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비디아 젠슨 황이 소설 ‘분노의 포도’ 읽으면 어떤 말을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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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조원경의 책 경제 그리고 삶
존 스타인벡 <분노의 포도>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찾아온 산업자본주의
가난에 절망하지만 끝까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려 애쓰는 가족
AI 시대
노동과 자본, 기계와 인간
선한 관계 설정이 중요한 시점
미국 반도체 1위 기업 '엔비디아'
또 하나의 지구(Earth2) 가상 세계를 통해 사회 문제 해결
존 스타인벡 <분노의 포도>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찾아온 산업자본주의
가난에 절망하지만 끝까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려 애쓰는 가족
AI 시대
노동과 자본, 기계와 인간
선한 관계 설정이 중요한 시점
미국 반도체 1위 기업 '엔비디아'
또 하나의 지구(Earth2) 가상 세계를 통해 사회 문제 해결
오클라호마에 살던 조드 가족은 가뭄과 모래 폭풍으로 모든 것을 잃는다. 은행 이자를 갚지 못해 토지를 빼앗긴 그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캘리포니아를 향해 떠날 준비를 한다. 그 무렵, 살인죄로 형무소에 들어갔던 아들 톰 조드가 모범수로 지내다 4년 만에 임시 석방된다. 그는 낯선 트럭을 얻어 타고 집으로 돌아오던 도중, 산에서 홀로 종교적 수행을 하다가 속세로 나온 설교자 짐 케이시를 만난다.
짐 케이시는 과거 동네 목사였다. 두 사람은 가족과 함께 일자리를 찾아서 캘리포니아를 향해 떠난다. 고장 난 낡은 자동차에 모포와 취사도구만을 싣고, 2,000마일을 가기 위해 산맥을 넘고 사막을 횡단한다. 그 사이 조부모를 차례로 잃었으나, 장례를 치를 여유가 없어 시체를 차에 실은 채 이동한다. 톰의 형 노아는 말없이 사라지고 임신한 여동생 ‘로저샨(샤론 의 로즈)’의 남편 코니 역시 도망가 버린다.
우여곡절 끝에 66번 도로를 따라 고대하던 캘리포니아에 도착한 조드 일가는 신께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하지만 그곳에 신은 없었다. 꿈에 부푼 기대를 가지고 도착한 곳에서는 25만 명의 떠돌이 농민들이 각지로부터 모여들어 있었다. 노동력은 구인 숫자에 비해 십여 배나 많았다. 임금은 대지주들의 뜻에 따라 깎일 대로 깎여 있었다. 막연한 단결 투쟁 의식이 싹트기도 했으나, 사상의 불온으로 몰려 한층 더 심한 박해를 받을 뿐이었다. 조드 일가는 결국 실업자 수용 마을에 들어간다.
그런데 여기서 위압적인 보안관과 다툼이 일어나고, 짐 케이시가 책임을 떠맡고 자진해서 잡혀간다. 이 사건을 계기로 짐 케이시는 박해받는 노동자들의 파업 지도자로 떠오른다. 하지만 이내 그는 고용주의 앞잡이인 폭력단 손에 죽음을 맞는다. 그 장면을 목격한 톰은 짐 케이시를 죽인 남자를 살해하고 정처 없는 유랑의 길을 떠난다. 노동자들의 분노는 무르익은 포도송이처럼 커지고, 설상가상으로 농장에는 홍수가 밀어닥친다. 그 와중에 톰의 여동생은 아이를 사산한다. 강물이 범람하고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녀는 아기에게 먹였어야 할 젖을 굶어 죽어가는 한 나이 든 노동자에게 주며 신비로운 미소를 짓는다. 소설 <분노의 포도>는 줄리아 워드 하우(Julia Ward Howe)의 시집 <공화국 전쟁의 찬가>에서‘사람들의 영혼 속에는 분노의 포도가 가득했고, 가지가 휠 정도로 열매를 맺는다’라는 구절에서 유래한 것이다. 구약성서 <출애굽기>의 모습에 비견할 수 있는 불행한 이주민들의 탈출기를 다룬 이 소설은 당시 놀라운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929년 승용차 판매 대수는 급격히 줄어들고 주택 건설도 많이 감소한다. 주가는 계속 올라갔으나 그 절정에서는 낭떠러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수많은 투자가들이 파산했고 은행도 예금 인출 요구를 견디지 못하고 쓰러졌다. 수만 개의 기업이 줄줄이 무너졌다. 이러한 공황은 실업으로 나타났다. 심각한 단계에 들어선 1932년 봄, 전체 노동자의 4분의 1이 일자리를 잃었다. 사람들은 굶주렸고, 대도시에서는 자선단체의 구호를 받으려는 사람들의 행렬이 끝없이 이어졌다. 월가에서 시작한 공황이 대서양을 건넜다. <분노의 포도> 이야기는 실업이 만연한 이 시기에 모래바람의 폐해와 함께 시작한다.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1930년대 말이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산업자본주의가 급격히 발전하는 한편 대공황 여파가 여전히 거센 시기였다. 소수 기업가는 부의 혜택을 누렸지만, 자본과 기술이 부족한 중산층 이하 도시민과 농민들은 빈곤과 싸웠다. 이 소설은 노동자와 농민의 처절한 삶을 그리면서 자본주의 사회의 결함과 모순을 이야기한다. 작가 존 스타인벡은 그가 직접 체험한 것을 진실하게 말하고자 했다. 그는 증오보다는 서로에 대한 진정한 이해로 분노를 해결하자고 제안했다. 경제학 측면에서 소설 속에 나타난 스타인벡의 시각이 현재의 관점에서 모두 옳은 것은 아니다. 그런 관점에서 몇 가지 경제 이슈를 생각해 본다.
