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컬렉터’의 안목으로 엿보는 인간의 초상,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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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품의 초상: 피노 컬렉션 선별작’
서울 청담동 송은에서 11월 23일까지
세계적인 ‘피노 컬렉션’ 13년 만에 서울 찾아
마를렌 뒤마 등 저명한 미술가 작품 60점 선봬
서울 청담동 송은에서 11월 23일까지
세계적인 ‘피노 컬렉션’ 13년 만에 서울 찾아
마를렌 뒤마 등 저명한 미술가 작품 60점 선봬
사람일까, 아니면 유령일까. 하얀 앞치마를 두른 어린 소녀들이 계단에 옹기종기 모여 있다. 지우개로 쓱쓱 문지른 듯 얇은 물감칠로 그어진 표정은 하나 같이 흐릿하다. 이 곳에서 아이들은 개인의 자아를 상실하고, 집단의 감정을 공유한다는 얘기다. 이 그림은 마를렌 뒤마의 ‘교복 입은 천사들(Angels in Uniform)’. 수녀원이었던 ‘스텔리네(Steline·작은 별)’라는 이름의 고아원에 살게 된 가엾은 어린이들의 초상이다. 뭉개진 얼굴에선 희미한 미소가 보이는 듯 하지만, 살짝 올라간 입꼬리의 끝에 어딘가 모를 불안이 걸려 있는 이유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의 마를렌 뒤마는 유럽 현대회화를 대표하는 여류 화가다. 여성이나 아이, 혹은 억압받는 인간 군상의 표정을 캔버스에 담아낸 뒤마는 가장 비싼 값에 거래된 생존 여성 작가로도 유명하다. 쉽사리 만날 수 없는 뒤마의 회화를 서울 청담동 송은 전시장에서 만났다. 아이를 밴 여성의 뒤로 새빨간 배경이 강렬한 ‘탄생(Birth)’과 흡인력 있는 푸른 색감의 ‘이방인(Alien)’ 등 또 다른 값비싼 초상들도 함께다. 지난 4일부터 열리고 있는 ‘소장품의 초상: 피노 컬렉션 선별작’ 전시에서다. 이 전시는 엘름 그린&드라그셋, 니콜라스 파티 등 ‘한국국제아트페어(KIAF)-프리즈 서울’을 전후로 열린 굵직한 전시들과 함께 큰 관심을 받고 있다. 생 로랑, 보테가베네타, 발렌시아가 등 명품 브랜드를 경영하는 케링그룹 창업주이자 세계 최대 미술품 경매사 크리스티를 소유한 프랑수아 피노의 애장품이 걸렸기 때문. 프랑스 파리에 세운 미술관 ‘부르스드코메르스(BdC)-피노컬렉션’에 거는 걸작들이 오랜만에 서울에 상륙했단 점에서 애호가들의 이목이 쏠린 것이다.
▶▶[관련 기사]달항아리로 풀어낸 40년 보따리 여정, 파리에 거울왕국 지은 김수자
피노가 모은 ‘인간의 초상’, 13년 만에 송은으로
‘피노 컬렉션’이 서울에 온 건 2011년이 처음이다. ‘Agony and Ecstasy(고통과 환희)’라는 제목으로 데미안 허스트와 제프 쿤스, 무라카미 다카시 등 자신이 소장한 거장들의 작품 20여 점을 아시아 최초로 선보였고, 미술에 대한 열기가 지금처럼 높진 않았던 13년 전에도 적잖은 반향을 일으켰다. 작품들과 함께 방한한 자리에서 “미술은 세상의 변화를 읽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시각예술”이라고 강조한 피노는 이우환의 작품도 소장하고 있다고도 밝히며 단색화의 부상을 점치기도 했다.
피노 컬렉션은 관람객과 만날 장소로 이번에도 송은을 선택했다. BdC만 해도 18세기 유서 깊은 건축물을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맡아 리모델링하는 등 피노가 미술품을 모실 공간까지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건축도 온전한 예술로 보는 피노의 컬렉션 철학을 오롯하게 담을 수 있는 그릇이 송은이란 것. 송은의 전시공간은 건축계 노벨상으로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탄 스위스 건축 듀오 자크 헤르조그, 피에르 드 뫼롱의 설계로 만들어졌다. 피노 컬렉션 측은 “이 건물이 전시에 딱 맞아떨어진다”고 설명했다. 미리암 칸, 라이언 갠더, 안리 살라, 피터 도이그 등 동시대 미술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작가들의 작품 60점이 걸렸다. 회화뿐 아니라 비디오, 설치, 조각 등 다양한 매체를 아울렀는데, 전시의 주제는 ‘인간, 그리고 세계의 초상’으로 요약할 수 있다. 성별, 피부색, 문화 등에 따라 달라지는 인간들의 얼굴을 예술가들이 어떻게 바라보는지, 또 인간과 관계를 맺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어떤지를 묻는 작품들을 모았다.
