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봉 10억 받으면 뭐하나"…미련 없이 한국 떠나는 선장들
세계 최대 참치 선단을 보유한 국내 A사에선 작년과 올해 총 여섯 명의 선망 어선 선장이 외국 선사로 이직했다. 이 회사는 초대형 그물로 캔용 참치를 잡는 선망 어선만 15척을 운영 중인데, 2년 새 배를 지휘하는 선장 5분의 2가 나간 것이다. 원양어업계 관계자는 “필리핀, 대만 등 외국 선사에 취업하면 같은 연봉을 받고도 연간 수천만원에서 많게는 수억원의 세금을 회피할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이직한 경우가 대부분인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국내 원양어업계가 극심한 인력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젊은 구직자들이 힘든 원양어선 일을 기피해 신입 충원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어서다. 여기에 선장을 포함해 원양어업 핵심 인력인 숙련된 해기사의 해외 이탈도 가속화하고 있다. 2013년 1400명에 육박한 해기사 수는 매년 감소해 지난해 980명으로 줄었다. 만성적인 인력난으로 인해 장기적으로 국내 원양어업 생태계가 뿌리째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해기사 엑소더스 가속화

"연봉 10억 받으면 뭐하나"…미련 없이 한국 떠나는 선장들
원양어선의 항해사(선장)와 기관사(기관장)를 통칭하는 해기사는 외국으로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있다. 11일 한국원양산업협회에 따르면 남태평양에서 조업하는 필리핀, 대만, 중국의 참치 선망 선단에 취업한 한국인 해기사는 작년 말 기준으로 선장 52명, 기관장 28명을 포함해 최소 100명으로 집계됐다. 3개국 10개 선사의 선망 어선 62척을 선별 조사한 결과다. 국내 원양어선 전체 취업자(작년 말 기준 980명)의 10%를 웃돈다.

국내 전체 원양어선 201척 중 선망 어선(28척)이 차지하는 비중은 약 14%다. 조사 범위를 연승(횟감용 참치), 트롤(오징어, 명태), 봉수망(꽁치) 어선으로 넓히면 인력 이탈 추세는 더 가팔라진다. 선장들은 보통 이직할 때 오랫동안 같이 일한 해기사와 부원 서너 명을 데리고 나간다. 어업계 관계자는 “어군을 쫓고 고기 떼를 모으는 어기(漁技)를 전수할 베테랑 선장들의 이탈이 계속되면 원양어업 경쟁력은 크게 저하될 것”이라고 했다.

선박직원법은 선박 톤수(길이) 등에 따라 갑판부와 기관부에 승선해야 하는 해기사의 자격 급수와 인원을 정하고 있다. 2000t급 선망 어선의 최소 승선 인원은 선장을 포함해 항해사 네 명과 기관사 네 명이다. 원양산업협회에 따르면 내년에 국내 원양어선에 승선해야 하는 해기사는 961명으로 추산됐다. 그러나 퇴직과 신규 임용 등을 감안한 해기사는 659명에 불과해 302명이 부족할 것으로 분석됐다. 원양산업협회 관계자는 “신규 인력이 충원되지 않으면 퇴직해야 할 60, 70대 고령 해기사가 조업을 이어갈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인력난이 심각하다 보니 참치 업체들은 새 배를 건조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다. 국내 원양어선 수는 2000년 535척에서 지난해 201척으로 20여 년 새 절반 넘게 줄었다. 한 수산회사 임원은 “이대로 가면 내년 이후 선망 어선 일부를 외국 선사에 팔아야 한다”고 말했다.

선망 어선 선장은 월 360만원 선인 기본급(생계비)에 어획량 등에 따른 성과급을 더해 1년에 5억~10억원을 벌어들인다. 과거 원양어선 선원은 외화벌이 일등 공신이라는 이유로 소득의 50%를 세액 공제받았지만, 1995년 이 제도는 없어졌다. 지금은 일반 과세자와 같은 소득세가 적용돼 연 소득 10억원이 넘는 이들에게 최고세율 45%가 부과된다. 다만 월 급여 500만원까지 비과세 혜택을 준다.