<분노의 포도> 속 그 분노의 대상이 자본과 기계일 수도 있다. 자본과 기계 때문에 피폐해진 당시 삶에 대해 깊은 주제 의식을 생각해 볼 필요는 있다. 우선 자본에 대한 시각이다. 소설은 소작농과 자본주와의 팽팽한 대립을 실감 나게 묘사한다. 은행 빚을 갚지 못해 농장에 있는 집이 철거당할 위기에 처한 소작농과 그 집을 철거하러 트랙터를 몰고 온 기사의 긴박한 대화를 보자.
소작농은 기사를 향해 만약 집 가까이 다가오면 총을 쏴 죽여 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그리고 앉아서 당하기보다는 그를 굶주리게 하는 사람을 먼저 죽여 버릴 거라고 절규한다. 이때 트랙터 기사가 말한다. 소작인을 궁지에 몰아넣고 있는 것은 결코 사람이 아니라, 다름 아닌 ‘자본’이라는 괴물이라고 말이다. 채권 회수를 위해 생존의 터전마저 서슴없이 강탈하려는 채권자와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살인까지도 불사하겠다는 소작농의 완강한 태도는 굉장히 계급 대립적이다. 문득 자본과 노동의 선한 연대는 불가능할까를 생각해 본다. 공산주의자들은 자본을 사악한 것으로 규정하고 노동의 관점에서 해법을 찾으려 했다. 하지만 자본주의자들은 자본이 스스로 정화하는 능력이 있다고 봤다. 그래서 자유경쟁의 시장 경제체제를 발전시키며 그 답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물론 현실 세계에서 둘 다 완벽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그래서 자본주의에서는 사회책임투자(Socially Responsible Investment)의 철학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자본가가 돈을 투자함에 있어서 단순히 재무적 이윤의 견지에서만이 아니라 사회적, 환경적, 기업 지배 구조적 측면(ESG 경영)까지 고려하여 투자하는 것 말이다.
영국의 사회책임투자 철학은 런던 금융시장의 투자자들을 긴장시키고, 여러 기업이 이를 투자 원칙으로 삼게 했다. 그 과정에서 연금 펀드가 큰 역할을 했다. 연금 펀드의 실질적 소유주는 전통적 의미의 자본가들이 아닌 근로자들이다. 연금 펀드를 매개로 자본과 노동이 상호의존적인 접점을 마련하고 있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노동과 자본의 해묵은 대치보다는 상생의 원리를 찾아 나서야 한다. 어쩌면 스톡옵션제도, 배당 수익 극대화 등 주주 이익을 중시하고 기업의 효율성만을 강조하는 현실 풍토가 선한 자본의 구축을 어렵게 하는 것은 아닐까?
주주 이익 지상주의는 기업이 단기적인 기업가치 제고에만 최선을 다하게 할 수 있다. 투자는 하지 않고 노동자의 고용을 줄이는 등 병폐가 발생할 수 있다는 말이다. 투자 확대와 고용 창출에 적극적인 기업이 사회적 투자 기업으로서 제대로 인정받는 문화가 중요하다.
