던 사자도 결국은 잠시 쉬며 열형평 상태를 찾아야 하는 것보다, 땀을 흘리며 몸을 식히고 장거리를 이동할 수 있었던 인류는 열관리 전략이 우세했던 것이죠.

하지만 진화론적으로 이토록 대단했던 인류의 열관리 전략도 이른바 골딜록스 존 내에서 최적화되었던 시스템이기 때문에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을 거란 전망은 매우 충격적입니다. 그동안 기후변화에 따른 위기 경고가 마치 미래의 일이라 여겨왔던 사람들에겐 더욱 그럴 것입니다.
“폭주하는 더위에 대한 무기력한 상상”
“우리가 앞당겨 맞이한 것은 여름이 아니라 죽음이었다”는 저자의 말처럼, 올해 누구나 느꼈겠지만 폭염 살인은 이미 시작된 것으로 보입니다. 폭염 사망자 50만 시대, 세계 곳곳에서 생겨날 기후난민, 식량부족, 해충과 감염병, 에너지 부족 문제가 연쇄적으로 발생하며 일어나겠지요. 그럼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SF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해법은 지구를 떠나는 것입니다. 거대한 노아의 방주같은 쾌적한 위성으로 가거나 우주선을 타고 떠돌거나 다른 행성을 찾아 이주하는 것이죠. 물론 이것도 선택받은 소수의 사람들이나 가능한 대안이긴 합니다만 문제는 시간이죠. 폭염이 진화의 속도를 따라잡은 지금, 종말이 아닌 희망을 모색하기 위해 사피엔스들의 생존 협력이 시작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김정민 나은미래플랫폼 주식회사 ESG경영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