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진 3m 앞에서 연주를 들었다, 숨소리까지 들리는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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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조민선의 런던 리뷰 오브 뮤직
<A Midnight Autumn’s Dream, 그리고 조성진>
BBC 프롬스 2024 리뷰
조성진, 라벨의 세계 재창조
<A Midnight Autumn’s Dream, 그리고 조성진>
BBC 프롬스 2024 리뷰
조성진, 라벨의 세계 재창조
8월 31일, BBC 뉴스 기상캐스터는 이렇게 말했다. “The last day of summer”라고, 진행자들은 “Miserable!”, “Oh my god!”을 연발했다. 예보는 정확했다. 9월 시작과 함께 런던 특유의 스산한 기운이 감돌았다. 해가 짧아지기 시작했고 구름 낀 날이 늘면서 하늘빛마저 몇 톤 어두워졌다.
14일 ‘막공’을 앞두고 프롬스의 주 무대, 로열앨버트홀 근처의 들떠있던 공기도 조금 차분해졌다. 축제도 슬슬 끝나가는구나 싶던 중, 갑자기 9월 12일 목요일 밤 심야 콘서트에 조성진이 무대에 오른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피아니스트 안드라스 쉬프 경(Sir András Schiff)이 다리가 부러지는 부상으로 연주를 할 수 없게 된 탓이라고 했다.
베를린과 런던이 불과 2시간 비행 거리라고는 해도, 예정에 없던 연주를 갑작스럽게 하기가 마냥 쉬운 일은 아닐 터다. 하지만 프롬스의 SOS에 조성진은 의리 있게 달려와 줬다. 프롬스는 공식 사이트를 통해서도 “빠르게 결정해준 조성진에게 감사하다”고 각별히 고마움을 표시했다.
갑작스레 연주자가 바뀐 늦은 밤 공연이라 좌석도 있었지만, 프로밍(스탠딩) 티켓을 샀다. 물론 5층 높이 갤러리가 아니라 아레나로. 돈을 들고도 티켓을 못 구하는 한국에서, 예매 창 3초 컷의 절망을 맛봤던 숱한 경험으로, 나는 이날 프로밍이 얼마나 특별한 기회인지 잘 알고 있었다. 아티스트의 숨결, 눈빛, 그의 손을 바로 코앞에서 보고 싶었다. 공연 시작은 밤 10시 15분. 어두컴컴해진 런던의 가을, 싸늘한 공기에도 9시 15분부터 줄을 서, 9시 45분쯤 입장했다. 미리 받아둔 번호표가 있어서 수월했다.(프롬스 측은 프로밍 관객들의 질서 있는 입장을 위해, 아침부터 번호표를 배부한다.) 프로밍만 10년씩 해온 ‘고수’들이 선점한다는 1열엔 못 섰지만 바로 뒷줄에 섰다. 위치는 무대 중앙부 피아노 바로 앞, 피아니스트와 거리는 3m도 안 된다. 조성진의 표정과 눈빛, 땀방울, 손가락의 움직임까지 직관할 수 있는 자리였다. 프롬스 종료 이틀 전에 누리는 행운에 연주 시작도 전에 가슴이 뛰었다.
긴급 공지한 공연인데도, 그 심야 공연장에 3분의 2 이상 관객이 들어찼다. 음악평론가이자 BBC 라디오 3 진행자 톰 서비스(Tom Service)가 간단히 오늘 상황과 레퍼토리를 설명했고, 조성진이 무대에 등장했다. 오늘의 레퍼토리는 라벨과 리스트. 런던의 가을, 밤 시간대의 신비로운 분위기와 잘 어울리는 선곡이었다.
조성진은 라벨의 ‘거울(Miroirs)’ 중 세 곡, 2번 ‘슬픈 새들(Oiseaux tristes)’과 3번 ‘대양 위의 조각배(Un barque sur l’oceán)’, 4번 ‘어릿광대의 아침노래(Alborada del gracioso)’로 연주를 시작했다. 잊을 수 없는 꿈의 힘, 작고 외로운 새의 비행과 도전, 드넓은 바다로의 항해 등의 이야기가 펼쳐졌다.
한밤에 듣는 라벨은 판타지의 세계였다. 오케스트레이션(관현악 편곡)의 달인이었던 라벨은 기교적으로 난해하고 화려한 곡을 작곡했다. 덕분에 피아니스트는 고통스럽지만, 신비로운 사운드를 빚어낸다.