미국의 역사를 보면 자동차 등 제조업 분야의 기술 진전으로 노동수요가 줄어들어 대량 실업을 낳았다. <분노의 포도>를 읽다 보면 기계에 대한 증오가 무척 심함을 느낄 수 있다. 하루의 노동을 끝낸 후 ‘생명’이 넘치는 대지의 훈훈한 기운을 느끼면서 즐겁게 생활해 왔던 농민들을 몰아내는 기계를 ‘시체처럼 싸늘하게 식어가는 쇳덩어리’로 비유했다. 작가는 소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기계를 다루는 사람, 자신이 잘 알지도 못하고 사랑하지도 않는 땅 위에서 죽어 버린 트랙터를 모는 사람은 오로지 화학적인 특징밖에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땅과 자기 자신을 경멸한다. 함석 문이 닫히면 그는 집으로 간다. 그의 집은 땅이 아니다.”
기계와의 대립과 화해는 산업혁명 이후 인류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기술 발전이 인간의 육체적 노동수요를 지속적으로 줄여가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소설에 나오는 대목 중 일자리의 중요성을 말하는 구절을 읽어 본다.
그때나 지금이나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일자리 문제고 먹고사는 문제다. 소설의 시대적 배경을 생각하며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미국 반도체 1위 기업 엔비디아를 생각해 본다.
또 하나의 지구(Earth2). 이 단어는 인공지능(AI) 종합회사로 발돋움한 엔비디아의 최고경영자(CEO) 젠슨 황이 생각해낸 개념이다. 우리가 사는 현실의 지구는 빈부격차, 기후변화, 고령화 같은 많은 문제가 있다. 많은 이의 입에 회자되는 엔비디아 경영 철학의 세계의 축을 보자. 이는 AI, 옴니버스(시뮬레이션), 로봇이다. 이는 각각 인간의 두뇌, 가상 세계, 물리적 실체로 통한다. 엔비디아는 또 하나의 지구라는 가상 세계에서 다양한 시뮬레이션을 통해 인간을 둘러싼 많은 문제점을 해결하는 기업이다. 엔비디아의 지휘자인 젠슨 황은 세상의 추한 곳을 아름답게 바꾸는 디자이너의 역할을 하고 있다.
AI를 통해 더 멋진 세상을 예측하고 우리가 진, 선, 미를 추구하는 삶을 살도록 도와주는 이가 엔비디아의 젠슨 황이라면 너무 지나친 말일까? 우리는 이제 검색의 시대에서 생성의 시대로 AI 산업혁명이 회자되는 시점에 살고 있다. 존 스타인벡이 말하는 세계의 모습이 여전히 존재하는 자본주의 속에서 우리는 인간을 대체할지도 모르는 AI 시대를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살아가야 한다. 노동과 자본 및 기계와 인간의 선한 관계 설정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점이다. 조원경 UNIST 교수
짐 케이시는 과거 동네 목사였다. 두 사람은 가족과 함께 일자리를 찾아서 캘리포니아를 향해 떠난다. 고장 난 낡은 자동차에 모포와 취사도구만을 싣고, 2,000마일을 가기 위해 산맥을 넘고 사막을 횡단한다. 그 사이 조부모를 차례로 잃었으나, 장례를 치를 여유가 없어 시체를 차에 실은 채 이동한다. 톰의 형 노아는 말없이 사라지고 임신한 여동생 ‘로저샨(샤론 의 로즈)’의 남편 코니 역시 도망가 버린다.
우여곡절 끝에 66번 도로를 따라 고대하던 캘리포니아에 도착한 조드 일가는 신께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하지만 그곳에 신은 없었다. 꿈에 부푼 기대를 가지고 도착한 곳에서는 25만 명의 떠돌이 농민들이 각지로부터 모여들어 있었다. 노동력은 구인 숫자에 비해 십여 배나 많았다. 임금은 대지주들의 뜻에 따라 깎일 대로 깎여 있었다. 막연한 단결 투쟁 의식이 싹트기도 했으나, 사상의 불온으로 몰려 한층 더 심한 박해를 받을 뿐이었다. 조드 일가는 결국 실업자 수용 마을에 들어간다.
