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우크라이나를 방문한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 마리오 드라기 전 이탈리아 총리  /사진=AFP
2022년 우크라이나를 방문한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 마리오 드라기 전 이탈리아 총리 /사진=AFP
미국과 영국 등이 조만간 우크라이나군이 자신들이 준 장거리 미사일로 러시아 본토를 타격하는 것을 허용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서방이 자국 영토를 위협할 경우 핵무기를 쓰겠다고 위협한 탓에, 우크라이나는 서방 무기로 러시아 후방을 공격하지 못하고 사실상 손발이 묶인 상태로 전쟁을 치렀다. 그러나 러시아가 최근 이란으로부터 수 백발의 탄도 미사일을 들여오는 등 화력을 증강한 탓에 우크라이나의 방어를 위해선 장거리 공격 허용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풀이된다.

러시아 핵 위협에 맞선 미국

10일(현지시간) 외신에 따르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이날 백악관 정원에서 "우크라이나의 장거리 무기 사용에 대한 제약을 유지할 것이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지금 그 문제를 논의하고 있다"(working that out)고 답했다. 영국을 방문 중인 토니 블링컨 국무부 장관도 이날 스카이뉴스 인터뷰에서 우크라이나의 장거리 무기 사용을 배제하느냐는 질문에 "배제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영국 일간 더타임스는 이날 소식통을 인용해 "미국 정부의 일부 당국자들은 무기 사용 제한을 푸는 쪽으로 입장을 정했다"고 보도했다.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동맹국들이 우크라이나의 장사정 미사일 사용을 허용하면 2년 7개월째 이어진 전쟁이 전환점을 맞을 전망이다. 사거리 300㎞의 미국 지대지 미사일 에이태큼스(ATACMS)와 사거리 250㎞의 영국산 공중발사 순항 미사일인 스톰섀도는 당장 공격에 투입할 수 있다. 러시아의 주요 군사시설과 산업단지·발전소 등 핵심 기반 시설을 노릴 경우 큰 타격을 입힐 전망이다. F-16 전투기가 속속 투입돼 공군 전력이 증강되면 우크라이나 국경에서 500㎞가량 떨어진 수도 모스크바도 안전하지 않게 된다.

다만 러시아가 전술 핵무기를 사용할 위험은 크게 높아질 전망이다.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 영토가 위협받을 경우 언제든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다고 했다. 러시아 군 관계자는 영국·독일 영토에 대한 핵 공격을 언급하는 등 3차 세계대전을 염두에 둔 협박성 발언도 일삼았다. 미국 등은 이를 의식해 반격 등 제한적인 러시아 영토 공격만 허용했고, 장사정 무기로 후방 시설을 공격하는 것은 금지했다. 우크라이나는 드론에 폭탄을 실어 이따금 러시아의 후방을 공격하는 데 그쳤고 대규모 피해를 주진 못했다.

러시아에 미사일 대량 공급한 이란 제재

미국이 본토 공격을 허용한 것은 이란의 미사일 수출로 러시아의 화력이 증강될 것이란 우려가 커지면서다. 뉴욕타임스(NYT) 등 미국 언론은 지난 7일 이란이 수백발의 단거리 탄도 미사일을 러시아로 선적한 사실을 확인했다고 보도했다. 블링컨 국무장관은 이날 런던에서 이란이 긴장 수위를 급격히 높였다고 비판하며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침략을 최대한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이날 미국과 유럽연합(EU)은 이란이 러시아에 탄도미사일을 공급한 데 대응한 신규 제재를 단행했다. 미 재무부는 미사일 거래에 관여한 이란과 러시아 개인 10명과 6개 회사, 선박 4척 등을 블랙리스트에 올린데 이어 이란항공과 해운회사 2곳을 제재 대상에 올렸다. 러시아 해운 회사 소속 선박 5척 역시 제재했다. 이들의 미국내 자산은 동결되며, 미국인과의 거래 및 입국이 금지된다. 프랑스, 독일, 영국 등도 이란항공 취항 제한 등 조치에 나설 예정이다. EU 외교부 격인 대외관계청(EEAS)은 호세프 보렐 외교안보 고위대표를 중심으로 이란에 대한 신규 제재를 추진 중이다. 보렐 대표는 "이란의 탄도미사일 수출은 유엔 헌장과 국제법 위반에 해당한다"고 지적했다. EU의 제재까지 이뤄진다면 이란의 국제적 고립 정도는 북한에 가까워질 전망이다. 이란 외무부는 NYT보도는 "추악한 선전"에 불과하다고 일축한 데 이어 이날 유엔 대표부 성명을 통해 탄도미사일 거래 사실을 공식 부인했다.

이현일 기자 hiunea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