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연극을 보는 이유…연극 ‘로풍찬 유랑극장’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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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김상우의 아주 사적인 연극일기
연극 ‘로풍찬 유랑극장’
공상집단 뚱딴지
연극 ‘로풍찬 유랑극장’
공상집단 뚱딴지
해방 이후 이 땅에서는 좌우 이념대립이 극심했다. 미군정 지원을 받는 남한 정부와 남조선 노동당 공산주의 세력이 싸웠고 제주 4.3 사건이 일어나 수많은 민간인이 학살당했다. 여수·순천 지역에서도 빨치산을 색출하는 정부군의 진압 과정에서 좌익, 우익이 뭔지도 모르는 무고한 민간인들이 학살되었다. 연극 ‘로풍찬 유랑극장’은 낮에는 국군, 밤에는 인민군이 마을을 들쑤시던 당시의 전남 보성 새재마을을 배경으로 한다.
이곳에서 여관집을 하는 김삼랑씨 집의 빨갱이 아들은 산으로 들어가 생사를 알 수 없고, 경찰이었던 처남은 공산당 손에 죽었다. 이 와중에 마을에 유랑극단이 들어온다. 로풍찬 단장이 이끄는 ‘로풍찬 유랑극단’은 로미오와 줄리엣을 번안한 ‘노민호와 주인애’를 이 시골에서 공연하려 한다. 주민들은 이들을 곱지 않게 본다. 사람이 죽어 나가는데 뭔 놈의 연극이냐고. 사실 이 말은 지금도 간혹 듣는 말이다. 2년 전 서울 이태원 참사 이후 각종 공연과 축제가 줄줄이 취소됐다. 희생자들에 대한 애도와 추모를 위해 예술인 스스로 결정한 것도 있지만 정부와 지자체에서 일방적으로 중단한 행사도 많았다. 축구협회는 ‘국민 정서’를 들어 월드컵 거리응원도 취소했다. “사람이 죽었는데 무슨 공연이냐”. 그러나 일각에서는 이에 반발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사람마다 다른 애도의 방식이 있는데 '슬픔'만을 강요하는 것이 과연 옳으냐는 질문이었다.
나는 이 말에 동의한다. 예술은 기분 좋을 때, 등 따습고 배부를 때만 접하는 것이 아니다. 1941년 나치 독일이 소련을 침공해 레닌그라드를 900일간 봉쇄하여 시민 150만 명이 굶주림 등으로 사망했다. 그 기간에도 레닌그라드의 뮤지컬 코미디 극장은 공연을 계속했다. 어느 날은 ‘삼총사’ 공연을 하던 중 삼총사 배우 중 한 명이 굶주림으로 쓰러져 죽어 두 명의 삼총사로 그 공연을 마쳤다고 한다. 포탄이 쏟아지는 속에서 오케스트라가 차이코프스키 교향곡을 공연했고 사람들은 빵 대신 티켓을 사서 공연장에 왔다.
지난 2017년 영국 맨체스터에서 열린 팝스타 아리아나 그란데의 콘서트에서 폭탄 테러로 22명이 죽고 800명이 다쳤다. 2주 뒤 아리아나 그란데는 다시 맨체스터에서 희생자와 유가족을 위한 기금 마련 콘서트를 열었다. 티켓은 매진됐고 2만 명의 관객이 모여 함께 춤추고 노래했다. 가수와 관객들은 서로를 ‘사랑한다’고 외쳤다. 콘서트 제목은 ‘원 러브 맨체스터’였다. 다시 로풍찬 극장으로 가보자. 장터에 모인 마을 사람들 앞에서 극단 단원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 ‘노민호와 주인애’를 연기한다. 주민들은 그 절절한 로맨스에 빠져들어 현실에서 잠시 벗어나 좌·우 따위 잊은 채 비극의 연인을 보며 탄식하고 눈물짓는다. 나는 이 장면이 가장 좋았다. 문삼화 연출은 연극을 보는 마을 주민들을 무대 중앙에 배치했다. 극 중 극에서 관객이 관객을 바라보는 것이다.
연극을 보며 함께 웃고 우는 주민들의 표정은 객석에 앉아 있는 우리의 표정이기도 했다. 연극이 끝나고 주민들은 모처럼 밝은 얼굴로 웃고 함께 춤춘다. 그날 그들의 응어리진 마음 위로 한 줄기 시원한 바람이 불었으리라. 가족이 공산당에게 몰살당해 복수의 일념으로 죽창을 들고 빨갱이를 죽이고 다니는 피창갑은 연극을 보고 난 후에 주인애에게 묻는다. “어떻게 오빠를 죽인 원수와 결혼할 수 있지?” 주인애가 그의 가슴에 손을 얹으며 대답한다. "그게 사랑이니까요." 이 작품은 연극의 힘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연극이란, 예술이란 이렇듯 현실을 잊게 하면서도 현실에서 놓치고 있는 진실을 깨우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픽션의 힘이고 연극의 힘이다. 마침, 요즘 읽고 있는 소설 ‘광인’(이혁진 저)에 이것과 일맥상통하는 대사가 나와 옮긴다.
