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에 가시거든 꼭 내 마음의 한 점을 찾아 기록하세요!

여행은 삶의 행운이 따라줘야 하는 것이다. 불운의 모든 변수가 비껴가야 가능한 것이다. 아무 일 없는 일상이 기적이라는 걸 깨닫는 여정인 것이다.

미서부 예술 여행을 다녀왔다. 여행 내내 미술관만 다니는 여행을 누가 올까 싶었는데, 한분 두분 모이더니 모두 열두명이 동행했다. 유명한 유적이나 관광지는 안 가고 오직 예술 향유로만 꽉 짜여진 스케줄. 게다가 그냥 수동적 관람이 아니다. 미술관마다 향유와 기록을 위한 미션이 있고 그를 수행하고 공유하며 서로 소통하게 된다.

처음엔 낯설지만, 이 방식은 예술 감상에 퍽 탁월해서 우리는 삶의 소중한 것들을 공유하게 된다.

컨셉은 <느리게 걷는 미술관> 여행이었지만, 우리는 시간을 아껴 늘 조금 빨리 걷고 많이 보고 가득 담고자 애썼다. 멀리 간 만큼, 다시 오기 힘든 만큼, 절실한 감상 욕구가 꿈틀거렸다.

미서부는 모든 미술관이 광활했다. 대륙의 스케일과 자본의 힘에 압도될 지경이었다. 게티 뮤지엄은 하루 종일 있는다 해도 다 보지 못할 것이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미술관 미션이다. 아예 어떤 주제를 갖고 미술관에 들어가는 것. 그렇게 그림 한 점에 대표성을 부여하고 그를 통해 전체를 기억하게 하는 방식이다. 생의 소중한 장면을 기억으로 남기기 위해 우리는 악착같이 기록했다.

LA에는 100여개 박물관과 미술관이 있다. 동부에 비해 훨씬 늦은 예술의 태동을 수량으로 이기려는 것인지 미국에서 제일 많다고 한다. 특히 부호들의 기부로 이뤄진 미술관, 음악 홀 등에 시민들의 자긍심도 대단했다.

예술은 이렇듯 선진국의 지표다. 우리나라도 문화 예술을 위한 보다 전방위적인 지원과 저변 확대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처음에 간 MOCA 미술관. 특별전에선 기후 위기에 대한 설치와 작품들, 상설전에선 마크 로스코와 자코메티 등의 소장품들이 전시되고 있다.

다음에 갔던 더 브로드 미술관도 흥미진진했다. 건물도 예쁘고 세련된 미술관인데, 부동산 재벌 브로드 부부의 컬렉션을 볼 수 있다. 특히 유명한 현대 미술은 이곳에 다 있다. 제프 쿤스, 앤디 워홀, 로이 리히텐슈타인, 장 미셸 바스키아, 조지 콘도 등. 널려있는 명작들 앞에서도 다리는 아파왔다.

중간중간 의자들이 많아 전부 보겠다는 욕심을 버리고 자주 앉아 쉬었다. 가만 보니 사람들은 작품 앞에서 도란도란 대화도 많았다. 나이 든 부부 혹은 노인들도 상당히 많았는데, 몸이 불편하다고 해서 비탄에 젖은 얼굴이 아니었다. 명랑하고 다정하게 대화하는 이들이 많아 늙는 일이 두렵지 않아졌다. 미술관은 그들처럼 느리게 걸을수록, 여유롭게 머물수록 가장 좋다고 생각하지만, 여행자들은 짧은 시간에 재미와 의미를 다 찾아야한다. 힘을 내서 보고 또 보고!

미술관에서의 미션은 이랬다. 내 마음의 단 한 점 찾기, 누군가에게 선물하고 싶은 한 점 찾기, 재밌는 그림 이상한 그림, 나의 취향 세 점 컬렉션,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는 어떤 그림으로 기억되고 싶은가.

우리는 먼 나라 거대한 미술관 한 귀퉁이에서 내 마음의 한점을 찾아냈다. 소중한 사람에게 주고 싶은 그림도 금세 찾았다. 나의 취향도 찾고, 다른 이들의 취향도 끄덕끄덕 존중했다. 단순한 향유자가 아닌 적극적 개입자로 예술의 주체가 됐다.

그렇게 고른 그림들에는 지금 나의 모습이 오롯이 들어있었다. 나는 어떤 그림으로 기억되고 싶은가? 마지막 미션에 나는 노튼 사이먼 뮤지엄에서 만난 파울 클레의 <바다에서의 가능성>을 골랐다. 망망대해 배 한 척, 눈앞의 항로들. 헤맨다 생각하면 조난이고 나아간다 생각하면 길이다.

감상을 기록하는 이 방식이 누구에게나 맞는 것은 아니겠지만, 나를 주인공으로 만드는 적극적 향유가 예술을 좀 더 재밌는 것, 유익한 것으로 만든다.

인생이라는 바다에서 우리가 정할 수 있는 건 지향 뿐. 힘들고 어려운 파도 속에서도 수많은 선택의 가능성을 믿고 나아가는, 나는 이 그림으로 기억되고 싶다. 미국 예술 여행, 문화의 과거부터 현재, 미래까지 훑어본 느낌이다. 여행은 끝났지만 그림이 남았다. 두고두고 꺼내어 보고 새겨둘 참이다.

많은 사람들이 여행지에서 미술관에 간다. 갔을 땐 '아 좋네! 참 좋네!'하지만 집에 돌아오면 어딜 갔었는지 무엇을 보았는지 기억나지 않는 경우도 많다. 물론 기억하지 못한다고 그때의 소중한 감흥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생의 영감을 휘발시키지 않고 붙잡아 기록해두면 더 오래 더 많이 웃을 수 있다. 생의 반짝거리는 순간을 모을 수 있다.

그러므로 미술관에 가시거든 꼭 내 마음의 한점을 찾아 기록하세요! 예술이 생의 영롱한 보석이 됩니다.

임지영 예술 칼럼니스트·(주)즐거운예감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