반면 50명이 넘는 선망 어선 선장이 옮겨 간 필리핀은 기본급에만 일정 수준의 소득세를 부과한다. 급여에서 성과급 비중이 절대적으로 높은 선장들로선 세 부담을 크게 덜 수 있는 것이다. 대만도 원양어업 육성 차원에서 전체 급여의 5% 정도만 세금으로 떼 가는 것으로 알려졌다. 어업계 관계자는 “외국 선사에 취업한 선원은 국내에 들어올 때는 외국 세율과 국내 소득세율의 차액만큼을 세금으로 내야 하지만, 상당수 선장은 소득을 자진 신고하지 않거나 축소 신고하는 방식으로 세금을 회피하고 있다”고 말했다.

해기사 교육생 모집도 난항

젊은 선원들의 원양어선 기피에 따른 해기사의 고령화도 심각한 수준이다. 한국선원복지고용센터에 따르면 작년 말 기준 50세 이상의 원양어선 해기사는 전체의 82.3%를 차지했다. 반면 30세 미만 해기사는 전체의 11.1%에 불과했다. 급격한 고령화는 생산성 발목을 잡고 안전사고 위험도 높이는 요인이다.

젊은 해기사 양성 역시 쉽지 않다. 해기사를 양성하는 국내 수산계 9개 고교 및 6개 대학 졸업생 중 해기사 면허를 취득한 뒤 원양어선에 승선하는 비중은 5%(2018~2022년 평균)에 그친다. 전공과 다른 직업을 택하는 졸업생이 그만큼 많다는 얘기다.

경북 포항의 수산계 고교인 한국해양마이스터고는 올해 처음으로 해기사 양성 과정에 외국인(인도네시아) 학생 4명을 선발했다. 이 학교가 인도네시아인을 뽑은 것은 한국 학생만으로 학교 운영이 어려워진 탓이다. 1980년대까지는 입학 경쟁률이 10 대 1에 이를 정도로 인기가 많았지만, 젊은 사람들이 원양어선 일을 기피하면서 지원자가 계속 줄었다. 지난해 마이스터고로 전환하기 전까진 6년 연속 신입생 정원을 채우지 못했다. 유학생들은 해기사 자격증을 따면 졸업 후 국내 원양어선에 승선할 수 있다.

“외국 해기사 승선 허용해야”

원양어업계는 고질적인 인력난 해소를 위해 외국 해기사의 국내 원양어선 승선을 허용해 달라고 정부에 요구하고 있다. 한국은 국가 간 해기사 자격증의 상호 인정을 위한 ‘어선 선원의 훈련·자격 증명 및 당직 근무 기준에 관한 국제협약’(국제 선원 협약)에 가입돼 있지 않아 다른 나라 해기사 자격증을 보유한 외국인의 취업이 불가능하다.

국민의힘은 국제 선원 협약 가입국의 해기사 자격증을 보유한 외국인의 국내 취업을 허용하는 선박직원법 개정안을 최근 발의했다. 이 같은 내용의 개정안은 20대와 21대 국회에서도 발의됐지만, 논의 테이블에조차 제대로 오르지 못했다. 원양산업협회 관계자는 “국회와 정부 모두 원양어선 인력난의 심각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원양어업계 노사 간 합의도 넘어야 할 산이다. 현행법상 외국인 선원 고용 관련 기준을 변경하려면 원양어업계를 대표하는 원양산업협회와 전국원양산업노동조합 간 합의가 필요하다. 원양어업계 노사는 2015년 어선 한 척당 외국인 기관사 한 명만 승선시킨다는 데 합의했다. 이 합의대로라면 선박직원법이 개정돼도 외국 해기사는 국내 전체 해기사의 절반을 차지하는 항해사로 일할 수 없다. 원양산업협회 관계자는 “현재 일하고 있는 고령 인력이 대거 은퇴한 뒤 외국 해기사가 도입되면 조업 핵심 기술을 전수할 골든타임을 놓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하헌형 기자 hh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