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당연한 1등'은 없다…시급한 메모리 반도체 투자
D램과 낸드 등 한국 메모리 반도체 산업은 부동의 수출 1위 품목이다. 건설, 소재, 부품, 장비 등 경제 전반에 미치는 파급 효과가 엄청나다. 우리 경제가 메모리 반도체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술적으로 한국이 1등을 하는 거의 유일한 분야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대규모언어모델(LLM)의 연산 요구량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면서 고성능 고효율 메모리 반도체가 인공지능(AI)의 핵심 인프라로 평가받고 있다. 메모리 반도체가 전체 AI 시스템의 성능을 좌우한다는 의미에서 ‘메모리 센트릭 시스템(Memory Centric System)’이란 용어까지 생겨났다.

관련 시장도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AI 메모리 반도체 시장의 태동기라 할 지난해에는 AI 서버향 고대역폭메모리(HBM) 비중이 전체 메모리 반도체 시장의 5%였다. 하지만 PC, 스마트폰, 차량, 로보틱스 등으로 수요가 확대되면서 4년 후인 2028년에는 전체 메모리 반도체 시장의 61%에 달할 전망이다.

HBM4부터는 메모리 반도체에 머물지 않고 그래픽처리장치(GPU)와 같은 AI 계산 기능도 같이 적용된다. HBM이 이제는 ‘범용 반도체’가 아니라 ‘주문형 시스템 반도체’로 바뀌고 있다. 새로운 시장이 열린 것이다. 이쯤 되면 파운드리산업 강자인 대만을 부러워만 할 이유가 없다.

이렇게 폭증하는 AI 메모리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대규모 선제 투자가 필요하다. 특히 HBM은 일반 D램보다 칩이 커 웨이퍼당 칩 생산량이 약 40% 줄어든다. 패키징 공정이 늘어나 클린룸 면적도 네 배나 필요하다. 이로 인해 AI 메모리 반도체 설비 투자 규모는 일반 D램의 세 배 이상이다. 그만큼 국내 기업의 부담도 커지고 있다.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가 경기 용인과 충북 청주 등에서 대규모 신규 투자에 나서고 있지만 개별 기업이 감당하기에는 벅찬 수준이다.

미국 대만 일본 중국 등 세계 주요국도 반도체 패권 확보를 위해 사활을 건 ‘칩워’에 나서고 있다. 정부의 직접 보조금과 세제 혜택이 핵심 무기다. 해외 경쟁 기업들은 자국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에 힘입어 원가경쟁력 우위를 확보해 우리와의 격차를 빠르게 좁히고 있다. 특히 미국 마이크론은 최근 HBM3E 양산을 시작했고, 생산능력을 확대하기 위해 뉴욕주와 아이다호주에 최대 1250억달러(약 166조원)를 투자한다.

반도체 시장에 영원한 1등은 없다. 1982년 미국을 제치고 세계 반도체산업 1위에 등극한 일본은 한순간에 정상에서 미끄러지며 1998년 한국에 1위 타이틀을 내줬다. ‘원조 반도체 제국’ 인텔의 영광도 영원하진 못했다.

AI 대전환 시대를 맞아 칩워 초입에 선 지금은 대한민국 메모리 반도체 경쟁력 강화를 위한 골든타임이다. 메모리 반도체는 어차피 한국이 1위라며 방치하는 순간 일본과 인텔의 악몽이 우리에게도 재연될 것이다. 특히 AI 메모리 반도체는 ‘맞춤형’으로, 기존 메모리산업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있다. 거름과 물을 쏟아부어 한국 경제의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키우고 지켜내야 한다. 지금 시기를 놓치면 다시는 기회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