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즈마리 트로켈, 무제, 1978. /성곡미술관 제공
로즈마리 트로켈, 무제, 1978. /성곡미술관 제공
로즈마리 트로켈(72)은 1980년대 글로벌 미술계에 반향을 일으킨 유일한 독일 여성 예술가로 평가받는다. ‘미술 올림픽’ 베네치아 비엔날레에 독일을 대표해 작품을 선보인 첫 여성 작가이기도 하다. 독일 매체 캐피탈이 작품성과 미술계 영향력 등을 따져 매년 순위를 매기는 ‘쿤스트 컴퍼스 100대 작가 명단’에선 게르하르트 리히터, 브루스 나우만, 게오르그 바젤리츠에 이어 수년째 가장 영향력 있는 동시대 미술가로 이름을 올린다. 여성 작가로선 가장 높은 순위다.

하지만 이런 ‘여성’을 앞세운 명성은 트로켈이 쌓아온 예술세계 안에선 무의미한 수식어일 뿐이다. 물론 그가 남성이 주도권을 쥔 미술계에 도전하는 작업 활동을 해 온 것은 맞지만, 독창적인 개념과 폭넓은 예술 스펙트럼의 결과물들은 성별의 틀로 규정할 순 없다. 서울 신문로2가 성곡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 ‘로즈마리 트로켈: 드로잉, 오브제, 비디오’를 제대로 눈에 담으려면, 트로켈을 깊게 연구한 프리랜서 큐레이터 얀 팬후이즌의 이 한마디를 기억하면 좋다. “트로켈은 자신의 작품이 ‘젠더’라는 렌즈를 통해 해석되지 않길 바랐어요.”
전시에서 볼 수 있는 그림을 그리는 기계. /성곡미술관
전시에서 볼 수 있는 그림을 그리는 기계. /성곡미술관
전시에는 트로켈이 197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까지 펼쳤던 작업 활동을 보여주는 작품 72점이 나왔다. 드로잉부터 오브제, 사진, 영상 등 다양한 매체를 아우른다. 개념미술가로서 트로켈의 예술은 단일 장르나 양식에 국한되지 않는다. 트로켈의 예술을 이해하는 첫 포인트는 다양성인 셈이다. 실제로 트로켈은 사회학, 인류학, 종교학, 수학을 두루 배운 후 예술가의 길을 시작했는데, 회화를 공부하려 미술학교에 진학했다가 1970년대 영화 카메라에 쓰였던 슈퍼8 필름으로 영상제작까지 나섰다.

기성 미술의 틀을 거부하고 새로운 다양성을 보여주는 작품은 ‘그림 그리는 기계’다. 회화도, 조각도 아닌 이 작품은 56개의 붓이 장착된 그림 그리는 기계다. 각각의 붓은 마틴 키펜베르거, 바바라 크루거, 게오르그 바젤리츠, 신디 셔먼 같은 예술계 거장들의 머리카락 다발로 만들어졌다. 천재적 솜씨를 가진 예술가의 고유한 정체성을 상징하는 머리카락이 독창성보단 대량 생산의 의미가 강한 자동 그림 생산 기계에 달렸다는 점이 화가라는 관념에 물음표를 던진다.
로즈마리 트로켈의 편물회화 작품. /성곡미술관 제공
로즈마리 트로켈의 편물회화 작품. /성곡미술관 제공
트로켈의 예술에서 중요한 두 번째 지점은 이질적인 것들을 조합하는 유머러스함이다. 멀리서 보면 흰색 바탕에 검은 점이 찍힌 미니멀리즘 추상화처럼 보이는 ‘핫플레이트’가 그렇다. 가까이 다가가 보면 사실 요리할 때 쓰는 철판일 뿐인데, 주방의 별 볼 일 없는 사물이 벽에 걸리며 본래 용도가 아닌 다른 의미가 부여된 ‘레디메이드’ 작품이 됐다. 1960년대 등장한 미니멀리즘 운동에 서사와 감성이 결여돼 있다는 문제의식을 트로켈은 주방과 미술관의 경계를 지우는 행위로 비틀어 본 것이다.

기성 미술 제도와 보수적인 사회규범, 고정관념을 향한 비판적인 시선은 트로켈의 작품을 이해하는 가장 핵심이다. 트로켈의 작품이 페미니즘 미술이라 여겨지는 것도, 남성 중심의 질서를 깨기 위한 비판적 대안으로 여성의 주체성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전시에 나온 ‘편물 회화’는 예술계가 가장 하찮게 여기던 값싼 소재로 여성들이 주로 다루던 양모로 만들었다. 뛰어난 작품은 재료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발상으로, 예술적 재료나 매체에 대해 미술계와 관객이 갖는 고정관념을 지적한다. 전시는 10월 27일까지.

유승목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