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최고 시인 중의 한 명인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 1904-1973)는 사망한 지 5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칠레를 대표하는 ‘국민시인’으로 추앙받고 있다. 네루다가 처음 명성을 얻은 계기는 사랑의 시를 통해서였다. 스무 살이 되던 해에 발표한 시집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1924)로 칠레와 스페인어권 국가들에서 커다란 주목과 인기를 얻었다. “오늘 밤 나는 가장 슬픈 시를 쓸 수 있다. 나는 그녀를 사랑했고, 때때로 그녀도 나를 사랑했다”는 애달픈 구절이 담긴 이 시집은 누구나 한번은 겪었을 법한 젊은 시절 사랑의 감정과 그로 인한 고통을 절절히 표현하고 있다. 덕분에 네루다는 오늘날까지 전 세계적으로 ‘사랑의 시인’이라는 애칭을 얻게 되었고, 정현종 시인에 의해 한국어로도 번역되어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시를 통해 국제적 명성을 얻은 네루다는 칠레 정부에 의해 외교관으로 임명되어 여러 나라에 파견되었다. 그가 스페인에 영사로 부임하던 시기의 스페인은 내전이 격화되고 있었다. 이 상황을 목도한 된 그는 국제적 정치 현실에 눈을 뜨고, 파시즘의 도래에 맞서 공화파를 옹호하게 되었다. 하지만 프랑코 장군이 전세를 장악하게 되자 그는 파시스트에 반대하는 이들의 망명 도왔고, 이로 인해 프랑스로 잠시 망명을 가기도 하였다. 이후 네루다는 진보적이고 급진적인 방식으로 세계를 바라보게 되었고, 칠레의 정치 현실에도 적극적으로 개입하였다.
‘사랑의 시인’이자 ‘민중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
‘사랑의 시인’이자 ‘민중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
이는 네루다의 문학에도 자연스럽게 반영되었다. 그의 시에는 이성에 대한 사랑을 넘어 전 세계의 고통받는 민중과 소외된 이들에 대한 연민과 사랑의 감정이 투영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여 출간된 시집이 바로 <지상의 거처>(1947)와 <모두의 노래>(1950)이다. 특히, <모두의 노래>는 1943년 잉카문명의 유적지인 페루의 마추픽추를 방문이 직접적인 영감이 되었다고 한다. 이 시집에서 네루다는 아메리카 대륙의 대자연을 묘사하고, 식민지 시기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억압의 역사와 소외당한 선주민, 노동자, 광부, 여성들의 삶과 투쟁을 경외하고 노래하였다.

“나는 민중을 위해 글을 쓴다. 비록 그들이/ 투박한 눈으로 내 시를 읽지 못한다 해도./ 단 한 줄이, 내 인생을 뒤흔든 대기가/ 그들의 귀에 닿을 순간이 올 것이다./ 그러면 농부는 눈을 들 것이고/ 광부는 돌을 부수면서 미소 지을 것이고,/ 공장 직공은 이마를 훔칠 것이고/ 어부는 파닥이면서 그의 손을 태울/ 물고기의 반짝임을 더 잘 볼 것이고,/ 갓 씻어 깨끗해진 정비공은 비누 향기 풍기면서/ 나의 시를 볼 것이고/ 어쩌면 그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는 동지였다.”

이제 네루다는 자신을 ‘민중의 시인’으로 불리길 원했다.

네루다는 <모두의 노래>를 필생의 작품이라고 생각하였고, 시 창작에 몰두하기 위해 특별한 공간을 마련하였다. 그곳은 바로 수도 산타아고에서 두 시간여 떨어진 태평양의 한적한 해안가 이슬라 네그라였다. 스페인어로 이슬라 네그라는 ‘검은 섬’을 의미한다. 이 지역 태평양 해안의 모래가 검은색이라는 이유로 붙여진 이름이었다. 바다가 보이는 이 작은 마을에 네루다는 소박한 집을 짓고 자신의 공간 역시 이슬라 네그라라 명명하였다. 시인은 자신이 살았던 모든 장소 중에서 이곳을 가장 아꼈다. 네루다는 바닷가를 천천히 산책하면서, 집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시상을 떠올렸다고 한다. 친분이 있는 문인과 예술가들을 초대해 식사나 술자리를 갖는 네루다의 사랑방으로도 유명했다. 그가 생을 마감하게 된 곳도 바로 이슬라 네그라였다. 이 공간을 배경으로 탄생한 작품이 바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영화 <일 포스티노>(1994)이다.
이슬라 네그라의 해안가
이슬라 네그라의 해안가
이 영화에서 네루다는 이탈리아 남부의 한 작은 섬에서 짧은 망명 생활을 하게 된다. 외부와 단절된 이 공간에서는 유일하게 편지를 매개로 외부 세계와 소통할 수 있었고, 이를 가능하게 한 사람은 이 섬의 유일한 집배원인 마리오였다. 세계적 시인을 동경하지만 수줍은 마음에 말조차 걸기 힘들었던 마리오는 우연한 기회로 네루다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고 친분을 쌓게 된다. 그 과정에서 마리오는 시가 무엇인지 궁금해한다. 매일 우편물을 배달하며 네루다와 세계와 자연, 시와 사랑에 관한 문답을 이어가고, 이 둘 사이에는 국적과 사회적 지위를 넘어 진한 우정이 싹튼다.

