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거스 디턴 /한경DB
앵거스 디턴 /한경DB
“내가 이민을 온 1983년 이후 미국은 더 어두운 사회가 됐다.”

2015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앵거스 디턴은 신간 <좋은 경제학 나쁜 경제학>에서 이렇게 말했다. 영국에서 태어난 그는 서른여덟 살인 1983년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로 이직했다. 2012년까지 영국 국적을 유지한 외국인이었던 그에게 미국은 경이롭기도 했지만,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나라였다. 그는 “새로운 동료 중 한 명이 공개적으로 ‘정부는 도둑’이라고 단언했을 때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며 “나와 부모, 친구들은 정부를 자애로운 존재, 즉 어려울 때 도와주는 친구로 여기는 나라에서 자랐다”고 했다.

디턴은 데이터를 기반으로 실증 분석을 잘하는 학자다. 연구 분야는 빈곤, 불평등, 건강, 경제 개발 등이다. <위대한 탈출>, <절망의 죽음과 자본주의의 미래> 등 대중서로도 유명하다. 이번 <좋은 경제학 나쁜 경제학>은 그가 1997년부터 2022년까지 영국 왕립경제학회 뉴스레터에 기고한 에세이를 최근 상황에 맞게 갱신해 엮은 책이다. 일종의 경제 비평서다. 다양한 현안에 대한 디턴의 개인적인 견해가 강하게 드러난다.
노벨경제학 수상자도 발끈한 美 의료…“의사를 패주고 싶었다” [서평]
“전 세계 어디에서든 부유한 나라에서 온 이민자가 보면 미국의 의료 시스템은 하나의 충격이다.”

미국에 건너와 20여 년간 용케도 미국 의료 시스템을 직접 경험할 일이 없었던 그는 2006년 손상된 고관절을 인공 관절로 대체하는 고관절 치환술을 받게 됐다. 당시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의료도 시장에 맡기면, 소비자가 잘 판단해 의료 서비스를 소비할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이는 경제학 교수인 그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떤 병원의 어떤 의사가 잘하는지 알 방법이 없었고, 수술 가격도 불투명했다. 보험회사가 병원과 가격을 협상한 후에야 정확한 가격을 알 수 있었다.

돌발 상황도 생겼다. 마취과 의사는 수술 직전에 동의서를 쓰게 하더니 마취료로 6000달러를 청구했다. 보험사는 4500달러만 인정했다. 그 차액과 본인부담금(10%) 1950달러는 당초 예상했던 600달러의 3배였다. 그는 “나는 동의서에 서명하는 대신 마취과 의사를 주먹으로 때리고 싶었다”고 했다.

디턴은 시장만능주의자는 아니다. 동시에 보통의 진보 경제학자들과도 결을 달리한다. 한 예로 그는 해외 원조에 부정적이다. 빈곤국이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제대로 기능하는 정부가 필요한데, 원조가 현지 국가의 역량 개발을 저해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국민은 돈을 제공하고 정부는 국방, 교육, 보건과 같은 서비스를 공급한다. 외부 기부자가 현금을 제공하는 경우, 정부는 이러한 계약이 필요하지 않으며 국민에 대한 책임도 없다.”

국내보다 해외 빈곤에 더 신경 써야 한다는 ‘코즈모폴리턴 관점’에도 회의적이다. 빈곤국 사람이 미국 빈민보다 더 가난하고 같은 1달러로 더 많은 물건을 살 수 있다는 논리인데, 디턴은 “미국 노동 시장의 밑바닥은 많은 사람에게 잔인한 환경”이라고 반박한다. 물가나 기회의 평등, 박탈감, 절망, 약물 과용 등을 보면 미국 저소득층이 저개발국 빈곤층보다 결코 더 낫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디턴이 지난 3월 국제통화기금(IMF)에 기고한 글 ‘나의 경제학을 다시 생각한다’에도 잘 드러난다. 그는 “자유 무역과 세계화가 세계 빈곤 감소에 기여했고, 미국 노동자가 받은 피해는 이를 위한 합리적 대가라는 주장에 회의적으로 변했다”고 했다. 또 “이민이 미국에 좋으며, 국내 저숙련 노동자에게 거의 피해를 주지 않는다는 주장에도 이제 동의하지 않는다”고 했다.

경제학만큼 정부 정책에, 그리고 수많은 사람의 생계와 복지에 큰 영향을 미치는 학문도 없다. 그런 점에서 디턴은 현재 미국이 겪는 많은 문제가 ‘나쁜 경제학’에서 비롯됐다고 비판한다. 디턴은 “정부 지출은 효과가 없다고 주장한 로버트 배로 같은 사람이 학계에서 받아들여지고 그가 변방의 블로거가 아닌 하버드대 교수가 되었다는 것은, 1936년 이후 거시경제학이 발전했다기보다 오히려 퇴보했다는 확실한 증거”라고 했다.

현대 경제학이 ‘인류 복지 연구’라는 출발점에서 벗어나 ‘희소 자원 배분’을 다루는 학문으로 축소된 점도 지적했다. 그는 “경제학은 빈곤과 박탈로 인해 발생하는 비참함과 고통을 이해하고 제거하는 일에 관한 것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경제학 석학의 자유분방하고 솔직한 생각을 엿볼 수 있는 보기 드문 책이다. 그의 의견에 다 동의할 수 없더라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