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북촌 하늘서 영감 얻은 자작곡 연주하는 日 피아니스트
1927년부터 5년마다 열리는 쇼팽 콩쿠르는 마우리치오 폴리니(1960년), 크리스티안 지메르만(1975년) 등을 배출한 ‘명피아니스트의 산실’. 이르면 서너 살 무렵부터 피아노를 치기 시작해, 주야장천(晝夜長川) 연습에만 몰두해온 젊은 피아노 전공생들이 각축전을 벌이는 자리다. 우승을 하면 세계 클래식 음악계의 주목을 한몸에 받게되는 이 콩쿠르에서 2021년 이례적인 일이 벌어졌다. 우승을 하지 않고도 큰 화제를 불러일으킨 피아니스트가 탄생한 것.

그는 음악 전공생도 아니었다. 도쿄대 학부·대학원에서 정보 기술(IT)을 전공한 공대생 출신으로 쇼팽 콩쿠르 결선 직전의 본선 3차 무대까지 올라온 일본 피아니스트 스미노 하야토(29) 얘기다.

오는 11월 내한하는 그는 서면 인터뷰에서 “나에게 음악과 과학은 완전히 다른 세계의 언어가 아니다”라며 “논리적 사고와 음악적 감성이 만나는 지점에서 창작의 영감을 받고, 일상에서 생겨나는 호기심과 과학적인 탐구에서 신선한 음악적 아이디어를 얻는다”고 했다.

실제로 그는 지난해 7월 한국 공연에서도 이진법을 활용해 작품번호를 소개하는 등 과학과 음악을 연결하는 새로운 관점을 선보이면서 청중으로부터 뜨거운 호응을 얻기도 했다. 하야토는 “지금도 대학 시절 전공한 컴퓨터공학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 북촌 하늘서 영감 얻은 자작곡 연주하는 日 피아니스트
그의 20대는 진로에 대한 고민의 연속이었다. 2020년 도쿄대 대학원에서 총장상을 받고, 졸업 이후엔 일본 IT 기업 입사가 예정됐을 정도로 유능한 과학도였지만 음악에 대한 열망은 한시도 꺼진 적이 없었다. 피아노 강사인 어머니 덕분에 세 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운 그는 2018년 전(全)일본 피아노 지도자 협회(PTNA) 콩쿠르에서 우승한 데 이어 이듬해 프랑스 리옹 콩쿠르에서 3위 자리까지 오르면서 ‘피아니스트의 길’로 과감히 방향을 틀었다.

하야토는 “어렸을 때부터 피아노 치는 것을 좋아했지만 연주자를 평생의 업으로 삼는 데엔 늘 망설임이 있었다”며 “성인이 되면서 음악과 과학 사이에서 균형을 찾고자 했고, 대학원을 졸업할 땐 연구자나 엔지니어가 되는 것보단 피아니스트가 되는 게 나의 강점을 살릴 수 있는 길이란 걸 확신할 수 있었다”고 했다.

“결국 피아니스트의 삶을 결정하게 됐지만, 과학도로서 얻은 다양한 경험 덕분에 폭넓은 시야와 새로운 음악적 접근을 위한 사고력을 얻을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오랫동안 묵혀둔 음악에 대한 진심은 유튜브 채널 ‘카틴(cateen)’에서도 엿볼 수 있다. 2010년 중학생 때 개설해 하나둘 피아노 연주 영상을 올린 이 채널의 현재 구독자 수는 무려 135만여 명에 달한다. 직접 작곡하거나 편곡한 작품들을 선보이는 영상들이 대다수다.

그는 “유튜브는 나에게 단순한 홍보 수단이 아니라, 창의적인 실험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하나의 창구였다”며 “과감하게 진행한 여러 도전적인 음악 활동은 나를 매일매일 성장하게 했다”고 했다.
서울 북촌 하늘서 영감 얻은 자작곡 연주하는 日 피아니스트
3년 전까지만 해도 무명이던 그는 이제 당당히 일본의 차세대 피아니스트로 주목받고 있다. 최근 소니 클래식과 독점 레코딩 계약을 맺은 그는 올해 비틀스, 퀸, 셀린 디옹 등 해외 유명 팝스타들이 오른 도쿄 최고의 공연장 부도칸(武道館)에서 피아노 독주로는 이례적으로 1만3000여 석을 매진시키면서 막강한 티켓 파워를 자랑하기도 했다. 그에게 최종 목표를 묻자, “음악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해보고 싶다”는 답이 돌아왔다.

하야토는 “정통 클래식 음악을 존중하면서도, 현대적인 감성과 실험적인 요소를 계속 발전시키면서 시대를 초월하는 작품들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다양한 장르와의 융합을 통해 음악의 경계를 허물고, 더 많은 사람이 음악의 아름다움을 경험하도록 하는 게 제 의무라고 생각하거든요. 앞으로도 새로운 도전을 멈추지 않고, 더 풍부한 음악적 세계를 만들기 위해 성장과 변화를 거듭할 겁니다.”

오는 11월 26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리는 리사이틀에서도 그의 남다른 음악적 세계를 찾아볼 수 있다. 하야토는 이 공연에서 바흐의 전주곡과 푸가 C장조,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11번과 함께 자작곡 ‘태동’ ‘녹턴(야상곡)’ ‘인간의 우주’ 등을 들려준다.

그는 “녹턴 1번은 한국 북촌의 한옥마을에서 눈 내리기 직전의 하늘을 바라보며 영감을 받은 작품이기에 더욱 특별하다”며 “작품들의 시대적 배경, 음악적 스타일의 차이를 생각하면서도, 그들 안에 공통된 음악적 언어를 발견하는 게 공연의 감상 포인트가 될 것”이라고 했다.

김수현 기자 ksoohy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