영화 속에서 이들의 대화는 그 자체로 시 창작 수업과도 같다. 무엇보다 메타포에 관한 네루다의 설명은 가장 명징하게 이 용어를 이해하게 해준다. 마리오의 질문에 이 대시인은 메타포는 “한 사물을 다른 사물과 비교하면서 말하는 방법”이라고 간단히 답해준다. 이를 바로 적용해 마리오는 “그녀의 미소는 한 마리 나비의 소리 없는 날개짓”이라는 멋진 메타포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시골 촌뜨기인 자신도 시를 통해 세상을 인식할 수 있음을, 이를 통해 시인이 될 수 있음을 깨닫는다. 영화는 시가 시인의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읽는 사람들의 것임을 관객에게 상기시켜 준다.
영화 '일 포스티노'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영화 '일 포스티노'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영화에서와는 달리 네루다는 실제로 이탈리아에서 망명생활을 한 적이 없다. 이 영화의 원작이 된 작품은 안토니오 스카르메타의 소설인 <네루다의 우편배달부>(1985)이다. 그리고 이 작품에서의 공간적 배경은 이탈리아의 섬이 아닌 이슬라 네그라였다. 칠레에서 이탈리아로 배경이 바뀌면서 작품의 정서와 분위기도 상당히 달라진다. 스카르메타는 네루다가 사랑하던 이슬라 네그라에서 바닷가 젊은 청년인 마리오와의 우정을 그려내었다. 또한, 이국적이고 낭만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영화와 달리 원작 소설은 네루다의 말년과 비극적 최후에 주목하고 있다. 병세가 심해진 네루다는 유럽 생활을 접고 고국으로 돌아와 이슬라 네그라에 칩거하게 된다. 하지만 그동안 칠레 정국은 격랑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네루다에 관한 안토니오 스카르메타의 원작소설 '네루다의 우편배달부'와 영화 '일 포스티노'
네루다에 관한 안토니오 스카르메타의 원작소설 '네루다의 우편배달부'와 영화 '일 포스티노'
1970년의 선거를 통해 당선된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은 공약한 바대로 급진적 개혁을 진행하려 하였다. 하지만 이는 여러 국내외적 난관에 부딪혔고 오히려 사회 불안이 가중되었다. 그러는 와중에 당시 아옌데 대통령 휘하의 장군이었던 피노체트가 군사 반란을 일으켰다. 미국의 지지를 등에 업은 피노체트와 반란자들은 군대를 동원하여 수도를 장악했으며, 비행기로 대통령궁을 폭격하였다. 마지막까지 버티던 아옌데 대통령은 결국 절망적인 상황임을 깨닫고 자결하고 만다. 1973년 9월 칠레의 민주주의는 종언을 고하며, 17년 동안 피노체트 군사독재의 철권통치 아래 놓이게 된다. 무엇보다 그가 정권을 잡는 과정에서 벌였던 잔혹한 인권 유린과 탄압은 20세기 후반의 세계 역사를 다시 쓰게 할 정도였다.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던 네루다도 이 야만적 상황을 피해 가지는 못하였다. 오히려 쿠데타에 반대했던 네루다는 피노체트의 주요 경계 대상이었다. 계엄령이 선포되면서 네루다의 동료, 지인, 문인이 목숨을 잃거나 투옥되었고 많은 이들과의 연락이 끊겼다. 네루다는 이슬라 네그라에 고립되어 칠레의 암흑기를 무력하고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어야 했다. 이러한 상황은 당시 그의 병세를 급격하게 악화시켰다. 네루다는 쿠데타가 일어난 지 채 한 달이 지나지 않아 위독한 상태가 되었고, 산티아고의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며칠 만에 사망하게 된다. 향년 69세였다.
파블로 네루다의 장례식
파블로 네루다의 장례식
계엄령으로 인해 그가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길도 험난했다. 그의 장례식은 산티아고 시내의 언덕에 자리한 네루다의 또 다른 거처 챠스코나(Chascona)에서 진행되었다. 이 집은 네루다가 자신의 세 번째 부인인 마틸다를 위해 마련해 준 장소로, 세계 각지에서 외교관 생활을 하면서 수집한 각종 그림, 조각, 기념품을 모아놓은 곳이었다. 그러나 쿠데타가 일어난 후 계엄군이 난입하여 집안을 수색하고 물건을 강탈하면서 집은 쑥대밭이 되고 말았다. 네루다의 가족은 겨우 이를 수습하고 장례를 진행하였다. 삼엄한 감시 속에서 차스코나에 안치된 그의 시신에 작별 인사를 하러 온 조문객들 역시 감시를 당해야 했다.

생을 마감하기 전 네루다는 자신을 이슬라 네그라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러나 피노체트가 집권하는 동안에는 그의 소망이 실현될 수 없었다. 당시 네루다는 불온한 이름의 상징과도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1988년, 마침내 칠레 국민은 피노체트의 영구 집권에 반대하는 국민투표를 통해 민주화의 서막을 열었고 1990년 선거를 통해 민선 정부가 들어섰다. 그리고 또 세월이 흘러 2013년, 네루다의 마지막을 지켜주던 세 번째 아내인 마틸다가 사망하였다. 아내와 함께 묻히기 위해 네루다의 시신은 마침내 이슬라 네그라로 옮겨졌다. 그가 가장 사랑한 공간이자 시 창작에 영감이 되었던 장소로 돌아간 것이다. 그렇게 이 대시인의 마지막 소원 역시 고국의 민주화와 함께 실현되었다.

박정원 경희대 스페인어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