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감사를 위해 쓰인 종이 인쇄물들. / 사진=이소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실
국정감사를 위해 쓰인 종이 인쇄물들. / 사진=이소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실
"'탄소 중립 생활 실천에 국회와 함께해 주세요'? 푸훗"

국회 앞 본청을 지나가던 A씨는 기후위기시계를 보고 실소가 나왔습니다. 최근 유튜브에서 본 국회의원들 책상 위에 종이 보고서가 산더미처럼 쌓인 걸 본 게 기억났기 때문입니다. "저게 다 우리 세금인데…" A씨는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종이 없는 지능형 국회'는 혈세 아까운 줄 알길 바라는 국민들의 바람뿐만이 아니라 "4차 산업혁명이라는 피할 수 없는 변화에 맞추어 국회가 장기적으로 디지털 혁신을 이끌어갈 역량을 키워야 한다"며 선언하며 국회 스스로가 설정한 3대 비전 중 하나입니다. '디지털·친환경'에 국회가 앞장서겠다는 국회는 '입법정보화'라는 이름의 사업으로 올해 500억원의 가까운 예산을 배정했습니다. 지난 8월까지 집행된 올해 누적 혈세만 176억원에 달합니다.

2020년 국회 정보화시스템 3대 비전이 선포되기 전에는 관련 예산은 연간 200억원 정도였는데 2021년 238억원→2022년 310억원→2023년 394억원→2024년 490억원 등 매년 늘고 있습니다. 그렇게 세보니 10년간 2500억원이 넘게 들었습니다. 이렇게 혈세를 들여 전산화를 했으면 쓰는 종이 낭비도 줄었을까요?
국회사무처 '입법정보화' 사업 예산. 2024년 약 500억원에 달했습니다. /그래프=신현보 기자
국회사무처 '입법정보화' 사업 예산. 2024년 약 500억원에 달했습니다. /그래프=신현보 기자
그간 국회사무처를 비롯해 국정감사, 각 상임위 회의에도 "종이를 없애자"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쓸데없는 종이 낭비가 여전하다"는 지적이 계속 나옵니다. 한경 혈세 누수 탐지기(혈누탐)팀이 '종이 없는 지능형 국회', 어디까지 왔는지 최근 실태를 확인하기 위해 국회를 찾아가 봤습니다.

"국회는 자원 낭비 말라면서 '모순'"

취재를 시작한 후 얼마 되지 않아 유튜브에서 한 의원의 '분노'를 접했습니다. 이소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달 27일 열린 국회 운영위 회의에서 "제가 5년째 얘기하고 있고, 여야 의원들 다 공감하신다고 하는데 조금도 바뀌지 않는 게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이소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8월 27일 열린 국회운영위 회의에서 '종이 보고서' 낭비에 대해 발언하는 모습. /사진=국회방송 유튜브
이소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8월 27일 열린 국회운영위 회의에서 '종이 보고서' 낭비에 대해 발언하는 모습. /사진=국회방송 유튜브
당시 그는 "국회가 국민들에게는 자원 낭비하지 말고 폐기물 줄이라고 규제하고 부과금 매기고 제재하는데 정작 국회에서 소비되는 것은 조금도 아끼지 않고 낭비하고 있다"며 동료 의원들 책상 위에 올려진 두꺼운 인쇄물 한 뭉치를 들어 올렸습니다. 수백페이지에 달하는 세입세출 결산보고서, 국회예산정책처장 인사말씀 등이 인쇄된 제본이었습니다. 물론 중요한 자료지만, 인쇄해서 보는 게 오히려 불편하거나 굳이 인쇄까지 필요한 제본은 아니라는 지적입니다.

