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임대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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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 있는 레고코리아 본사 13층. 카드키를 찍고 회사 내부로 들어가자 가로 5m, 세로 1.2m 크기의 레고로 만든 그림이 한쪽 벽면을 가득 메웠다. ‘대한민국 사계의 변주’라는 이름의 이 벽화에는 약 9만 개의 레고 브릭(조각)이 쓰였다.

이 작품을 만든 레고공인작가(LCP) 김승유(38) 씨는 “올해 이곳으로 본사를 옮긴 레고코리아의 한국적인 색채를 트렌디하게 전하고 싶었다"며 "한 공간에서 한국의 사계절이 파노라마처럼 스치도록 해 재미를 더했다”고 설명했다.

김 작가는 지난해 레고그룹이 인정한 레고공인작가다. 레고공인작가는 현재 전 세계 13개국을 통틀어 23명뿐이다. 한국에선 김 작가를 포함해 총 2명이 활동하고 있다.

장래희망은 '만들기'예술 소재로 레고의 매력에 빠져

‘만들기’. 어린 시절 김 작가의 장래희망란은 늘 이렇게 쓰여 있었다. 개인용 컴퓨터(PC)가 보편화되지 않던 90년대에 그가 상상의 나래를 펼치도록 한 도구는 레고였다.

김 작가는 “주마다 주제를 정해 레고로 창작물을 만들며 놀곤 했다”며 “동네 형이 만든 우주선을 보고 기가 죽어 울었던 경험이 레고와의 강렬했던 첫인상”이라고 기억을 더듬었다.
사진=임대철 기자
사진=임대철 기자
성인이 된 이후 그가 다시 레고를 접할 계기를 만든 건 어머니였다. 김 작가는 “어머니가 손주에게 물려주겠다는 심정으로 레고를 창고에 보관하고 있었다"며 "창고를 정리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레고를 조립하며 다시 매력에 빠져들었다”고 돌아봤다.

상명대에서 산업디자인학과를 전공한 그에게 레고는 작품을 표현하기 위한 소재기도 했다. 김 작가는 “레고는 컴퓨터로 작업한 결과를 현실화할 수 있는 매력적인 소재로 다가왔다"며 "작은 건축물이나 조형, 오브제 등을 만들며 레고 활동을 업(業)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레고를 전문으로 다루는 ‘브릭 아티스트’로 본격적인 활동에 나선 5년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30대로 굳어지는 나이도 김 작가가 진로를 고민하도록 하는 데 한몫했다. 김 작가는 “브릭 아티스트로 활동하면서도 본업인 가구 디자이너를 병행해야만 했다”고 설명했다.
사진=김승유 작가
사진=김승유 작가
현실과 타협하려던 그의 생각을 바꾼 전환점은 2019년 레고로 만든 그의 작품 '고흐에게(To Vangogh From Vant)'였다. 이 작품은 2차세계대전 당시 일본 히로시마 원폭 투하로 없어진 반고흐의 그림 ‘해바라기’를 레고로 복원했다.

김 작가는 "이 작품이 주목받지 못하면 미련 없이 브릭 아티스트를 관두겠다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쏟아냈다"며 "미국 시카고의 한 박물관에서 전시를 제안할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코로나19로 전시회는 무산됐지만, 레고 활동을 계속 이어 나갈 수 있겠다는 확신을 얻었다”고 덧붙였다.

화홍문·롯데타워 등 100여가지 작품 선보여

사진=김승유 작가
사진=김승유 작가
김 작가가 손수 만들어 낸 레고 작품은 지금까지 약 100개에 달한다. 대표 작품인 ‘시간의문 화홍문으로의 여정'은 약 40만 개의 레고 브릭을 활용해 가로 5m, 세로 2m 크기로 수원화성 화홍문을 구현했다. 그는 "화홍문의 7개 수문을 따라 흘러나오는 무지개빛 폭포로 레고의 다채로움을 표현했다"며 "판타지적인 요소를 넣어 화홍문의 고즈넉함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도약'은 서울 신천동에 있는 롯데월드타워와 롯데월드몰의 실제 비율을 최대한 유지하며 만든 작품이다. 김 작가는 "건축물의 조감도에 초점을 둔 작품"이라며 "수많은 레고 브릭을 탑처럼 쌓는 과정을 통해 높은 꿈을 향한 도약을 형상화하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이외에 레고코리아 본사에 전시한 ‘옥토끼’는 한국의 전통미(美)를 레고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김 작가는 "전래동화에 나오는 옥토끼가 떡방아 대신 브릭방아를 찧는다는 게 기획 의도"라며 "달빛을 머금은 브릭과 함께 레고의 무한한 상상력도 만들어진다는 걸 표현하고자 했다”고 강조했다.
사진=김승유 작가
사진=김승유 작가
오는 11일 시작하는 레고의 글로벌 브랜드 캠페인 ‘또다른 이야기를 짓다(Rebuild the World)'의 국내 작품을 만들기도 했다. 김 대표는 “거북이와 토끼, 호랑이 등 한국의 전래 동화에서 자주 나오는 동물들을 표현해 많은 연령층의 공감을 얻고자 했다”고 말했다. 현재 작업하고 있는 일에 대해 그는 “아예 없어진 건물을 레고로 재현하는 프로젝트를 맡고 있다”며 말을 아꼈다.

"끊임없는 창작욕, 레고로 빚어낼 것"

김 작가의 궁극적인 목표는 ‘레고만을 이용한 집 만들기’다. 그는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들이 레고로만 이뤄진 공간을 죽기 전에 만들고 싶다"며 "제가 죽더라도 많은 사람이 와서 즐길 수 있는 공간을 남길 것”이라고 웃음을 지었다.

그는 “레고는 동심의 세계와 작품을 즐기는 사람들을 잇는 타임머신 같은 존재"라며 "'원트(Want)의 어원을 따 만든 필명 반트(Vant)처럼 끊임없이 상상하고 바라는 것들을 고민하며 작품을 만들어갈 것”이라고 덧붙였다.

원종환 기자 won0403@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