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차입·동업 정신 강조했던 영풍, 돌연 변심한 까닭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3세까지 지분이 잘 쪼개지고, 승계된 상태에서 공동 경영을 한다는 건 가능하지도 적절하지도 않다.”
지난 12일 MBK파트너스와 영풍의 주주 간 계약을 발표하며 장형진 영풍그룹 고문이 한 말이다. 그동안 ‘영풍은 장씨, 고려아연은 최씨가 맡는다’는 선대의 약속에 따라 “3세에도 동업이 유지돼야 한다”고 강조해왔던 장 고문이 변심한 이유는 뭘까.
우선 장 고문의 발언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선 동업 원칙 등을 만든 두 가문의 창업 스토리 먼저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영풍그룹의 시작은 1949년 11월 ‘영풍기업사’였다. 장병희 창업주(1913년생)와 최기호 창업주(1909년생)는 같은 황해도 사리원 태생으로 해방이후 북한에 공산주의 정부가 들어서자 월남했다. 서울 남대문에서 장 창업주는 전기기구와 농기계, 최 창업주는 발동기(발전기) 등을 판매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높이 평가해 공동 창업까지 한 것으로 전해진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사업을 접고 부산으로 피신할 수 밖에 없게된다. 두 사람은 1952년 각각 절반의 지분으로 다시 영풍해운을 세운다. 당시 광업을 주로 했지만 1960년대들어 회사를 급격히 키울 기회가 찾아온다.
박정희 대통령은 중화학공업을 육성하고자 했는데, 이를 위해 철강과 비철의 ‘소재 자립’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 소재 회사를 키우라는 박 대통령의 지시에 영풍은 제련소를 짓기로 한다. 영풍은 1970년 경북 봉화군 석포면에 제련소를 준공하는데 연 1만t의 아연을 생산할 수 있는 국내 유일의 아연 생산시설이었다.
고려아연의 탄생은 4년 뒤인 1974년이다. 당시 석포제련소가 있던 석포는 낙동강 상류라 물 오염에 대한 지역민들의 불만이 강한 데다, 주변도 산지라 공장 확장에 제약이 컸다. 당시 박정희 정부는 경상남도 온산에 비철금속 단지를 조성하고자 했고, 영풍은 이 단지에 제2제련소를 지어 생산능력을 높이고자 했다. 영풍의 사업계획을 정부가 받아들이면서 지금의 고려아연 온산제련소가 탄생했다.
새로운 회사의 이름은 ‘고려아연(KOREA ZINC)’. 당시 영풍은 총 1억원을 출자해 50% 지분으로 고려아연을 창업했다. 회사는 대한민국의 중화학공업 성장과 함께 본격적인 성장 가도를 달렸고 두 회사의 사세도 커졌다.
1990년대 들어 오너 2세대 경영은 문제가 없었다. 영풍 경영은 장형진 회장이, 고려아연은 최창걸 회장이 전담하는 구조가 됐지만 지배구조는 안정적으로 유지됐고 갈등도 없었다. 어릴적부터 같이 자라온 둘 간의 갈등도 많지 않았다. 양측은 영풍의 지분을 20% 중반으로 비슷하게 유지했고, 영풍이 다시 자회사로써 고려아연을 지배하는 식이었다.
다만 2000년대 들어서 지분의 미묘한 변화가 생긴다. 영풍이 고려아연의 최대 주주가 됐는데 최창걸 명예회장 등 최씨 일가는 영풍의 개인 지분을 매각했다. 최 명예회장은 2006년 영풍 지분 약 6%를 한번에 매각하기도 했다.
이 당시에도 고려아연은 ‘상대 사업엔 절대 관여하지 않는다’는 영풍과의 ‘약속’을 믿었다고 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영풍은 사실상 장씨 일가가 지배하는 회사가 됐다. 자연스레 당시 영풍이 가지고 있던 27%대의 고려아연 주식도 장씨측의 지분이 됐다. 고려아연의 경영은 최씨 오너가가, 소유는 장씨 오너가가 하는 기묘한 동거 체제가 이렇게 시작됐다.
두 가문의 틈이 생긴 건 2022년부터다. 최 회장이 신사업을 추진하면서 현대자동차와 한화, LG화학 등 외부 자금을 끌어들인 게 발단이었다. ‘무차입 경영’이 원칙이던 장 고문 측은 노골적으로 반대 의사를 밝혔다. 결국 두 회사는 각종 소송과 주주총회 표 대결을 시작했다.
그동안의 대결은 고려아연의 ‘판정승’이었다.
이 과정에서 장 고문이 결정적으로 변심하게 된 사건이 발생한다. 아들 장세환 대표가 경영하던 서린상사 경영권 분쟁이다. 서린상사는 창업주 두 집안 간 우호 관계의 상징이다. 서린상사 지분은 최씨 일가와 고려아연을 합쳐 66.7%에 달한다. 그럼에도 대표이사는 지분 33.33%인, 영풍을 이끄는 장 대표에게 맡겼다.