조성진의 물 흐르듯 유려한 타건은 마치 물결처럼, 새의 날갯짓처럼 들렸다. 피아노 소리가 어찌나 화려한지 때때로 하프 소리처럼 느껴졌다. 앞서 진행자 톰은 “라벨은 비현실적으로 생동감 있는 이미지를 선율로 그려낸 작곡가”라고 소개했다. 라벨이 오선지 위에 그려낸 선율은 조성진의 연주를 거쳐 다시 눈앞에 이미지로 전환되는 듯했다. 이런 황홀경이 있을까.
조성진은 곡의 리드미컬한 터치를 몸으로도 표현했다. 그의 고갯짓, 찰나의 표정, 숨소리까지 피아노 소리와 함께 어우러졌다. 집중력이 최고에 달하는 순간에는 숨을 참다가, 한번에 쓰읍하며 힘들게 호흡했다. 멀리서 볼 때는 몰랐던 그의 섬세한 숨결과 표정을 하나하나 느끼고 공감하며 음악에 빠져들었다.
라벨이 비현실적인 환상의 세계였다면, 리스트는 사색적이며 철학적인 세계였다. 조성진은 리스트의 피아노 연작 '순례의 해 제2년' 가운데 '이탈리아' 7개 전곡을 연주했다. 이 작품은 마치 대서사시를 쓰듯 입체적인 내용 구성과 신의 경지에 닿는 듯한 ‘초월 기교’가 특징이다. 그러면서도 아름다운 세계를 리스트는 창조했고, 조성진은 그의 세계를 재창조했다. 리스트는 예술적, 문학적인 영감을 토대로 작품을 썼다. 첫 곡은 라파엘로의 회화 ‘성모 마리아의 결혼’에서 영감을 받았다. 두 번째 곡은 미켈란젤로의 조각에서 받은 느낌을 악보에 옮겼다. 조성진은 ‘인간 존재에 대한 고찰’을 묵직한 선율로 표현했다. 세 번째 곡 ‘살바도르 로자의 칸초네타’의 발랄한 타건과 가볍게 흔드는 고개, 무언가를 상상하고 기뻐하는 눈빛에 객석이 함께 날아올랐다. 가까이에서 느끼는 조성진의 숨결마저 조금 편안했다.
뒤이어 이탈리아의 시인 페트라르카의 ‘소네트’에서 영감을 받은 3개 곡이 이어졌다. 마지막 7번 ‘단테 소나타’는 리스트가 단테의 ‘신곡’을 읽고 작곡했다. 조성진은 연옥의 고통과 천국의 환희, 구원을 향한 희망까지 깊고도 다채로운 감정을 ‘초월 기교’로 표현했다. 이 작품에 대해 BBC는 “기존의 한계를 뛰어넘고, 그 이상의 가능성을 탐구하려는 노력, 극한을 넘어서는 성취를 주는 곡”이라고 설명했다.
45분에 걸친 연주가 끝나자 관객들은 기립박수를 쏟아냈다. 자정이 가까워져 오는 한밤의 관객들이 쏟아낸 환호와 박수는 더 크게 들렸다. 커튼콜 후 조성진은 앵콜곡을 1곡 들려주겠다는 의미로 검지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리스트의 ‘위로(consolation)’ 3번을 연주했다. 로맨틱한 무드의 서정적인 멜로디로 청중을 매혹했다. 직전에 들은 격동적인 리스트와는 반대되는 분위기로 공연을 마무리했다.
“What a journey!(정말 대단한 여정이었어!)”
구도자의 모습이 이러할까. 조성진은 이날 연주를 통해 기존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연주자의 분투를 보여줬다. 70여 분의 연주 시간 내내 그의 머리는 땀으로 젖었고, 숨을 참아가며 때론 낮은 탄성을 뱉으며 연주에 몰입했다. 단련된 연주를 보여주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과 노력과 충돌과 조율이 있었을까. 그 치열한 노력으로 조성진만의 표현, 세계가 만들어졌을 것이다. 로열앨버트홀이라는 공간 자체를 다른 곳으로 만들어낸 연주에 경건한 마음까지 들었다. 오늘 공연은 리스트의 곡처럼, 사색을 불러왔다. 조성진 같은 예술가가 평범한 우리에게 주는 감동의 밀도는 어디까지 가능할까? 표현력의 한계를 딛고, 이날 무대는 감히 이렇게 써도 될 것 같다.