전시를 기획한 캐롤라인 부르주아 피노 컬렉션 수석 큐레이터는 “피노는 자신의 컬렉션 특징을 ‘다원성’에 두고 있다”며 “하나의 경향성이 아닌 자연스럽게 다양한 것들이 공존해야 한다는 점에서 ‘인간의 초상’이라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어 “아프리카 등 전 세계에서 온 작가들의 목소리와 전쟁 등 지금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시선을 반영했다”고 덧붙였다.
‘말하는 쥐’부터 미대 학생의 그림까지
캔버스에 담긴 사람들이 전시장 곳곳에 걸렸다. 미리암 칸의 목판 그림 ‘나무 정령(baumwesen)’이 발걸음을 잡아끈다. 멀리서 보면 그저 일그러진 표정의 그림이지만, 가까이 가면 조각하듯 긁어낸 질감이 돋보인다. 모든 혐오와 폭력은 말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건지 목에서 시작된 뿌리와 혈관이 얼굴 전체로 뻗어 나가는 모습이 재밌다. 뤼크 튀망의 ‘중간 휴식’은 팬데믹이 번진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이 드러난다. 연극 도중의 휴식 시간 같은 텅 빈 무대를 그린 작품으로, 불확실성에서 오는 불길한 기운이 감돈다. 지난해 KIAF에서 갤러리현대 부스에 포르쉐를 가져다 놓은 작품으로 이목을 끈 라이언 갠더의 설치작품인 ‘쥐’ 연작 중 하나도 보인다. 부르주아 수석 큐레이터는 “흰색, 갈색, 검은색 쥐가 미래를 염려하는데, (전시에 나온) 검은 쥐는 정치적으로 암울하다는 말을 계속한다”고 설명했다.
세계 최고 컬렉터의 안목을 공유하는 것도 묘미다. 잘 알려진 작품만 놓인 게 아니기 때문. 베트남 전쟁 직후 유럽으로 이주한 ‘보트 피플’ 얀 보의 설치작품은 청동기 시대 도끼날, 15세기 중반 성모자상, 20세기 유리 진열장 등 다른 시간대의 재료를 인위적으로 합쳐 덧없는 시간성을 말한다. 선명한 노란색 바탕에 혼종의 생명체가 몸을 뒤트는 기괴한 장면을 담아낸 폴 타부레는 아직 미술대학에 다니는 학생 신분으로 피노의 컬렉션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부르주아 수석 큐레이터는 “피노는 무명의 젊은 작가라도 예술가로서 멀리 나아갈 것인지 순식간에 알아채는 능력이 있다”고 귀띔했다. 전시는 11월 23일까지. 유승목 기자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의 마를렌 뒤마는 유럽 현대회화를 대표하는 여류 화가다. 여성이나 아이, 혹은 억압받는 인간 군상의 표정을 캔버스에 담아낸 뒤마는 가장 비싼 값에 거래된 생존 여성 작가로도 유명하다. 쉽사리 만날 수 없는 뒤마의 회화를 서울 청담동 송은 전시장에서 만났다. 아이를 밴 여성의 뒤로 새빨간 배경이 강렬한 ‘탄생(Birth)’과 흡인력 있는 푸른 색감의 ‘이방인(Alien)’ 등 또 다른 값비싼 초상들도 함께다. 지난 4일부터 열리고 있는 ‘소장품의 초상: 피노 컬렉션 선별작’ 전시에서다. 이 전시는 엘름 그린&드라그셋, 니콜라스 파티 등 ‘한국국제아트페어(KIAF)-프리즈 서울’을 전후로 열린 굵직한 전시들과 함께 큰 관심을 받고 있다. 생 로랑, 보테가베네타, 발렌시아가 등 명품 브랜드를 경영하는 케링그룹 창업주이자 세계 최대 미술품 경매사 크리스티를 소유한 프랑수아 피노의 애장품이 걸렸기 때문. 프랑스 파리에 세운 미술관 ‘부르스드코메르스(BdC)-피노컬렉션’에 거는 걸작들이 오랜만에 서울에 상륙했단 점에서 애호가들의 이목이 쏠린 것이다.
