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연의 시적인 순간] 기분 좋은 날
추석이 가까워 온다. 작년엔 사과가 비쌌다. 사과꽃이 필 무렵, 우박과 폭설이 내린 까닭이다. 올해 사과는 작황이 좋다고 들었다. 내가 씻고 있는 이 사과 한 알은 내게 오기까지, 얼마나 고되었을까? 그러고도 얼마나 씩씩했을까? 햇볕 좋은 날이 많아야 하겠지만 사과가 튼실해지려면 일교차가 커야 한다. 땡볕과 추위를 고루 이겨낸 사과에 꿀이 흐른다. 붉은 껍질 속 과육에 스며든 꿀이 마치 고뇌의 흔적 같다.

때마침, 농구하고 돌아온 아이의 얼굴이 사과처럼 붉다. 얼마나 열심히 뛰었는지 등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엄마, 아파요?” 월경 전 증후군으로 종일 누워 있는 내게 아이가 묻는다. 밤새 두통과 구토로 잠을 편히 못 잤다. 거기에 우울감까지 더해 마감이 코앞인데 한 글자도 쓸 수가 없었다. 내가 쓴 글이 세상에서 제일 별로라는 생각에 휩싸이는 마의 구간이다.

“아픈 것보다 기분이 안 좋아. 아무 일도 못 하겠어.”

“그래요? 저는 오늘 정말 기분 좋은 일이 있었는데….” 우산처럼 접혀 있던 기분을 활짝 펼치는 말이다.

“무슨 일이 있었는데?”

“농구 때문이에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들은 농구 때문에 나를 원망했다. 농구하면 키가 큰다고 꼬드겨 농구부를 추천했는데, 키가 크기는커녕 친구들이 아무도 패스를 해주지 않아서 공 한 번 만져보지 못하고 농구 시간이 끝난다며 슬퍼했다. 나까지 슬프고 서러워져서 남편을 닦달해 농구 연습을 시킨 게 얼마 전이다.

“오 알았다! 친구들이 이제 패스해 주는구나?” “아뇨.”

웃음이 났다. 패스를 여전히 안 해준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는 대답이 맑고 당차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처받지 않았다는 사실이 주는 감동 때문에 마음 한쪽에 꽃이 핀 듯 환해졌다.

“농구 시간에 가위바위보를 해서 편을 나누는 걸 했거든요. 그 시간이 저는 정말 싫어요. 이름이 늦게 불리면 너무 창피하잖아요. 제가 그만큼 농구를 못 한다는 거니까.”

“그런데?” “근데 한두 번째인가? 생각보다 일찍 제 이름을 부르는 거예요. 그래서 정말 기분이 좋았어요.”

“우와! 정말 기분이 좋았겠다.”

“그런데 더 놀라운 건 뭔 줄 알아요?” “상대편 주장이 아쉬워하면서 나도 이서진 뽑으려고 했는데….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더욱더 기분이 좋아졌어요. 그래서 오늘은 최고 기분 좋은 날이에요.”

어쩜 이렇게 기분이 좋을까. 기대한 것보다 조금 빨리 자신의 이름이 불린다는 게 이렇게나 기쁠까? 기쁘다. 기뻐할 줄 아는 마음을 갖고 태어난 아이 때문에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 사랑하는 이의 기쁨은 확실히 내 기분에 도움이 된다.

남편은 서진이랑 농구 연습을 할 때마다 슬램덩크 이야기를 한다. 패스를 기다리지 말고 리바운드를 잡으라고. 옆에서 나는 속엣말을 참느라 힘들다. ‘높이 뜬 공을 낚아챌 줄 알면 뭐 하러 패스를 기다리겠냐! 어이구~! 속 터지는 소리 하고 있네….’ 하지만 서진이는 그날 이후 슛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하루에 100번씩만 하기로 했단다. 무수한 실패 끝에 조금은 다른 날이 오기도 하나 보다.

서양화가 서용선의 말을 곱씹었다. “자화상은 실제로 그리는 순간 실패하는 그림이에요. 선을 긋는 순간부터 안 닮아요. 자기가 생각하는 자기의 모습은 절대 안 나와요. 그래서 화가로서 가장 비극적인 그림 중의 하나가 자화상인 거죠.”

시를 쓰며 사는 나도 농구에 몰두한 아이도 모두 자화상을 그리는 중인 것 같다. 다른 것 같지만 실패하는 힘이 닮아 있는 세계다. 지금껏 쓰고 지운 문장들이 사과의 꿀처럼 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