이 의원은 혈누탐팀에 "국회를 바꾸기가 제일 어렵다고 느낀다. 헌법기관이라는 이유로 여러 일반적 규제에서 벗어나 있다 보니, 저 같은 사람이 지적하고 시끄럽게 굴면 잠깐 나아졌다가 금세 처음으로 돌아가버린다"면서 "국회가 법으로 국민을 규제하려면 그럴 자격이 있어야 한다. 앞으로도 국회 내 자원 낭비를 막고 에너지 사용을 줄이기 위해 계속 시끄럽게 목소리 내려고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 의원 측에 따르면 매년 국감 기간에 종이 인쇄 비용으로만 40억원의 혈세가 나간답니다. 현재 유의동 여의도연구원 원장도 국민의힘 의원일 때인 지난 2022년 국정감사에서 경제인문사회연구회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국무총리 산하 26곳 연구기관에서 작년 연구보고서 책자 인쇄비로만 43억원을 지출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당시 유 원장은 "홈페이지에서 다운로드받을 수 있는 자료에 세금을 낭비했다"는 취지로 질타했습니다.

국감에서는 물론이고, 최근 각종 국회 포럼이나 토론회에서만 봐도 바뀌지 않는 '종이 사랑'이 여실히 확인됩니다. 국회의원은 연봉 1억5690만원을 말고도 각종 경비를 별도로 지원받습니다. '정책자료발간비 및 홍보물 유인비' 1200만원에 이를 발송하는 발송료까지 연평균 755만원을 또 받습니다. 신청하면 사후 지급하는 방식으로, 의원이 300명인 점을 감안하면 관련 예산만 한해에 58억원을 넘습니다. 앞서 언급한 혈세 낭비는 국회가 아닌 공공기관들에서 나간 비용이니, 국회에서 쓴 비용까지 다 합치면 종이 인쇄 비용에만 100억원이 넘게 든 해도 있을 것 같습니다.

보좌진도 아끼고 싶지만...'한숨'

국정감사를 위해 쓰인 종이 인쇄물들. / 사진=이소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실
국정감사를 위해 쓰인 종이 인쇄물들. / 사진=이소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실
22대 국회가 열린 후 여야 의원들이 앞다투어 만들고 있는 연구단체에도 1회마다 적게는 70만원, 많게는 200만원의 자료 인쇄비가 배정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현재 등록된 연구단체만 66개. 통상 연구단체마다 연 4~6회 모임을 가지고, 회당 평균 100만원의 인쇄비가 들어간다고 가정하면 관련 예산만 3억원 정도로 추산해볼 수 있습니다. 실제 이러한 비용을 포함해 국회 연구단체들이 쓴 총비용은 연간 7~8억원에 달한답니다.

의원실 실무진들 사이에서는 이 사안에 대해서 의견이 엇갈립니다. 일부 보좌진들은 국감은 물론 각종 포럼이나 토론회에서 참석자들에게 책자 형태로 배포하는 자료집도 간소화하면 불필요한 비용 지출과 이로 인해 발생하는 노동도 줄일 수 있을 것 같답니다.

본인들도 안 하고 싶지만 "어쩔 수 없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한 의원실 보좌진은 "격식을 따지느라 책자 형태로 만드는 경우가 많았다"면서 "자료집이 부족하지 않을까 신경을 쓰는 의원들이 있어서 모자라지 않게 준비했던 편"이라고 귀띔했습니다.

다른 보좌진은 "전자문서로 하면 되지 아깝게 굳이 인쇄해야 하나 생각한 적이 있지만, 세미나에 참석하는 분들 대부분이 오자마자 자료집 달라거나 찾아서 준비를 안 할 수가 없을 것"이라면서 "전자문서로 일부 대체를 시도한 적이 있는데, 자신의 발제안이 전자문서로 공유돼 돌아다니는 게 싫다고 한 발제자가 있어, 결국 전부 인쇄한 적도 있다"고 전했습니다.

기업들은 바뀌는데 뒤처지는 국회

이미 천문학적인 세금을 들이면서 전산화를 추진하는 국회. 어차피 불가피한 종이 낭비라면 디지털화에 저렇게 많은 세금을 들여야 하나 하는 의문과 함께, 여전히 종이에 매년 수억, 수십억씩 혈세가 드는 게 납득이 되질 않습니다.

부서별로 온도 차는 좀 있지만 삼성전자 같은 우리 일류 기업들은 '종이 없는 문화'를 지향한 지 꽤 됐습니다. 초기 비용만 들여 태블릿 같은 기기를 사용하면 이후에는 종이 낭비도 사무실 공간도 줄일 수 있고, 오히려 문서를 정리하고 다시 찾아보는 데도 좋기 때문이죠.

