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시내의 한 대학병원 권역응급의료센터 앞을 시민들이 지나고 있다./사진=뉴스1
서울 시내의 한 대학병원 권역응급의료센터 앞을 시민들이 지나고 있다./사진=뉴스1
응급실에 의사가 부족해 '뺑뺑이 사망'이 벌어지는 가운데 응급실 근무 의사의 실명을 악의적으로 공개한 블랙리스트가 돌고 있다.

9일 정부와 의료계 등에 따르면 의사들이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아카이브(정보 기록소) 형식의 한 사이트에는 '응급실 부역'이라는 이름과 함께 응급실을 운영하는 각 병원별 근무 인원이 일부 근무자 명단과 함께 게시됐다.

'감사한 의사 명단'이라는 제목의 이 사이트는 운영자가 제보를 통해 확보한 의료현장에 있는 의사들에 대한 정보를 모은 뒤 매주 업데이트한다. 응급실 근무 의사 명단이 최근 새로 올라왔다.

명단에는 '000 선생님 감사합니다. 불법파업을 중단하고 환자 곁을 지키시기로 결심한 것 감사합니다' 식으로 근무 의사의 실명이 적혀 있다. 또 "복지부 피셜 '응급실 의사가 부족한데도 응급의료는 정상가동 중' 이를 가능하게 큰 도움주신 일급 520만원 근로자분들의 진료정보입니다", "인근 지역 구급대 및 응급상황에 처한 국민들에게 큰 도움 되리라 생각합니다" 라고도 적혀있다.

명단엔 비슷한 형식으로 '군 복무 중인 와중에도 응급의료를 지켜주시는 선생님 감사합니다'라는 글과 함께 응급실에 파견돼 근무 중인 군의관으로 추정되는 의사들의 실명도 공개됐다. 파견된 군의관이나 공중보건의(공보의)들의 명단이 파견을 지원하거나, 연장을 희망한 사례를 중심으로 자세히 적혀 있다.

명단엔 "당직 서며 응급실 정상화 위해 노력 중", "x번 연장", "8명 중 7명이 병원에서 '쓸모없다'라고 판단돼 대체자 없이 지자체로 복귀한 와중에 유일하게 병원에서 쓸모를 인정받아 1개월 더 연장한, 정말 감사한 선생님입니다" 등의 표현이 달렸다.

복지부는 응급실 근무 의사, 파견 군의관·공보의 등의 신상정보가 공개된 사실을 경찰에 통보하고 수사를 요청할 계획이다. 복지부 관계자는 "해당 사이트는 전에도 있었던 사이트로 이미 경찰에 수사 의뢰를 한 적 있다"며 "응급실 근무 군의관 등에 대한 신상정보가 악의적으로 추가된 만큼 경찰에 관련 내용을 알리고 수사를 검토해줄 것을 요청할 것"이라고 했다.

지난 2월 전공의들이 병원을 대거 이탈한 후 정부가 이들의 복귀를 촉구할 때마다 의료 현장에 있는 의사들의 리스트가 의사들의 인터넷 카페, 텔레그램 대화방 등에서 꾸준히 등장하고 있다.

블랙리스트는 전공의뿐 아니라 복귀를 독려하는 의대 교수, 전공의들의 자리를 메워주는 전임의 등으로 넓어지고 있으며, 공개되는 사이트도 일반인이 볼 수 있는 수준으로 과감해지고 있다.

게시된 의사들에 대해서는 명단 외에도 "불륜이 의심된다". "탈모가 왔다", "통통하고 정돈되지 않은 머리", "모자란 행동", "오지라퍼(오지랖이 넓은 사람)", "래디컬 패미니스트", "싸이코 성향" 등의 악의적인 표현이 달렸다.

휴대전화 번호가 적혀 있거나 좋아하는 프로야구팀, 사귀는 이성, 학부 대학, 아버지 이름, 고등학교 때 학교폭력을 당한 상황, 언제 신혼여행을 가고 출산휴가를 갔는지 등 자세한 개인정보가 담긴 경우도 있다.

이러한 신상공개로 인해 전공의들이 의료현장 복귀에 부담을 느끼거나 동료 의사집단에서 '왕따'를 당할까 두려워한다는 분석도 제기됐었다. 이 사이트는 의료계에 악의적인 글을 썼다면서 일부 기자들에 대해 이름, 기사 제목, 취재 활동 등도 함께 공개하고 있다.

이송렬 한경닷컴 기자 yisr0203@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