“지금껏 런던에서 경험한 최고의 밤이었어.”
[BBC 프롬스 2024 - 조성진 커튼콜]
런던=조민선 아르떼 객원기자
14일 ‘막공’을 앞두고 프롬스의 주 무대, 로열앨버트홀 근처의 들떠있던 공기도 조금 차분해졌다. 축제도 슬슬 끝나가는구나 싶던 중, 갑자기 9월 12일 목요일 밤 심야 콘서트에 조성진이 무대에 오른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피아니스트 안드라스 쉬프 경(Sir András Schiff)이 다리가 부러지는 부상으로 연주를 할 수 없게 된 탓이라고 했다.
베를린과 런던이 불과 2시간 비행 거리라고는 해도, 예정에 없던 연주를 갑작스럽게 하기가 마냥 쉬운 일은 아닐 터다. 하지만 프롬스의 SOS에 조성진은 의리 있게 달려와 줬다. 프롬스는 공식 사이트를 통해서도 “빠르게 결정해준 조성진에게 감사하다”고 각별히 고마움을 표시했다.
갑작스레 연주자가 바뀐 늦은 밤 공연이라 좌석도 있었지만, 프로밍(스탠딩) 티켓을 샀다. 물론 5층 높이 갤러리가 아니라 아레나로. 돈을 들고도 티켓을 못 구하는 한국에서, 예매 창 3초 컷의 절망을 맛봤던 숱한 경험으로, 나는 이날 프로밍이 얼마나 특별한 기회인지 잘 알고 있었다. 아티스트의 숨결, 눈빛, 그의 손을 바로 코앞에서 보고 싶었다. 공연 시작은 밤 10시 15분. 어두컴컴해진 런던의 가을, 싸늘한 공기에도 9시 15분부터 줄을 서, 9시 45분쯤 입장했다. 미리 받아둔 번호표가 있어서 수월했다.(프롬스 측은 프로밍 관객들의 질서 있는 입장을 위해, 아침부터 번호표를 배부한다.) 프로밍만 10년씩 해온 ‘고수’들이 선점한다는 1열엔 못 섰지만 바로 뒷줄에 섰다. 위치는 무대 중앙부 피아노 바로 앞, 피아니스트와 거리는 3m도 안 된다. 조성진의 표정과 눈빛, 땀방울, 손가락의 움직임까지 직관할 수 있는 자리였다. 프롬스 종료 이틀 전에 누리는 행운에 연주 시작도 전에 가슴이 뛰었다.
긴급 공지한 공연인데도, 그 심야 공연장에 3분의 2 이상 관객이 들어찼다. 음악평론가이자 BBC 라디오 3 진행자 톰 서비스(Tom Service)가 간단히 오늘 상황과 레퍼토리를 설명했고, 조성진이 무대에 등장했다. 오늘의 레퍼토리는 라벨과 리스트. 런던의 가을, 밤 시간대의 신비로운 분위기와 잘 어울리는 선곡이었다.
조성진은 라벨의 ‘거울(Miroirs)’ 중 세 곡, 2번 ‘슬픈 새들(Oiseaux tristes)’과 3번 ‘대양 위의 조각배(Un barque sur l’oceán)’, 4번 ‘어릿광대의 아침노래(Alborada del gracioso)’로 연주를 시작했다. 잊을 수 없는 꿈의 힘, 작고 외로운 새의 비행과 도전, 드넓은 바다로의 항해 등의 이야기가 펼쳐졌다.
한밤에 듣는 라벨은 판타지의 세계였다. 오케스트레이션(관현악 편곡)의 달인이었던 라벨은 기교적으로 난해하고 화려한 곡을 작곡했다. 덕분에 피아니스트는 고통스럽지만, 신비로운 사운드를 빚어낸다.
조성진의 물 흐르듯 유려한 타건은 마치 물결처럼, 새의 날갯짓처럼 들렸다. 피아노 소리가 어찌나 화려한지 때때로 하프 소리처럼 느껴졌다. 앞서 진행자 톰은 “라벨은 비현실적으로 생동감 있는 이미지를 선율로 그려낸 작곡가”라고 소개했다. 라벨이 오선지 위에 그려낸 선율은 조성진의 연주를 거쳐 다시 눈앞에 이미지로 전환되는 듯했다. 이런 황홀경이 있을까.