서린상사는 고려아연과 영풍의 비철금속 제품을 유통해 온 회사로 지난해 매출 1조5290억원, 영업이익 175억원을 올렸다.
영풍은 결국 이사회를 장악한 고려아연 측에 밀려 서린상사 경영권을 완전히 잃었다. 장 대표도 대표직에서 물러났다. 연 수백억원의 이익을 내는 회사를 포기하고 새로운 상사를 세우는 과정에서 장 고문은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 측이 선을 넘었다”고 판단했고 이를 뒤집을 행동에 나섰다는 것이다.
장 고문은 고려아연의 경영권을 빼앗기로 했고 이 과정에서 ‘외부 투자 유치 등을 통한 차입 경영을 하지 않는다’는 경영 원칙도 깼다. 영풍그룹은 부채비율이 20~30%를 유지할 정도로 외부 자금을 들여와 확장에 나서는 걸 꺼려왔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자금력이 있는 누군가를 동원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결국 창사 후 처음으로 사모펀드와 손을 잡았고 경영권도 이들에게 주기로 했다. 영풍은 장씨, 고려아연은 최씨가 맡는다는 동업 정신을 스스로 깬 것이다.
업계에선 장 고문이 고려아연 장악을 수개월 동안 치밀하게 준비한 것으로 보고 있다. 지난 12일 공개매수를 선언한 뒤 다음날 곧바로 고려아연의 자사주 취득을 막기 위한 가처분 신청은 낸 것만 봐도 그렇다. 고려아연의 다음수까지 치밀하게 계산해 빠르게 행동에 나섰다. 이어 고려아연의 회계장부도 들여다 보겠다고 선언했다. 이미 같은날 회계장부 등의 열람 및 등사 가처분 신청을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제기한 상황이다.
영풍은 회계장부 열람을 통해 최 회장의 △사모펀드 투자 배임 △SM엔터테인먼트 주가조작 △이사회 결의 없는 지급보증 등에 대한 여러 의혹들을 살펴본다는 입장이다.
업계에선 75년 동안 이어진 두 가문의 동업은 완전히 끝이 났다고 보고 있다. 공개 매수에 성공하면 MBK파트너스가 고려아연의 경영권을 장악하고, 실패를 할 경우 어떤 방식으로든지 영풍이 고려아연의 지분을 처분할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다.
김우섭 기자
지난 12일 MBK파트너스와 영풍의 주주 간 계약을 발표하며 장형진 영풍그룹 고문이 한 말이다. 그동안 ‘영풍은 장씨, 고려아연은 최씨가 맡는다’는 선대의 약속에 따라 “3세에도 동업이 유지돼야 한다”고 강조해왔던 장 고문이 변심한 이유는 뭘까.
우선 장 고문의 발언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선 동업 원칙 등을 만든 두 가문의 창업 스토리 먼저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영풍그룹의 시작은 1949년 11월 ‘영풍기업사’였다. 장병희 창업주(1913년생)와 최기호 창업주(1909년생)는 같은 황해도 사리원 태생으로 해방이후 북한에 공산주의 정부가 들어서자 월남했다. 서울 남대문에서 장 창업주는 전기기구와 농기계, 최 창업주는 발동기(발전기) 등을 판매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높이 평가해 공동 창업까지 한 것으로 전해진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사업을 접고 부산으로 피신할 수 밖에 없게된다. 두 사람은 1952년 각각 절반의 지분으로 다시 영풍해운을 세운다. 당시 광업을 주로 했지만 1960년대들어 회사를 급격히 키울 기회가 찾아온다.
박정희 대통령은 중화학공업을 육성하고자 했는데, 이를 위해 철강과 비철의 ‘소재 자립’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 소재 회사를 키우라는 박 대통령의 지시에 영풍은 제련소를 짓기로 한다. 영풍은 1970년 경북 봉화군 석포면에 제련소를 준공하는데 연 1만t의 아연을 생산할 수 있는 국내 유일의 아연 생산시설이었다.
고려아연의 탄생은 4년 뒤인 1974년이다. 당시 석포제련소가 있던 석포는 낙동강 상류라 물 오염에 대한 지역민들의 불만이 강한 데다, 주변도 산지라 공장 확장에 제약이 컸다. 당시 박정희 정부는 경상남도 온산에 비철금속 단지를 조성하고자 했고, 영풍은 이 단지에 제2제련소를 지어 생산능력을 높이고자 했다. 영풍의 사업계획을 정부가 받아들이면서 지금의 고려아연 온산제련소가 탄생했다.
