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연합통신(현 연합뉴스)과 단독 회견 당시의 고인. 사진=연합뉴스
1994년 연합통신(현 연합뉴스)과 단독 회견 당시의 고인. 사진=연합뉴스
보수와 진보를 넘나들며 양 진영의 교류에 애쓴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이 지난 15일 오전 8시 10분께 서울 한 병원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고 유족이 16일 전했다. 향년 90세.

충북 청주에서 태어난 고인은 청주고, 서울대 법대를 졸업했다. 1958년 한국일보 기자로 언론계 생활을 한 고인은 민국일보를 거쳐 1962∼1972년 조선일보 기자와 정치부장, 편집부국장, 1972년 서울신문 편집국장, 1977년 서울신문 주필을 지냈다.

고인은 정치인으로도 활약했다. 1979년 민주공화당 후보로 서울 강서구에서 제10대 국회의원이 된 것을 시작으로 13대까지 강서구에서 4선을 역임했다. 1980년에는 민주정의당 창당에 참여, 민정당 정책위의장을 두 번 역임하는 등 전두환 정권의 핵심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당시 정권이 추진하던 ‘학원안정법’에 반대의견을 냈다. 당시 두 딸이 운동권 학생이라는 점이 화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1986년 3월 ‘국회 국방위원회 회식 사건’ 당시 현장에 있었다. 고인이 벽으로 던진 술잔 파편이 군 장성에게 맞은 것이 일이 커지는 계기가 됐다.

노태우 정권 인수위에서 5·18 광주사태 명칭 변경이 논의됐을 때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제안해 관철했다. 당시 야당은 5·18 광주민주화투쟁이라는 용어를 주장한 바 있다.

김영삼 정부에서는 1993∼1994년에는 노동부 장관을 지냈다. 이때 노동계의 요구를 받아들여 기존 '근로자의 날'(3월10일)을 5월1일로 바꿨다. 당시 노동부 안은 명칭도 ‘노동절’로 바꾸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보수 진영의 반발을 고려, 명칭은 ‘근로자의 날’을 쓰기로 했다.

이후 5년간 호남대 객원교수로 정치 문제를 강의했다. 보수 정권 핵심으로 있으면서도 진보와 교류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런 그에게 붙은 별명이 ‘체제 내 리버럴’이다. 유족에 따르면 고은 시인은 ‘의식은 야(野)에 있으나 현실은 여(與)에 있었다/ 꿈은 진보에 있으나/ 체질은 보수에 있었다’ 쓴 적도 있다.

고인은 생전 공을 인정받아 새마을훈장 근면장과 청조근정훈장을 받았다. 딸 남영숙 이화여대 교수는 “아버지는 보수와 혁신을 넘나든 정치인이었고, 그 점을 자신도 자랑스러워하셨다”고 전했다.

장서가와 독서가로 유명했던 고인은 ‘아주 사적인 정치 비망록’(2006) 등 다수의 저서를 내기도 했다. 지난해 1월과 올해 초에도 각각 ‘시대의 조정자: 보수와 혁신의 경계를 가로지른 한 지식인의 기록’, ‘내가 뭣을 안다고: 잊혀간 정계와 사회문화의 이면사’를 출판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변문규씨와 남화숙(미국 워싱턴주립대 명예교수)·남영숙·남관숙·남상숙 4녀, 사위 예종영(전 가톨릭대 교수)·김동석(KDI 국제정치대학원 교수)씨 등이 있다. 빈소는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 3호실, 발인 19일 오전 5시 20분이다.

김세린 한경닷컴 기자 celin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