“예술은 어떤 것보다 거짓이기 때문에 그 어떤 것보다 진실할 수 있어요. 예술에서 일어난 모든 사건은 실제로 일어난 게 아니고, 거기에 등장하는 모든 것도 벽에 비친 그림자, 음악에서의 소리들처럼 오직 그 순간에만 가짜로 존재하는 것들일 뿐이죠. 가상이고 허구에요.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예술은 어느 편도 아닐 수 있어요. 어느 시대나 사회일 필요도 없죠. (중략) 예술 안에서, 진실은 보호받고 체험될 수 있어요. 위대한 작품이 위대한 이유도 그거죠. 우리가 누구인지 세상이 어떤 곳인지 시간과 삶은 어떤 것이고 그래서 우리에게 가장 소중하고 절실한 것은 무엇인지, 시대나 국적이 다른데도, 민족도 관습도 다 다른데도 일깨워 주니까요. 현실에선 바로 그 제약들 때문에 우리가 자주 잊고 모르고 혼란스러워지는 그것들을요. 그래서 어쩌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지 몰라요. 우리가 자주 참과 거짓, 사실과 진실을 혼동하는 건 사실과 현실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예술이, 진실을 실감하고 체험할 수 있는 가상과 허구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요. 예술은 진실을 말하는 거짓말이에요.” '로풍찬 유랑극장'은 세르비아의 작가 류모비르 시모비치의 '쇼팔로비치 유랑극단'을 번안한 것이다. 배경을 우리나라로 바꿨으나 작품이 주는 울림에는 차이가 없다. 칠레나 르완다, 캄보디아로 한다 해도 비슷할 것이다. 진실은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여 사람들과 공명하기 때문이다. 1950년 새재마을 주민들이 350년 전의 셰익스피어 희곡에 울고 웃었듯.
새재마을 과부댁이 로풍찬에게 한 말도 맞다. 연극이 우리의 먹고사는 문제를 도와주진 않는다. 그러나 연극은, 예술은 삶을 제대로 살도록 해준다. 좋은 연극을 볼 때 우리의 정서는 환기되고 순화되며 지금 발 딛고 있는 현실을 돌아보고 우리가 추구해야 할 진실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된다. 그러니 삶이 팍팍하고 마음의 여유가 없을수록 극장으로 가자. 연극을 보자. 그곳에서 이 시대의 로풍찬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이곳에서 여관집을 하는 김삼랑씨 집의 빨갱이 아들은 산으로 들어가 생사를 알 수 없고, 경찰이었던 처남은 공산당 손에 죽었다. 이 와중에 마을에 유랑극단이 들어온다. 로풍찬 단장이 이끄는 ‘로풍찬 유랑극단’은 로미오와 줄리엣을 번안한 ‘노민호와 주인애’를 이 시골에서 공연하려 한다. 주민들은 이들을 곱지 않게 본다. 사람이 죽어 나가는데 뭔 놈의 연극이냐고. 사실 이 말은 지금도 간혹 듣는 말이다. 2년 전 서울 이태원 참사 이후 각종 공연과 축제가 줄줄이 취소됐다. 희생자들에 대한 애도와 추모를 위해 예술인 스스로 결정한 것도 있지만 정부와 지자체에서 일방적으로 중단한 행사도 많았다. 축구협회는 ‘국민 정서’를 들어 월드컵 거리응원도 취소했다. “사람이 죽었는데 무슨 공연이냐”. 그러나 일각에서는 이에 반발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사람마다 다른 애도의 방식이 있는데 '슬픔'만을 강요하는 것이 과연 옳으냐는 질문이었다.
나는 이 말에 동의한다. 예술은 기분 좋을 때, 등 따습고 배부를 때만 접하는 것이 아니다. 1941년 나치 독일이 소련을 침공해 레닌그라드를 900일간 봉쇄하여 시민 150만 명이 굶주림 등으로 사망했다. 그 기간에도 레닌그라드의 뮤지컬 코미디 극장은 공연을 계속했다. 어느 날은 ‘삼총사’ 공연을 하던 중 삼총사 배우 중 한 명이 굶주림으로 쓰러져 죽어 두 명의 삼총사로 그 공연을 마쳤다고 한다. 포탄이 쏟아지는 속에서 오케스트라가 차이코프스키 교향곡을 공연했고 사람들은 빵 대신 티켓을 사서 공연장에 왔다.