새로운 회사의 이름은 ‘고려아연(KOREA ZINC)’. 당시 영풍은 총 1억원을 출자해 50% 지분으로 고려아연을 창업했다. 회사는 대한민국의 중화학공업 성장과 함께 본격적인 성장 가도를 달렸고 두 회사의 사세도 커졌다.
1990년대 들어 오너 2세대 경영은 문제가 없었다. 영풍 경영은 장형진 회장이, 고려아연은 최창걸 회장이 전담하는 구조가 됐지만 지배구조는 안정적으로 유지됐고 갈등도 없었다. 어릴적부터 같이 자라온 둘 간의 갈등도 많지 않았다. 양측은 영풍의 지분을 20% 중반으로 비슷하게 유지했고, 영풍이 다시 자회사로써 고려아연을 지배하는 식이었다.
다만 2000년대 들어서 지분의 미묘한 변화가 생긴다. 영풍이 고려아연의 최대 주주가 됐는데 최창걸 명예회장 등 최씨 일가는 영풍의 개인 지분을 매각했다. 최 명예회장은 2006년 영풍 지분 약 6%를 한번에 매각하기도 했다.
이 당시에도 고려아연은 ‘상대 사업엔 절대 관여하지 않는다’는 영풍과의 ‘약속’을 믿었다고 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영풍은 사실상 장씨 일가가 지배하는 회사가 됐다. 자연스레 당시 영풍이 가지고 있던 27%대의 고려아연 주식도 장씨측의 지분이 됐다. 고려아연의 경영은 최씨 오너가가, 소유는 장씨 오너가가 하는 기묘한 동거 체제가 이렇게 시작됐다.
두 가문의 틈이 생긴 건 2022년부터다. 최 회장이 신사업을 추진하면서 현대자동차와 한화, LG화학 등 외부 자금을 끌어들인 게 발단이었다. ‘무차입 경영’이 원칙이던 장 고문 측은 노골적으로 반대 의사를 밝혔다. 결국 두 회사는 각종 소송과 주주총회 표 대결을 시작했다.
그동안의 대결은 고려아연의 ‘판정승’이었다.
이 과정에서 장 고문이 결정적으로 변심하게 된 사건이 발생한다. 아들 장세환 대표가 경영하던 서린상사 경영권 분쟁이다. 서린상사는 창업주 두 집안 간 우호 관계의 상징이다. 서린상사 지분은 최씨 일가와 고려아연을 합쳐 66.7%에 달한다. 그럼에도 대표이사는 지분 33.33%인, 영풍을 이끄는 장 대표에게 맡겼다.
서린상사는 고려아연과 영풍의 비철금속 제품을 유통해 온 회사로 지난해 매출 1조5290억원, 영업이익 175억원을 올렸다.
영풍은 결국 이사회를 장악한 고려아연 측에 밀려 서린상사 경영권을 완전히 잃었다. 장 대표도 대표직에서 물러났다. 연 수백억원의 이익을 내는 회사를 포기하고 새로운 상사를 세우는 과정에서 장 고문은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 측이 선을 넘었다”고 판단했고 이를 뒤집을 행동에 나섰다는 것이다.
장 고문은 고려아연의 경영권을 빼앗기로 했고 이 과정에서 ‘외부 투자 유치 등을 통한 차입 경영을 하지 않는다’는 경영 원칙도 깼다. 영풍그룹은 부채비율이 20~30%를 유지할 정도로 외부 자금을 들여와 확장에 나서는 걸 꺼려왔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자금력이 있는 누군가를 동원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결국 창사 후 처음으로 사모펀드와 손을 잡았고 경영권도 이들에게 주기로 했다. 영풍은 장씨, 고려아연은 최씨가 맡는다는 동업 정신을 스스로 깬 것이다.
업계에선 장 고문이 고려아연 장악을 수개월 동안 치밀하게 준비한 것으로 보고 있다. 지난 12일 공개매수를 선언한 뒤 다음날 곧바로 고려아연의 자사주 취득을 막기 위한 가처분 신청은 낸 것만 봐도 그렇다. 고려아연의 다음수까지 치밀하게 계산해 빠르게 행동에 나섰다. 이어 고려아연의 회계장부도 들여다 보겠다고 선언했다. 이미 같은날 회계장부 등의 열람 및 등사 가처분 신청을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제기한 상황이다.
영풍은 회계장부 열람을 통해 최 회장의 △사모펀드 투자 배임 △SM엔터테인먼트 주가조작 △이사회 결의 없는 지급보증 등에 대한 여러 의혹들을 살펴본다는 입장이다.
업계에선 75년 동안 이어진 두 가문의 동업은 완전히 끝이 났다고 보고 있다. 공개 매수에 성공하면 MBK파트너스가 고려아연의 경영권을 장악하고, 실패를 할 경우 어떤 방식으로든지 영풍이 고려아연의 지분을 처분할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다.
김우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