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소격동 학고재갤러리의 ‘잃어버린 줄 알았어!’ 전시 전경. 딩이의 ‘십시’ 연작 사이로 엄정순 작가의 ‘얼굴 없는 코끼리’ 조각이 설치됐다.  학고재갤러리 제공
서울 소격동 학고재갤러리의 ‘잃어버린 줄 알았어!’ 전시 전경. 딩이의 ‘십시’ 연작 사이로 엄정순 작가의 ‘얼굴 없는 코끼리’ 조각이 설치됐다. 학고재갤러리 제공
“한국국제아트페어(KIAF)-프리즈 서울은 예술이 금융이 된 시대를 열었습니다. 판매 보고서는 작품 가격 순서대로 줄을 세우고, 삼청동 청담동 일대는 갤러리들이 여는 파티로 불야성을 이루죠. 과연 그것이 우리에게 좋은 현상이냐는 질문에서 출발한 전시입니다.”(이용우 상하이 통지대 교수)

KIAF-프리즈 서울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가운데 상업화에 가려진 미술의 본질을 돌아보자는 전시가 열렸다. 서울 소격동 학고재갤러리의 ‘잃어버린 줄 알았어!’ 기획전이다. 전시 제목이 내포한 뜻은 이중적이다. 잃어버렸으면 안 됐다고 반성하는 의미이자, 잃어버린 줄 알았는데 아직 남아 있다는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한다.

광주비엔날레 대표를 지낸 이용우 교수와 독립 큐레이터 왕리인이 공동 기획한 이번 전시에는 한·중·일 대표 작가 3인이 참여했다. 엄정순(한국), 딩이(중국), 시오타 치하루(일본)가 회화와 조각 등 60여 점을 선보였다. 예술의 공동체 정신과 사회적 포용성 등 가치를 우직하게 추구해온 이들의 작품 세계를 비교하며 감상할 수 있다.

엄정순 작가는 1996년 사단법인 ‘우리들의 눈’을 설립한 이후 시각장애 학생들과 예술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15년 전 동남아시아 지역을 여행하다가 야생에서 마주친 코끼리가 작가 본인한테 말을 거는 것 같았다고 한다. ‘장님과 코끼리’ 이야기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하는 코끼리 조각 연작에 착안하게 된 배경이다.

보통 작품은 만지지 않는 것이 상식이지만 엄 작가는 관객이 오감을 동원할 것을 권한다. 시각장애 학생이 느끼고 표현한 코끼리 형상을 철판으로 형상화하고, 그 위를 울 직물로 덮은 그의 조각이 그렇다. 표면에 일어난 보푸라기와 관객의 손때마저 작품의 일부다. 관객은 작가가 새긴 수억 개의 선을 만지면서 새로운 이미지에 도달하게 된다.

실제 크기로 재현한 작가의 코끼리는 코와 귀, 다리 등 신체의 일부가 사라진 모습이다. 일반적인 관점에서 코끼리를 특징짓는 중요한 부위가 결핍된 셈이다. 작가는 “결핍은 상상력으로 가는 중요한 통로”라며 “코와 귀 등 신체의 일부가 사라진 코끼리들을 모아 어딘가로 행진시키는 꿈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딩이는 중국 기하학적 추상화의 선구자 격인 인물이다. 중국이 개혁·개방으로 혼란을 겪던 1986년부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문화대혁명 당시 추상화가들이 여론의 뭇매를 맞으면서 절멸하다시피 한 시절이다. 작가는 남들이 새로운 형식을 찾아 나설 때 열십자(十) 무늬만을 고집하며 40여 년째 ‘십시(十示)’ 시리즈를 그리고 있다.

‘+’와 ‘’ 패턴이 교차하는 그의 몇몇 작품은 마치 밤하늘에 펼쳐진 은하수처럼 보인다. 상하이에서 나고 자란 작가가 어른이 되며 찾은 티베트의 초원에서 영감을 얻은 결과다. 작가는 “문호가 열리면서 세계의 변화를 목도했다”며 “사회적 모순과 불평등, 종교와 역사, 자연 등이 창작의 원동력이 됐다”고 설명했다.

시오타 치하루는 실을 엮은 설치 작업으로 삶과 죽음, 공동체 네트워크의 의미를 전한다. 붉은 색채에 기반하는 그의 초기작은 생명의 시작을 직관적으로 암시한다. 핏줄처럼 엮인 실 사이로 열쇠와 창틀, 헌 옷, 신발 등 일상적인 사물이 배치됐다.

시오타의 작품은 최근으로 올수록 검은색이 두드러진다. 짙게 드리운 암흑은 죽음을 암시한다. 그의 작품 전시를 기획했던 다테하타 아키라 일본 구사마야요이미술관 관장은 “물리적인 신체가 사라져도 사랑하는 가족이 있기에 늘 살아 있다”며 “진짜 고통스러운 것은 기억이다. 시오타의 작업은 정치·사회·환경적으로 우리에게 상속된 기억을 치유하려는 여정”이라고 말했다.

전시는 오는 10월 5일까지.

안시욱 기자 siook95@hankyung.com