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끝이 아닌 기적 같은 시작
중년의 한 백인 남성이 미국 위스콘신주 매디슨을 자전거로 출발해 남쪽으로 페달을 밟았다. 한 달 보름 동안 4000여㎞를 달린 그는 목적지인 플로리다주 포트로더데일에 있는 병원 앞에 도착했다. 이 남성은 대기하고 있던 흑인 청년의 가슴에 청진기를 대고 청년의 심장 소리, 아니 너무나 사랑했던 딸의 심장 소리를 들으며 흐느꼈다. 한참 후에 울음을 삼키며 “내 딸은 살아 있습니다”라고 얘기했다.

한 편의 영화 같은 이 장면은 실화다. 불의의 사고로 뇌사 상태에 빠진 스무 살 딸 애비게일의 장기를 기증한 아빠와 그의 심장을 이식받고 건강을 회복한 20대 청년의 이야기다. 자전거로 여행하면서 애비게일의 아버지는 만나는 사람마다 장기 기증의 중요성을 전했다. 미국에서는 1만6366명의 뇌사 장기 기증(인구 100만 명당 48.4명)이 이뤄지고 있고, 4만 명 이상의 환자가 장기이식으로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지난 3월 어느 날, 서울 구로구에 있는 한 대학병원 복도에는 뜻깊은 행사가 있었다. 이 병원에서 지난 30년간 뇌사 장기 기증자를 추모하는 ‘추모의 벽’ 제막식이 열리고 있었다. 특히 한 젊은 의사의 사연이 많은 사람에게 잔잔한 감동을 느끼게 했다. 꿈 많은 새내기 전공의였던 기증자는 수련 과정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불의의 사고로 뇌사 상태에 빠졌다.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상황이었지만, 기증자의 아버지는 당시에 용어도 매우 낯설었을 장기 기증을 결정했다. 그리고 여러 명의 이식 대기자에게 새 생명이 선물처럼 다가왔다. 기증자와 동갑이던 한 청년은 신장이식을 받고 건강을 되찾아 고등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됐다. 기증자에게 전하는 감사의 편지 낭독이 끝난 후 기증자의 동생은 목이 메어 답사의 말을 잇지 못했다.

장기이식의 과정에는 이처럼 감동적인 사연이 셀 수 없이 많다. 2023년 한국의 장기이식 통계를 살펴보면 뇌사 장기 기증자가 483명(인구 100만 명당 8.3명)으로 장기이식 선진국인 미국이나 스페인에 비해 큰 차이를 보인다. 뇌사 추정자 또는 조직기증 희망자 발생 시 병원으로부터 통보받고 기증업무를 수행하는 한국장기조직기증원(KODA) 안에서는 ‘누군가의 끝이 아닌 누군가의 시작’이란 글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KODA의 모든 임직원은 장기기증을 결정한 모든 기증자가 하늘의 별이 됐다고 생각한다.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 서문에는 ‘방황하라, 태만하라, 죄를 지어라. 그러나 올바른 사람이 되어라’는 글이 적혀져 있다. 우리 ‘인생의 끝 날’에 올바른 사람이 되는 길이 무엇인지 미리 생각해보는 것은 매우 뜻깊은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