지난 2017년 영국 맨체스터에서 열린 팝스타 아리아나 그란데의 콘서트에서 폭탄 테러로 22명이 죽고 800명이 다쳤다. 2주 뒤 아리아나 그란데는 다시 맨체스터에서 희생자와 유가족을 위한 기금 마련 콘서트를 열었다. 티켓은 매진됐고 2만 명의 관객이 모여 함께 춤추고 노래했다. 가수와 관객들은 서로를 ‘사랑한다’고 외쳤다. 콘서트 제목은 ‘원 러브 맨체스터’였다. 다시 로풍찬 극장으로 가보자. 장터에 모인 마을 사람들 앞에서 극단 단원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 ‘노민호와 주인애’를 연기한다. 주민들은 그 절절한 로맨스에 빠져들어 현실에서 잠시 벗어나 좌·우 따위 잊은 채 비극의 연인을 보며 탄식하고 눈물짓는다. 나는 이 장면이 가장 좋았다. 문삼화 연출은 연극을 보는 마을 주민들을 무대 중앙에 배치했다. 극 중 극에서 관객이 관객을 바라보는 것이다.
연극을 보며 함께 웃고 우는 주민들의 표정은 객석에 앉아 있는 우리의 표정이기도 했다. 연극이 끝나고 주민들은 모처럼 밝은 얼굴로 웃고 함께 춤춘다. 그날 그들의 응어리진 마음 위로 한 줄기 시원한 바람이 불었으리라. 가족이 공산당에게 몰살당해 복수의 일념으로 죽창을 들고 빨갱이를 죽이고 다니는 피창갑은 연극을 보고 난 후에 주인애에게 묻는다. “어떻게 오빠를 죽인 원수와 결혼할 수 있지?” 주인애가 그의 가슴에 손을 얹으며 대답한다. "그게 사랑이니까요." 이 작품은 연극의 힘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연극이란, 예술이란 이렇듯 현실을 잊게 하면서도 현실에서 놓치고 있는 진실을 깨우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픽션의 힘이고 연극의 힘이다. 마침, 요즘 읽고 있는 소설 ‘광인’(이혁진 저)에 이것과 일맥상통하는 대사가 나와 옮긴다.
“예술은 어떤 것보다 거짓이기 때문에 그 어떤 것보다 진실할 수 있어요. 예술에서 일어난 모든 사건은 실제로 일어난 게 아니고, 거기에 등장하는 모든 것도 벽에 비친 그림자, 음악에서의 소리들처럼 오직 그 순간에만 가짜로 존재하는 것들일 뿐이죠. 가상이고 허구에요.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예술은 어느 편도 아닐 수 있어요. 어느 시대나 사회일 필요도 없죠. (중략) 예술 안에서, 진실은 보호받고 체험될 수 있어요. 위대한 작품이 위대한 이유도 그거죠. 우리가 누구인지 세상이 어떤 곳인지 시간과 삶은 어떤 것이고 그래서 우리에게 가장 소중하고 절실한 것은 무엇인지, 시대나 국적이 다른데도, 민족도 관습도 다 다른데도 일깨워 주니까요. 현실에선 바로 그 제약들 때문에 우리가 자주 잊고 모르고 혼란스러워지는 그것들을요. 그래서 어쩌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지 몰라요. 우리가 자주 참과 거짓, 사실과 진실을 혼동하는 건 사실과 현실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예술이, 진실을 실감하고 체험할 수 있는 가상과 허구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요. 예술은 진실을 말하는 거짓말이에요.” '로풍찬 유랑극장'은 세르비아의 작가 류모비르 시모비치의 '쇼팔로비치 유랑극단'을 번안한 것이다. 배경을 우리나라로 바꿨으나 작품이 주는 울림에는 차이가 없다. 칠레나 르완다, 캄보디아로 한다 해도 비슷할 것이다. 진실은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여 사람들과 공명하기 때문이다. 1950년 새재마을 주민들이 350년 전의 셰익스피어 희곡에 울고 웃었듯.
새재마을 과부댁이 로풍찬에게 한 말도 맞다. 연극이 우리의 먹고사는 문제를 도와주진 않는다. 그러나 연극은, 예술은 삶을 제대로 살도록 해준다. 좋은 연극을 볼 때 우리의 정서는 환기되고 순화되며 지금 발 딛고 있는 현실을 돌아보고 우리가 추구해야 할 진실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된다. 그러니 삶이 팍팍하고 마음의 여유가 없을수록 극장으로 가자. 연극을 보자. 그곳에서 이 시대의 로풍찬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