삼성전자 대표이사 출신인 고동진 국민의힘 의원도 혈누탐팀의 이번 취재에 "전적으로 동감한다"고 밝혔습니다. 고 의원은 "사실 우리 세대는 종이로 자료 보는 게 익숙하다. 중요한 부분에는 줄 그으면서 보고 그러는 습관들이 있다"면서도 "종이도 결국 다 돈인데, 자료를 만들어내는 건 큰 낭비다. 꼭 필요한 자료만 최소한으로 (인쇄해) 보고, 종이도 '재생용지'를 사용하는 방향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고 의원은 최근 의원실에 개인 태블릿 PC를 갖다두면서 직원들에게 "가능하면 이거로 보겠다"고 특별히 당부했다고도 합니다.

"이러다 이중삼중으로 돈 더 든다"

혈누탐팀은 꼭 이 많은 돈을 써야 한다면, 종이를 아낀 비용으로 연구를 더 많이 진행하거나 연구자를 더 고용하는 게 고용도 창출하고 창의적인 문제 해결책을 더 찾는 데 의미가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국회의 디지털·친환경 사업에 면밀한 재검토를 촉구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습니다. 이재묵 한국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전산화는 기본적으로 전기 요금으로 탄소 배출도 수반하기 때문에 꼭 친환경적이라고도 할 수 없다"면서 "패러다임을 바꿀 때는 기대 효과를 다방면으로 봐야 하는데, 면밀히 조사하지 않으면 이중삼중으로 부작용으로 인해 돈을 또 쓰게 된다"라고 지적했습니다.

국회는 사람도 많고, 사이즈도 크다 보니 뭐든 돈이 많이 듭니다. 최근에 국회 본관 앞에 공사를 하고 있길래 찾아봤더니, 기단층 바닥 줄눈 공사에만 1억6000만원의 혈세를 쓰겠답니다. 지난 5월에는 국회 내 비데 청소에만 혈세 3200만원이 쓰였습니다. 나 하나 쓰면 별 돈 아닌 것 같지만, 의원 300명, 보좌진 2300여명 등 5000명이 넘는 사람이 쓰면 어마어마한 돈이 됩니다. 반대로 한 명씩 조금만 쓸데없는 돈을 줄이면 더 의미 있는 곳에 쓸 여윳돈이 늘어나지 않겠습니까.
우원식 국회의장을 비롯한 여야 원내대표 및 참석자들이 4일 오전 국회에서 '기후위기시계' 이전 제막식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우원식 국회의장을 비롯한 여야 원내대표 및 참석자들이 4일 오전 국회에서 '기후위기시계' 이전 제막식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국회 본청 앞 기후위기시계. 4년 320일이 남았다는 이 시계에는
국회 본청 앞 기후위기시계. 4년 320일이 남았다는 이 시계에는 "이 시계를 멈춰 세워야만 합니다"는 말과 함께 "기후 위기에 관심을 갖고 탄소 중립 생활 실천에 국회와 함께해 주세요"라고 적혀있습니다. /사진=이슬기 기자
고물가에 국민들은 한 푼이라도 줄이려고 허리띠를 바짝 조여 매고 있습니다. 옛말에 '성 쌓다 망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요즘 가뜩이나 정치, 경제, 사회 뉴스 접하고 "한국 이러다 망하는 거 아니냐"는 성토가 곳곳에서 나옵니다. 혈누탐팀도 관련 예산을 없애기보다, 불필요한 예산을 줄여 더 유용한 곳에 쓰길 기대합니다.

앞서 국회가 말한 '혁신'에는 완전히 새로운 걸 만드는 게 아니라 있는 것을 재배치해 공동체의 이로움을 도모하는 것까지 포함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일을 하기 위해 저희 월급을 쪼개 의원님들과 국회 종사자들의 월급으로 드린다는 사실을 단 하루도 잊지 마시길 부탁드립니다.

'역대급 지각'이지만 혈누탐팀은 22대 국회 개원을 축하하고 응원합니다. 늦은 만큼 올바른 방향으로 가길 기대합니다. 그리고 지켜보겠습니다.

신현보/홍민성/이슬기 한경닷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