그런데 여기서 위압적인 보안관과 다툼이 일어나고, 짐 케이시가 책임을 떠맡고 자진해서 잡혀간다. 이 사건을 계기로 짐 케이시는 박해받는 노동자들의 파업 지도자로 떠오른다. 하지만 이내 그는 고용주의 앞잡이인 폭력단 손에 죽음을 맞는다. 그 장면을 목격한 톰은 짐 케이시를 죽인 남자를 살해하고 정처 없는 유랑의 길을 떠난다. 노동자들의 분노는 무르익은 포도송이처럼 커지고, 설상가상으로 농장에는 홍수가 밀어닥친다. 그 와중에 톰의 여동생은 아이를 사산한다. 강물이 범람하고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녀는 아기에게 먹였어야 할 젖을 굶어 죽어가는 한 나이 든 노동자에게 주며 신비로운 미소를 짓는다. 소설 <분노의 포도>는 줄리아 워드 하우(Julia Ward Howe)의 시집 <공화국 전쟁의 찬가>에서‘사람들의 영혼 속에는 분노의 포도가 가득했고, 가지가 휠 정도로 열매를 맺는다’라는 구절에서 유래한 것이다. 구약성서 <출애굽기>의 모습에 비견할 수 있는 불행한 이주민들의 탈출기를 다룬 이 소설은 당시 놀라운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929년 승용차 판매 대수는 급격히 줄어들고 주택 건설도 많이 감소한다. 주가는 계속 올라갔으나 그 절정에서는 낭떠러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수많은 투자가들이 파산했고 은행도 예금 인출 요구를 견디지 못하고 쓰러졌다. 수만 개의 기업이 줄줄이 무너졌다. 이러한 공황은 실업으로 나타났다. 심각한 단계에 들어선 1932년 봄, 전체 노동자의 4분의 1이 일자리를 잃었다. 사람들은 굶주렸고, 대도시에서는 자선단체의 구호를 받으려는 사람들의 행렬이 끝없이 이어졌다. 월가에서 시작한 공황이 대서양을 건넜다. <분노의 포도> 이야기는 실업이 만연한 이 시기에 모래바람의 폐해와 함께 시작한다.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1930년대 말이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산업자본주의가 급격히 발전하는 한편 대공황 여파가 여전히 거센 시기였다. 소수 기업가는 부의 혜택을 누렸지만, 자본과 기술이 부족한 중산층 이하 도시민과 농민들은 빈곤과 싸웠다. 이 소설은 노동자와 농민의 처절한 삶을 그리면서 자본주의 사회의 결함과 모순을 이야기한다. 작가 존 스타인벡은 그가 직접 체험한 것을 진실하게 말하고자 했다. 그는 증오보다는 서로에 대한 진정한 이해로 분노를 해결하자고 제안했다. 경제학 측면에서 소설 속에 나타난 스타인벡의 시각이 현재의 관점에서 모두 옳은 것은 아니다. 그런 관점에서 몇 가지 경제 이슈를 생각해 본다.
<분노의 포도> 속 그 분노의 대상이 자본과 기계일 수도 있다. 자본과 기계 때문에 피폐해진 당시 삶에 대해 깊은 주제 의식을 생각해 볼 필요는 있다. 우선 자본에 대한 시각이다. 소설은 소작농과 자본주와의 팽팽한 대립을 실감 나게 묘사한다. 은행 빚을 갚지 못해 농장에 있는 집이 철거당할 위기에 처한 소작농과 그 집을 철거하러 트랙터를 몰고 온 기사의 긴박한 대화를 보자.
소작농은 기사를 향해 만약 집 가까이 다가오면 총을 쏴 죽여 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그리고 앉아서 당하기보다는 그를 굶주리게 하는 사람을 먼저 죽여 버릴 거라고 절규한다. 이때 트랙터 기사가 말한다. 소작인을 궁지에 몰아넣고 있는 것은 결코 사람이 아니라, 다름 아닌 ‘자본’이라는 괴물이라고 말이다. 채권 회수를 위해 생존의 터전마저 서슴없이 강탈하려는 채권자와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살인까지도 불사하겠다는 소작농의 완강한 태도는 굉장히 계급 대립적이다. 문득 자본과 노동의 선한 연대는 불가능할까를 생각해 본다. 공산주의자들은 자본을 사악한 것으로 규정하고 노동의 관점에서 해법을 찾으려 했다. 하지만 자본주의자들은 자본이 스스로 정화하는 능력이 있다고 봤다. 그래서 자유경쟁의 시장 경제체제를 발전시키며 그 답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물론 현실 세계에서 둘 다 완벽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그래서 자본주의에서는 사회책임투자(Socially Responsible Investment)의 철학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자본가가 돈을 투자함에 있어서 단순히 재무적 이윤의 견지에서만이 아니라 사회적, 환경적, 기업 지배 구조적 측면(ESG 경영)까지 고려하여 투자하는 것 말이다.