▶▶[관련 기사]달항아리로 풀어낸 40년 보따리 여정, 파리에 거울왕국 지은 김수자
피노가 모은 ‘인간의 초상’, 13년 만에 송은으로
‘피노 컬렉션’이 서울에 온 건 2011년이 처음이다. ‘Agony and Ecstasy(고통과 환희)’라는 제목으로 데미안 허스트와 제프 쿤스, 무라카미 다카시 등 자신이 소장한 거장들의 작품 20여 점을 아시아 최초로 선보였고, 미술에 대한 열기가 지금처럼 높진 않았던 13년 전에도 적잖은 반향을 일으켰다. 작품들과 함께 방한한 자리에서 “미술은 세상의 변화를 읽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시각예술”이라고 강조한 피노는 이우환의 작품도 소장하고 있다고도 밝히며 단색화의 부상을 점치기도 했다.
피노 컬렉션은 관람객과 만날 장소로 이번에도 송은을 선택했다. BdC만 해도 18세기 유서 깊은 건축물을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맡아 리모델링하는 등 피노가 미술품을 모실 공간까지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건축도 온전한 예술로 보는 피노의 컬렉션 철학을 오롯하게 담을 수 있는 그릇이 송은이란 것. 송은의 전시공간은 건축계 노벨상으로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탄 스위스 건축 듀오 자크 헤르조그, 피에르 드 뫼롱의 설계로 만들어졌다. 피노 컬렉션 측은 “이 건물이 전시에 딱 맞아떨어진다”고 설명했다. 미리암 칸, 라이언 갠더, 안리 살라, 피터 도이그 등 동시대 미술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작가들의 작품 60점이 걸렸다. 회화뿐 아니라 비디오, 설치, 조각 등 다양한 매체를 아울렀는데, 전시의 주제는 ‘인간, 그리고 세계의 초상’으로 요약할 수 있다. 성별, 피부색, 문화 등에 따라 달라지는 인간들의 얼굴을 예술가들이 어떻게 바라보는지, 또 인간과 관계를 맺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어떤지를 묻는 작품들을 모았다.
전시를 기획한 캐롤라인 부르주아 피노 컬렉션 수석 큐레이터는 “피노는 자신의 컬렉션 특징을 ‘다원성’에 두고 있다”며 “하나의 경향성이 아닌 자연스럽게 다양한 것들이 공존해야 한다는 점에서 ‘인간의 초상’이라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어 “아프리카 등 전 세계에서 온 작가들의 목소리와 전쟁 등 지금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시선을 반영했다”고 덧붙였다.
‘말하는 쥐’부터 미대 학생의 그림까지
캔버스에 담긴 사람들이 전시장 곳곳에 걸렸다. 미리암 칸의 목판 그림 ‘나무 정령(baumwesen)’이 발걸음을 잡아끈다. 멀리서 보면 그저 일그러진 표정의 그림이지만, 가까이 가면 조각하듯 긁어낸 질감이 돋보인다. 모든 혐오와 폭력은 말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건지 목에서 시작된 뿌리와 혈관이 얼굴 전체로 뻗어 나가는 모습이 재밌다. 뤼크 튀망의 ‘중간 휴식’은 팬데믹이 번진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이 드러난다. 연극 도중의 휴식 시간 같은 텅 빈 무대를 그린 작품으로, 불확실성에서 오는 불길한 기운이 감돈다. 지난해 KIAF에서 갤러리현대 부스에 포르쉐를 가져다 놓은 작품으로 이목을 끈 라이언 갠더의 설치작품인 ‘쥐’ 연작 중 하나도 보인다. 부르주아 수석 큐레이터는 “흰색, 갈색, 검은색 쥐가 미래를 염려하는데, (전시에 나온) 검은 쥐는 정치적으로 암울하다는 말을 계속한다”고 설명했다.
세계 최고 컬렉터의 안목을 공유하는 것도 묘미다. 잘 알려진 작품만 놓인 게 아니기 때문. 베트남 전쟁 직후 유럽으로 이주한 ‘보트 피플’ 얀 보의 설치작품은 청동기 시대 도끼날, 15세기 중반 성모자상, 20세기 유리 진열장 등 다른 시간대의 재료를 인위적으로 합쳐 덧없는 시간성을 말한다. 선명한 노란색 바탕에 혼종의 생명체가 몸을 뒤트는 기괴한 장면을 담아낸 폴 타부레는 아직 미술대학에 다니는 학생 신분으로 피노의 컬렉션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부르주아 수석 큐레이터는 “피노는 무명의 젊은 작가라도 예술가로서 멀리 나아갈 것인지 순식간에 알아채는 능력이 있다”고 귀띔했다. 전시는 11월 23일까지. 유승목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