조성진은 곡의 리드미컬한 터치를 몸으로도 표현했다. 그의 고갯짓, 찰나의 표정, 숨소리까지 피아노 소리와 함께 어우러졌다. 집중력이 최고에 달하는 순간에는 숨을 참다가, 한번에 쓰읍하며 힘들게 호흡했다. 멀리서 볼 때는 몰랐던 그의 섬세한 숨결과 표정을 하나하나 느끼고 공감하며 음악에 빠져들었다.
라벨이 비현실적인 환상의 세계였다면, 리스트는 사색적이며 철학적인 세계였다. 조성진은 리스트의 피아노 연작 '순례의 해 제2년' 가운데 '이탈리아' 7개 전곡을 연주했다. 이 작품은 마치 대서사시를 쓰듯 입체적인 내용 구성과 신의 경지에 닿는 듯한 ‘초월 기교’가 특징이다. 그러면서도 아름다운 세계를 리스트는 창조했고, 조성진은 그의 세계를 재창조했다. 리스트는 예술적, 문학적인 영감을 토대로 작품을 썼다. 첫 곡은 라파엘로의 회화 ‘성모 마리아의 결혼’에서 영감을 받았다. 두 번째 곡은 미켈란젤로의 조각에서 받은 느낌을 악보에 옮겼다. 조성진은 ‘인간 존재에 대한 고찰’을 묵직한 선율로 표현했다. 세 번째 곡 ‘살바도르 로자의 칸초네타’의 발랄한 타건과 가볍게 흔드는 고개, 무언가를 상상하고 기뻐하는 눈빛에 객석이 함께 날아올랐다. 가까이에서 느끼는 조성진의 숨결마저 조금 편안했다.
뒤이어 이탈리아의 시인 페트라르카의 ‘소네트’에서 영감을 받은 3개 곡이 이어졌다. 마지막 7번 ‘단테 소나타’는 리스트가 단테의 ‘신곡’을 읽고 작곡했다. 조성진은 연옥의 고통과 천국의 환희, 구원을 향한 희망까지 깊고도 다채로운 감정을 ‘초월 기교’로 표현했다. 이 작품에 대해 BBC는 “기존의 한계를 뛰어넘고, 그 이상의 가능성을 탐구하려는 노력, 극한을 넘어서는 성취를 주는 곡”이라고 설명했다.
45분에 걸친 연주가 끝나자 관객들은 기립박수를 쏟아냈다. 자정이 가까워져 오는 한밤의 관객들이 쏟아낸 환호와 박수는 더 크게 들렸다. 커튼콜 후 조성진은 앵콜곡을 1곡 들려주겠다는 의미로 검지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리스트의 ‘위로(consolation)’ 3번을 연주했다. 로맨틱한 무드의 서정적인 멜로디로 청중을 매혹했다. 직전에 들은 격동적인 리스트와는 반대되는 분위기로 공연을 마무리했다.
“What a journey!(정말 대단한 여정이었어!)”
구도자의 모습이 이러할까. 조성진은 이날 연주를 통해 기존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연주자의 분투를 보여줬다. 70여 분의 연주 시간 내내 그의 머리는 땀으로 젖었고, 숨을 참아가며 때론 낮은 탄성을 뱉으며 연주에 몰입했다. 단련된 연주를 보여주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과 노력과 충돌과 조율이 있었을까. 그 치열한 노력으로 조성진만의 표현, 세계가 만들어졌을 것이다. 로열앨버트홀이라는 공간 자체를 다른 곳으로 만들어낸 연주에 경건한 마음까지 들었다. 오늘 공연은 리스트의 곡처럼, 사색을 불러왔다. 조성진 같은 예술가가 평범한 우리에게 주는 감동의 밀도는 어디까지 가능할까? 표현력의 한계를 딛고, 이날 무대는 감히 이렇게 써도 될 것 같다.
“지금껏 런던에서 경험한 최고의 밤이었어.”
[BBC 프롬스 2024 - 조성진 커튼콜]
런던=조민선 아르떼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