영국의 사회책임투자 철학은 런던 금융시장의 투자자들을 긴장시키고, 여러 기업이 이를 투자 원칙으로 삼게 했다. 그 과정에서 연금 펀드가 큰 역할을 했다. 연금 펀드의 실질적 소유주는 전통적 의미의 자본가들이 아닌 근로자들이다. 연금 펀드를 매개로 자본과 노동이 상호의존적인 접점을 마련하고 있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노동과 자본의 해묵은 대치보다는 상생의 원리를 찾아 나서야 한다. 어쩌면 스톡옵션제도, 배당 수익 극대화 등 주주 이익을 중시하고 기업의 효율성만을 강조하는 현실 풍토가 선한 자본의 구축을 어렵게 하는 것은 아닐까?
주주 이익 지상주의는 기업이 단기적인 기업가치 제고에만 최선을 다하게 할 수 있다. 투자는 하지 않고 노동자의 고용을 줄이는 등 병폐가 발생할 수 있다는 말이다. 투자 확대와 고용 창출에 적극적인 기업이 사회적 투자 기업으로서 제대로 인정받는 문화가 중요하다.
미국의 역사를 보면 자동차 등 제조업 분야의 기술 진전으로 노동수요가 줄어들어 대량 실업을 낳았다. <분노의 포도>를 읽다 보면 기계에 대한 증오가 무척 심함을 느낄 수 있다. 하루의 노동을 끝낸 후 ‘생명’이 넘치는 대지의 훈훈한 기운을 느끼면서 즐겁게 생활해 왔던 농민들을 몰아내는 기계를 ‘시체처럼 싸늘하게 식어가는 쇳덩어리’로 비유했다. 작가는 소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기계를 다루는 사람, 자신이 잘 알지도 못하고 사랑하지도 않는 땅 위에서 죽어 버린 트랙터를 모는 사람은 오로지 화학적인 특징밖에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땅과 자기 자신을 경멸한다. 함석 문이 닫히면 그는 집으로 간다. 그의 집은 땅이 아니다.”
기계와의 대립과 화해는 산업혁명 이후 인류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기술 발전이 인간의 육체적 노동수요를 지속적으로 줄여가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소설에 나오는 대목 중 일자리의 중요성을 말하는 구절을 읽어 본다.
“캘리포니아주의 곳곳에는 길목마다 사람들로 들끓었다. 끌고 밀고 들고 일하고 싶어서 미쳐 있는 사람들이 개미 떼처럼 몰려오고 있었다. 한 사람의 손이 들어야 하는 짐 하나에 다섯 사람의 손이 뻗어 왔고, 한 사람의 배에 찰 만한 음식에 다섯 사람의 입이 벌려졌다.”
그때나 지금이나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일자리 문제고 먹고사는 문제다. 소설의 시대적 배경을 생각하며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미국 반도체 1위 기업 엔비디아를 생각해 본다.
또 하나의 지구(Earth2). 이 단어는 인공지능(AI) 종합회사로 발돋움한 엔비디아의 최고경영자(CEO) 젠슨 황이 생각해낸 개념이다. 우리가 사는 현실의 지구는 빈부격차, 기후변화, 고령화 같은 많은 문제가 있다. 많은 이의 입에 회자되는 엔비디아 경영 철학의 세계의 축을 보자. 이는 AI, 옴니버스(시뮬레이션), 로봇이다. 이는 각각 인간의 두뇌, 가상 세계, 물리적 실체로 통한다. 엔비디아는 또 하나의 지구라는 가상 세계에서 다양한 시뮬레이션을 통해 인간을 둘러싼 많은 문제점을 해결하는 기업이다. 엔비디아의 지휘자인 젠슨 황은 세상의 추한 곳을 아름답게 바꾸는 디자이너의 역할을 하고 있다.
AI를 통해 더 멋진 세상을 예측하고 우리가 진, 선, 미를 추구하는 삶을 살도록 도와주는 이가 엔비디아의 젠슨 황이라면 너무 지나친 말일까? 우리는 이제 검색의 시대에서 생성의 시대로 AI 산업혁명이 회자되는 시점에 살고 있다. 존 스타인벡이 말하는 세계의 모습이 여전히 존재하는 자본주의 속에서 우리는 인간을 대체할지도 모르는 AI 시대를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살아가야 한다. 노동과 자본 및 기계와 인간의 선한 관계 설정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점이다. 조원경 UNIST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